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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료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 비문

작성자빈구름|작성시간11.08.18|조회수183 목록 댓글 0

유당 신라국 고 강주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대공영탑 비명

 

전서국 도통순관 시어사 내봉공 사 자금어대 신 최치원은 교지를 받들어 찬술함.

 

대저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아니하고 사람은 다른 나라가 없다. 이르므로 동방사람의 아들이 석(釋)이되고 유(儒)가 되는데는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에 떠서 이중 삼중 통역을 거쳐 유학 할 제 목숨은 조각배에 부쳤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행하였다.

빈것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고  어려움을 먼저 한 뒤에 소득이 있었으니 마치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높은 것을 꺼리지 아니하고  주를 더듬는 자는 용이 잠든 물속의 깊은 것을 피하지 아니함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횟불을 얻어서 빛이 오승에 통하고  아름다운 음식을 얻어 맛이 육경에 배불렀다.

다투어 청문으로 하여금 선으로 들어오게 하고 능히 일국으로 하여금 인에 흥기되게 하였다.

학자들이 혹 말하기를 인도와 궐리의 교를 설하는 것이 흐름이 나누이고 체(體)가 달라서 둥근 구멍에 네모난 나무자루를 박는 것이라 하여 서로 모순되어 각기 한 모퉁이만 고집한다.

내가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를 설하는 자는 문으로서 사(辭)를 해하지 아니하고 사로서 뜻을 해하지 아니할 것이니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일단뿐이리요. 대저 각기 마땅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여산의 혜원이 논을 지어서 여래와 주공 공자가 출발한 것은 비록 다르나 돌아가는 바는 한가지이니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능히 서로 겸하지 못하는 것은 물이 능히 겸하여 용납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심약의 말에 공자는 발단(發端)을 하였고 석씨는 극치가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것을 아는 이로서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를 말 할 수는 있다 하겠도다.

불이 말한 심법은 현(玄)하고 또 현(玄)하여 이름으로 이름할 수 없고 설하려 하여도 설할 것이 없어서 비록 달(月)을 얻었다 이르나 손가락을 혹 잊어버려 마침내 바람을 매고 그림자를 포착하기 어려움과 같다.

그러나 멀고 높은 데로 오르자면 가깝고 낮은 데서부터 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비유를 취한들 무슨 해로움이 있으리오?

또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라고 했으니 곧 저 정명이 침묵으로써 문수를 대한 것과 선서(善逝)가 비밀히 가섭(迦葉)에게 전한 것은 혀를 놀리지 아니하고 능히 마음에 새기게 하는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아니한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어디에 가서 얻으리오?

미묘한 도를 멀리 전하여 우리 고장에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가 그분이다.

선사는 법휘는 혜조요 속성은 최씨이다.

그 선대는 한족으로 산동의 명문이었는데 수나라가 요동을 칠 때에 고구려에서 많이 죽고 뜻을 굽혀 그곳의 백성이 된 자가 있었으니 당에 이르러 사군을 점령하매 지금은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창원인데 재가 하면서 출가의 행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가 일찍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중이 와서 이르기를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로서 표적을 삼더니  얼마 안되어 선사를 임신하였다.

나면서 울지 아니하였으며  곧 일찍부터 소리없고 말없는 깊은 도의 싹을 타고났던 것이다.

칠팔세가 되자 유회할 때에 반드시 잎을 태워서 향을 삼고  꽃을 따서 공양을 삼았으며 혹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시간이 지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선의 뿌리가 실로 백천겁(百千劫)전에 심어진 바이요 배워서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십여세로부터 이십세에 이르기 까지 부모를 봉양하기에 뜻이 간절하여 잠깐도 잊지 아니하였으나

집에 저축이라곤 없었고 또 농사지을 만한 땅도 없어서 천시를 이용하여 생계를 자력으로 돌보았으니 생선을 팔아 좋은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손으로는 그물을 맺지 아니하였으며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는 데 부합하였다. 콩죽을 끓여먹어도 부모의 기쁨을 다할 수 있었고 상을 당하자 스스로 흙을 저다가 성분하고는 말하기를, 길러준 부모 은혜는 힘으로 갚았으나 미묘한 도리는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아니하랴. 내가 어찌 박과 오이가 둥글에 매인 것처럼 젊은 나이에 한구석에 박혀 있으리요. 하고 드디어 정원 이십 년에 당나라로 가는 세공사에게 찾아가서  선장이 되기를 청하여 몸을 의탁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널 적에 고된 일을 많이 하고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겼다.

자비의 배에 노를 저어서 고해를 질러 건넜었다. 피안에 도달하자 국사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각 뜻이 있는 것이니 나는 여기서부터 하직하겠소” 하고 드디어 행하여 창주에 이르러 신감대사를 뵈옵고 절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장난삼아 이별한 지가 멀지 아니하였는데 두번 서로 만남이 기쁘구나” 하고 문득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히고 심인과 계를 함께 주니 마른 쑥에 불을 부치고 낮은 데로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무리들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이에 다시 보겠다.” 하였다.

선사의 얼굴빛이 검으므로 모두가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지목하여 흑두타라 했으니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묵묵히 행함이 진정 칠도인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읍중의 검은 사람인 자한(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한 데에 비할 수 있겠는가?  영원토록 수염이 붉은 불타야사나 푸른 눈의 달마와 함께 색상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원화 오년에 구족계를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 곁에서 받으니 어머니의 전일의 꿈이 완연히 부합했다.

이미 계주가 밝았으매 다시 경을 배웠다.  하나를 듣고는 열을 알매 강색이 꼭두서니에서 나와 꼭두서니 보다 붉었고 청색이 쪽에서 나와 쪽보다 푸르렀다.

비록 고인 물처럼 맑은 마음이나 조각구름 같이 떠다니며 배우는 자취였다.

고향의 중 도의라는 이가 먼저 중원으로 도를 물으러 왔었는데 뜻밖에 서로 만나 기뻐하며 친구가 되어 사방으로 멀리 참례하고 찾아 불도를 증득하였다.

도의는 먼저 고국으로 돌아오고 선사는 바로 종남산에 들어가 만길 봉우리에 올라가서 솔씨를 따먹으며 적적하게 선정과 지혜의 지관법을 익힌 지 삼년이었다.

뒤에 자각으로 다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서 짚신을 삼아 보시를 널리하여 왕래하기 또 삼년이었다.

이리하여 고행을 이미 닦았고 타국의 지방도 이미유람하였으니  비록 공을 공부한다 할지라도

어찌 본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태화 4년(830)에 돌아오매 불교의 최상승 도리로 우리의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편지를 보내어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 선사가 전일에 돌아왔더니 상인이 잇달아 이르렀으매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검은 옷입은 두 호걸이 있었다 들었더니 지금에 누더기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에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을 온 나라가 기뻐하여 의지하는구나.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 지경으로 상스러운 집을 만들라”고 했다.

처음에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석장을 멈췄는데 의원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 같았으매 절간이 비록 넓었으나 사람들이 자연 군색했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 지리산에 이르렀는데 몇마리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함이 앞에서 이끄는 기마(騎馬)와 다르지 않았다. 따르는 사람들도 두려워함이 없어 마치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곧 선무외삼장이 영산에 하안거를 하는데 맹수가 길을 앞서 깊이 산혈로 들어가매 모니의 입상을 본것과 사적이 완연히 같으니 저 축담유가 자는 범을 두드려 경을 듣게 한 그것만이 홀로 승사에 미담이 될수 없다.

화개곡에 옛 삼법화상의 절터를 그대로 인하여 절을 지으니 엄연히 화성과 같았다.

개성 삼년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오르자 깊이 자비에 의탁하였다. 새서(璽書)를 내려 공양할 물자를 보내고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했다.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선정을 닦는 데 있는데 어찌 만날 필요가 있습니까?” 고 했다.

사신이 돌아가 왕에게 복명하니 왕이 듣고 부끄러워하고 깨달아서 선사는 색과 공이 함께 소멸되고 정과 혜가 모두 원만하다 하여 사신을 보내 호를 주어 혜조라 하니 소자는 성조의 어휘이므로 피하여 바꾼 것이다.

인하여 대황룡사에 적을 옮기게 하고 서울로 오라고 불렀는데 사자의 왕래가 길에 고삐가 엉길 정도였지만 산악처럼 우뚝하여 그 뜻을 옮기지 않았다.

옛날 승조법사가 원위의 세 번 부름을 거절했다 했으니 산에 있어 도를 행하매 대통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깊숙한데 살아서 고상함을 기르려는 것이 시대는 달랐으나 지취(志趣)는 한가지다.

두어 해를 머물매 가르침을 청하는 자 벼와 삼대처럼 늘어서고 성같이 에워싸서 거의 송곳 꽂을 틈조차 없었다.

드디어 기이한 지경을 두루 선택하여 남령의 산기슭을 얻으니 높고 시원함이 제일이었다.

사찰을 창건하는데 뒤로는 노을 끼는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는 시내를 굽어보니 안계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돌구멍에서 솟구치는 나르는 여울이었다.

더욱이 봄에 피는 시내의 꽃과 여름에 그늘지는 길옆의 솔이며 구렁을 비추는 가을의 달과 봉우리를 덮는 겨울의 눈들이 사시가 모습을 바꾸고 만상의 빛을 번갈으며 백가지 울림소리가 어울려 읊조리고 수천 개의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서토에 놀던 자가 와서는모두 깜짝 놀라 보고 이르기를, “혜원의 동림사를 바다건너 옮겨 왔구나 연화세계는 범인의 상상으로 비겨 볼 바 아니로되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더니 정말이로다”고 했다.

대로 흠을 만들어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에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 비로소 이름하여 옥천이라고 현판을 붙였다.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다. 이에 육조의 영당을 세워 분바른 벽에 단청으로 채색하여 널리 신도를 귀의시키는 데에 이바지 하니 경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비단에 여러상을 섞어 그린다” 함이었다.

대중사년 정월 구일 이른 아침에 문인에게 말하기를 “ 만 가지 법이 다 공이니 내 장차 떠나가려 한다. 하나의 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니라, 탑에다 유해를 갈무리지 말고  명으로써 행적을 기록하지 말아라” 하고  말을 마치자 앉아서 열반에 드니  금생의 나이 77세이고 법랍이 41세였다.

그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었는데 바람과 우뢰소리가 혼연히 일어나며 호랑이는 슬피 울부짖고  삼나무·잣나무가 변하여 시들더니 이윽고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 자욱하고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사에 모인 자는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양나라 역사에 실려 있기를, “저시중 상이 일찍이 사문을 청하여 어머니의 병환을 위해 복을 빌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났다” 했으니 성스런 감응이 보이지 않게 나타났으니 어찌 거짓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자는 글을 보내어 멀리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하는 이는 슬픔을 머금고 울었으니

하늘과 사람들이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다.

관곽과 묘혈을 미리부터 준비 했으매  제자 법량 등이 울부짖으며 색신을 모셔서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산봉우리에 장사 지내니 유언을 좇음이었다.

선사는 성품이 꾸밈이 없고 말은 꾸미지 않았으며 옷은 헌 솜과 굵은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밥은 겨와 보리싸라기도 달게 먹었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으며 귀한 손이 가끔 왔으나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어 문인이 거친 음식을 귀한 손님에게 드리기 어려워하면 곧 이르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까지 왔으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어시 해롭겠는가”고 했다.

높은 이나 낮은 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접대함이 한결같았다.

가끔 왕사가 역마를 타고 와서 왕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을 빌면 곧 말하기를, “무릇 왕토에 살고 불일을 이고 있는 자로서 누구인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해서 왕을 위해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어찌 멀리서 마른 나무 썩은 등걸 같은 나에게 윤언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전하고 말탄 일행들이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했다.

혹시 호향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질그릇에다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은 채로 태우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다만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 했다.

또한 중국의 차로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섶으로 돌솥에 불지피고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로 끓여 마시며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지 아지 못한다.  창자를 적실 뿐이다” 했다.

진을 지키고 속을 싫어함이 다 이러하였다.

평소부터 범패를 잘 불렀으니  그 목소리가 금 옥 같아서  곁들인 음조와 날아가는 소리가  상쾌하여 애완하여슬프고 우아하여 모든 천상사람들을 환희케 하고 길이 먼곳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자가 당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껏 동국에서 어산의 묘한 곡조를 익히는 자가 다투어 손으로 코를 가리고 콧소리를 내는 것처럼 옥천의 남긴 음향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 중생을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리오.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이 마침 문성대왕 때였는데 왕이 진정으로 슬퍼하며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 하다가 그가 남긴 훈계를 듣고는 부끄러워해 그만 두었다.

36년이 지난 뒤에  문인들이 세월이 오래되면 언덕이 골짜기가 될 것을 염려해서  법을 사모하는 제자들에게 길이 썩지 않게 할 인연을 의론했더니 내공봉 일길간인 양진방과 숭문대랑 정순일이 굳게 합심하여 돌에 새기기를 주청했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덕화로 넓히고 진종을 흠양하여 진감선사라 추시하고 대공령탑이라 이름하고

인하여 전자의 새김을 허락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영구히 하도록 했다.

아름답다 해가 동쪽에서 나오니 깊숙한 데까지 비치지 않음이 없고 해안에 향나무를 심으니

오랠수록 더욱 꽃답도다.

어떤이가 말하기를 “선사가 탑도 하지 말라 명도 하지 말라” 는 훈계를 남겼는데 지금에 문도들이 능히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네들이 구했던가 아니면 위에서 주었던가 실로 백옥의 티가 될 만하다.”고 했다

슬프다 그르게 여기는 자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나니  수행의 남은 보답이다.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처럼 끊어지기보다는 할 때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명성을 대천세계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귀석에 비를 얹기 전에 대왕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니 질나발과 저가 서로 응하듯이 의리로 부촉한 것에 화합하여  착한 일을 따르셨다.

근처의 산에 절도 옥천이라 불렀으니 이름이 중복되어 백성들의 귀가 미혹될까 염려했다.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달리하려 하니 마땅히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좇아야 하는데 그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동구에 두 갈래의 시내가 마주했으므로  이에 제호를 내려 쌍계사라 했다.

 다시 신에게 명을 내려  “선사는 수행으로 나타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비명을 지으라,” 하셨다.

치원이 절한 후에 ”네네” 하고 대답했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얼마전에 중원에서 이름을 얻었고 장구의 사이에서 아름답고 맛난 것을 맛보았으나 미처 거리에 둔 술 항아리[성인의 정전]를 마시어 흠뻑 취하지 못했고 오직 깊이 우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불법은 문자를 떠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에 있어서랴.

 굳이 혹 말한다면 수레채를 북으로 향하면서 남방인 영 땅에 가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국왕의 보살핌과 문인의 큰 바램으로 문자가 아니면 뭇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으므로  드디어 몸은 유교와 불교에 겸하고 힘은 오능을 본받으려 하노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할지라도 부끄럽고 두렵도다

 그러나 도란 것은 억지로 이름한 것이니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인가

 석각으로 새길 만한 글인즉 신이 어찌 감당하리오마는 거듭 명령하신 임금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삼가 아래와 같이 명을 짓는다.

 

입을 다물고 선정을 닦았으며  마음은 불타에 귀의했도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넓힌 게 다른 것이 아니로다

 용맹하게 호랑이굴을 찾아  멀리 바다를 건넜도다.

가서는 正法眼藏인 비인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깊은 승지 찾아 골라 바위 벼랑에 절을 지었네.

물과 달에 마음 밝히고  구름과 샘물에 흥을 부쳤네.

 산은 성과 함께 적연하고  골은 범패소리에 메이리쳤네.

경계에 닿는 곳마다 걸림이 없고 기심을 끊었으니 이가 곧 증독이다.

도는 다섯 왕조 험찬했고 위엄은 모든 요귀 꺽었었네.

묵묵히 자비 음덕 드리우면서도 겉으로는 부름을 물리쳤네.

바다야 제대로 표탕하나 산이야 어찌 동요될까.

사려가 없었으매 다듬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았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않았으며  옷은 갖추어 입지 않았다.

바람 비가 그믐밤 같은데도  시종이 한결 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빼어나는데 법의 동량이 갑자기 꺽였다.

골과 구렁이 처량도 하고 연하와 등라가 초췌하다.

사람은 가도 도는 남았으니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

상사가 소원을 진달했으매 대군이 은덕을 베풀었네.

법등은 신라인들에게 전해왔고 탑은 바위 위에 솟구쳤네.

천의(天衣)의 스침에 반석이 다 닳도록  영원히 불문(佛門)에 빛나도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로 887년(진성여왕 1) 건립에 건립되었다.

귀부(龜趺)와 이수(?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국보 47호이다.

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었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그 뒤 3기(三紀)가 지난 885년(헌강왕 11) 왕은 진감선사대공영탑(眞鑑禪師大空靈塔)이라 시호를 추증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이는 당대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崔致遠)으로, 특히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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