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연(賈在衍) I 1923~1945 인상 27회(통산 39회)
일제말 비밀결사, 모진 고문 끝에 광복 못 본 채…
창씨개명, 학병반대 비밀결사사건의 희생자 중 한 분이다. 1923년 4월 8일 충남 서산군 도내리(현 태안군 태안읍 도내리)에서 출생했다. 향리에서 심상소학교를 마치고 1936년 4월 3일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했고 1941년 3월 6일 졸업했다. 인상 27회 조선인 동기생은 모두 47명, 이들이 졸업반이던 1940년 일제는 황국신민화와 창씨개명령을 선포하고 전체 조선인의 목줄을 조이고 있었다.
1940년 가을, 졸업이 다가오자 조선인 동기생들끼리 앨범을 만들어 나누어 가지려 했다. 선배들의 경우 학교당국이 겉으로 반대하지만 암묵적으로 모른 체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27회는 야마모토(山本) 교장의 반대에 부딪혔다. 교장은 그 돈을 국방헌금으로 내라고 윽박질렀다.
학생들은 인천 송림동 부처산(현 재능대 위치)에 모여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뒷날 정구택(鄭龜澤, 뒷날 홍택[弘澤]으로 개명)의 『인천일보』 구술에 의하면 오륜조(五倫組)가 중심이었다. 인상 27회 정구택, 안학순, 홍사성, 추중호 등 4명이 1936년에 만든 친목회였다. 이날 오륜조 중심으로 여럿이 모였고 조선인 학생들을 규합, 학년별, 고향별 친목회를 만들어 창씨개명과 학병제도에 반대할 것을 결의했다. 오륜조가 4명의 소규모 서클이었으므로 ‘잔디회’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었다는 증언, 그냥 ‘친목회’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들은 1941년 3월 6일 졸업해 모교 교정을 떠났다. 가재연은 졸업 후 식산은행 이리지점에 일자리를 얻어 근무했다. 동기생들은 졸업한 뒤 은행원으로 대학생, 전문학교 학생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나 자주 연락해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고 민족적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모임은 비밀결사로 바뀌어 갔다. 이때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국가총력전을 펼치느라 억압과 착취가 극심했다. 그러던 중 가재연은 1944년 1월 충북 영동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되었다. 이른바 ‘인상출신 불령분자들의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1년 전이었다. 1942년 7월경,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에 재학 중이던 비밀결사 멤버 송재필(宋在弼)과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안학순(安鶴淳)이 학병거부 및 기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정구택은 이에 동조하여 학병거부를 종용하는 서신을 작성하여 송재필 · 안학순이 지명하는 학생들에게 보냈다. 편지내용 중에는 인상재학 시 맺었던 비밀결사와 우국충정 등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대전 거주 메이지대학 유학생 김정일이 충북 영동이 고향인 경성제대 응용화학과 재학생 신모에게 서신을 전달하려다가 영동 기차정거장에서 영동경찰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발각되었다. 이후 일제의 2개 월 여에 걸친 조사 끝에 1943년 8월 편지의 출처가 알려져 대대적인 검속이 시작되고 24명이 체포되었다.
먼저 정구택이 구속됐고 안학순 · 홍사성(洪思誠) · 홍성철(洪性哲) · 장희순(張喜順) · 송재필이 체포되어 조사받은 뒤 추가로 가재연 · 이기영(李起榮) · 이석희(李錫熙) · 김형설(金炯卨) · 주진수(朱鎭洙) · 김인환(金仁煥) · 이만술(李晩述) · 이운성(李運性) 등이 구속됐다. 다음해인 1945년 초 최찬모(崔粲模) · 정태윤 · 고윤희(高允熙) · 이원녕(李元寧) · 전택수(田澤秀) · 최응순(崔應洵) · 김려수 · 최순길(崔順吉) · 이기목(李基穆) 등 24명이 구속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인상 동기생들은 잔혹한 고문에 하나하나 쓰러졌다.
고문을 가한 자는 인천경찰서의 전정윤(全正允, 창씨명 川島淑男), 영동경찰서의 김용업(金龍業)으로 둘 다 악질적인 친일 고등계 경찰이었다.
구속자들은 혹독한 고문으로 간신히 목숨만 살아있는 상태로 대전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였다. 정태윤이 먼저 옥사했고 가재연은 1945년 3월 29일 모진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김려수 · 고윤희도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 구속자들도 대부분 옥에 갇혀 있다가 8․15 광복 후 출옥했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인상출신 애국청년들을 체포해 고문치사 시킨 전정윤과 김용업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에는 인천경찰서 전정윤에 대한 무기명 고발장이 보존되어 있다.
특위 인천지부 제현(諸賢)
빛나는 UN승인과 머지않은 통일조국의 영광을 특위 제현께 바칩니다.
실은 인천부(仁川府) 송림동 222의 6 거주하는 전(창씨명 川島)은 일제시 인천경찰서
고등계의 형사로서 특히 소위 사상범이라 하던 조선애국지사를 검거 투옥 치사케 하였으며 「불령성인)不逞鮮人」이라고 하여 조선어를 사용한 학생을 유치 투옥하고 또한 인천 상업학교 학생 27명을 검거하여 영동형무소에 넘겨 근 2년이나 옥중생활을 하던 중 그 중 2인이 옥사하였습니다.
또한 인천출신 학병으로서 그를 거부하고 도피한 모인(某人)을 계속 감시 체포하였으며, 또다시 도주한 즉은 그의 모친을 유치하여 고문하였습니다. 심지어 「이년 저년」하면서 황국 신민답지 못한 년이라고 하였으니 이 죄상을 양찰하옵시고 삼천만 국민 앞에서 칼날 같은 벌과 깨끗한 처단이 있기를 30만의 1인으로서 앙망합니다.
또한 해방 후에도 그냥 그 자리에서 왜놈에게 갖은 짓을 다하였으며 일인(日人)을 보호 무사케 하고 더구나 무기까지도 일인에게 주었습니다. 그의 죄상은 한두 가지가 아니오니 심사숙고하셔 국가의 장래와 민족의 전도를 우려하시는 마음으로 조속히 체포하심을 바라나이다.
반민특위는 전정윤을 즉시 체포했고, 영동경찰서의 김용업도 체포했다. 『연합신문』과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인천] 특위 경기도본부에서는 인천지부 조사보고를 기초로 지난 20일 권익현(權炳 益) 조사관은 특경대를 대동하고 멀리 충청북도 영동군까지 출장하여 동일 하오 3시경 영동면 서기 김용업(43)을 반민피의자로 체포하여 서울 마포형무소에 수감하였다고 하며 발표한 그의 죄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즉 김(金)은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로 13년 왜정에 충성을 다하여 동족에게 갖은 박해 를 가한 악질경관으로 특히 4276년 6월 당시 일본 명치대학 유학생 손재필(宋在弼 인천상업 출신) 및 3명이 여름방학으로 귀향차 영동역에 내리는 것을 사상불온 혐의로 검거한 것을 발단으로 하여 2년간에 걸쳐 인상(仁商) 친목회원 44명 중 27명을 인천을 위시 각지에서 검거, 그 중 21명을 송국하였다는데 취조 중에 전기 김의 폭악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가재연· 김려수 · 고윤국 · 정태윤 4명은 가엾게도 미결수인 채 4277년 겨울 옥중에서 불귀의 객이 되게 하고 한편 김은 이들을 검거한 공로라 하여 10여 년 간의 순사로부터 부장으로 승격까지 하였다는 등 철저한 왜구(倭狗)라 한다.
[인천지국 22일 전보] 특위 경기도본부에서도 지난 20일 일제의 충견으로 유명한 김용업(金龍業·43)을 충북 옥천군에서 체포하여 즉시로 서울 마포형무소에 수감하였다.
반민자 김용업은 일제 시 영동경찰서에서 고등계형사로서 23년 근무하며 인천상업학생 40여 명으로 조직된 인천상업친목회 회원 송재필(宋在弼)을 1943년 하기방학에 귀국 중 영동역에서 체포한 것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그 중 정태윤(鄭泰潤) 외 3명이 옥사하였으며 해방 후 인천 부민의 원한을 받은 자이다.
일제강점기에 한 학교 출신 동창 수십 명이 독립정신과 애국심 가득한 비밀결사 사건으로 구속되고 여럿이 옥사한 일는 없었다. 이 사건은 3·1만세운동과 광주학생의거 때부터 시작된 인상의 애국혼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1985년 1월 30일, 생존한 인상 27회 동기생들은 모교에 「추모명비」를 세워 앞서 간 동기생들의 애국혼을 기리고, 순국한 동기생 가재연 ․ 고윤희 ․ 정태윤 ․ 김려수 네 분의 이름을 새겼다. 그때는 운동장 끝이었으나 뒷날 그 앞에 백주년기념관이 섰다. 시인 한상억 동문이 지은 비문이 가슴 뭉클하도록 깊은 감동을 안겨주어 그 앞을 지나는 재학생과 동문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것이 연면하게 흐르는 인고의 정신이다.
여기 오랜 역사와 전통의 찬연한 빛이 머물고 이제는 미움도 싸움도 없는 대화가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나가는 모교의 교정.
본교 39회(인상 27회) 동창생 일동은 일제하의 재학시절부터 졸업 후에까지 민족적 자각으로 조직적인 항일애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일경(日警)에 24명이 체포, 투옥되어 그 중 가재연, 고윤희, 정태윤, 김려수 등 4명이 옥사하였고 출감 후에도 일경의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11명이 원통하게 호국의 넋이 되었다.
민족의 자유를 찾기 위해 한을 품고 가신님들의 기백과 정신 우리 모두 그 뜻을 기리며 돌에 새겨 세우니 풍우 다 지나간 하늘에 영겁으로 뻗는 웃음 되어 조국과 모교의 미래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힌다.
비문 뒤에는 24명의 투옥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정부는 인천상업학교 비밀결사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분들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훈·포장을 수여했다. 순국한 분들은 유족을 불러 훈장을 추서했다. 가재연에게는 1986년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훈격을 높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글 : 이원규)
[참고문헌]
『독립유공자공훈록』, 국가보훈처
『연합신문』 1949.5.27.
『경향신문』 1949.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