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48 물계자(勿稽子) 열전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 家世平微 爲人倜儻 少有壯志 時八浦上國同謀 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㮈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是役也 勿稽子有大功 以見憎於王孫 故不記其功 或謂勿稽子 曰 “子之功莫大 而不見錄 怨乎” 曰 “何怨之有” 或曰 “盍聞之於王” 勿稽子曰 “矜功求名 志士所不爲也 但當勵志 以待後時而已”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乃語其婦 曰 “嘗聞爲臣之道 見危則致命 臨難則忘身 前日浦上竭火之役 可謂危且難矣 而不能以致命忘身 聞於人 將何面目 以出市朝乎" 遂被髮携琴 入師彘山 不反
물계자(勿稽子)는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때 사람으로, 집안(家世)은 평범하거나 미미하였으나,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뜻이 있었으며, 젊어서는 장대한 포부가 있었다. 이 때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함께 모의하여 아라국(阿羅國, 아라가야)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王孫) 내음(㮈音)에게 근군(近郡) 과 6부의 군사를 주어 아라가야를 구하게 하였다. 마침내 여덟 나라의 병사를 격파하였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이 있었는데 왕손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에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공이 컸는데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원망스러운가?”라고 하였다. 물계자가 말하기를 “어찌 원망함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임금님께 아뢰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물계자가 말하기를 “공(功)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지사(志士, 절의가 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절개를 지키고 닦음이 마땅하며 후일을 기다릴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 3년이 지나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 등 세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자,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구원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물계자가 수십여 명을 죽이고 수급을 거두었으나, 공을 논할 때 또한 얻은 것이 없었다. 이에 그의 부인과 말하여 “일찍이 듣건대 신하된 도리는 위급한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하였소. 전 날 포상(浦上)과 갈화(竭火)의 싸움은 가히 위급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으나, 목숨을 바치거나 몸을 버릴 수 없었는데,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시조(市朝, 저자와 조정)에 나아갈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는 마침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금(琴, 거문고)을 지닌 채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견해≫
아라(阿羅, 아라가야)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골포(骨浦)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 혹은 합포(合浦)
칠포(柒浦)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고사포(古史浦)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혹은 고자국(古自國)
삼국유사 권5 물계자(勿稽子)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古自國〈今固城〉史勿國〈今泗州〉 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㮈音將軍 一伐等率兵拒之 八國皆降 時勿稽子軍功第一 然爲太子所嫌 不賞其功 或謂勿稽子 “此戰之功 唯子而已 而賞不及子 太子之嫌 君其怨乎” 稽曰 “國君在上 何怨人臣” 或曰 “然則奏聞于王幸矣” 稽曰 “代功爭命命 揚己掩人 志士之所不爲也 勵之待時而已”
二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等三國王 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稽所獲數十級 而人不言稽之功 稽謂其妻 曰 “吾聞仕君之道 見危致命 臨難忘身 仗於節義 不顧死生之謂忠也 夫保羅〈疑發羅 今羅州〉竭火之役 誠是國之難 君之危 而吾未曾有忘身致命之勇 此乃不忠甚也 旣以不忠而仕君 累及於先人 可謂孝乎 旣失忠孝 何顔復遊朝市之中乎” 乃被髮荷琴 入師彘山〈未詳〉 悲竹樹之性病 寄托作歌 擬溪澗之咽響 扣琴制曲 隱居不復現世
제10대 내해왕(奈解王)이 즉위 17년(A.D.212) 임진(壬辰)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지금의 고성〉, 사물국(史勿國)〈지금의 사주〉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변경을 침입하였다. 왕은 태자 내음(㮈音)을 장군으로 하여, 일벌(一伐, 계급이름인 듯)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였다.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는데,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군공(軍功)이 제일이었다. 그러하였으나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그 공으로 상을 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하기를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당신에게 있을 뿐인데, 상(賞)은 당신에게 미치지 않음은 태자의 미움을 받은 것이니 그대는 그것을 원망하는가?”라고 물었다. 물계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어찌 인신(人臣, 태자)을 원망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왕의 행차 시에 가서 왕에게 아뢰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물계자가 말하기를 “(남의) 공(功)을 대신하여 작위(命)를 다툼은 하늘의 운수(命)요, 자신이 양명하기 위해 남의 (공을) 숨기는 것은 지사(志士)가 할 바가 아니오. 공을 세울 때를 힘써 기다릴 뿐이오.”라고 하였다.
20년(A.D.215) 을미(乙未) 골포국(骨浦國)〈지금의 합포〉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竭火)〈굴불인 듯하며, 지금의 울주〉를 침범하니,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물계자가 죽인 적병이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이 그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가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당해서는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절의(節義, 절개와 의리)에 의거하여 생사(死生)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충(忠)이라 일컫는다고 하였소. 대저 보라(保羅)〈발라인 듯 하며, 지금의 나주〉와 갈화(竭火)의 싸움은 진실로 이 나라의 어려움이었고, 임금이 위태로웠소. 그러나 이전에 나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바칠 용기가 없었으니, 이것은 곧 불충(不忠)함이 극심한 것이오. 처음부터 불충(不忠)으로 임금을 섬겨 그 누(累, 폐를 끼치다)가 선인(先人,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미쳤으니 어찌 효(孝)라 할 수 있겠소. 이미 충효(忠孝)를 잃었으니 어찌 얼굴을 들고 다시 조시(朝市, 저자와 조정)를 돌아다닐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琴)를 메고서 사체산(師彘山)〈어디인지 알 수 없다〉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대나무의 병적인 (곧은) 성품을 슬퍼하고, 그것에 의탁하여 노래를 지었다. 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이 목메어 울리는 소리를 흉내 내어 거문고를 두드리고 곡(曲)을 만들었다. 그 곳에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고구려사초 물계자(勿稽子) 관련 기사
十三年 己丑 七月 浦上八國伐加耶 加耶請救於羅 羅以奈音救之 殺八國将軍 奪所虜加耶人六千 還之
13년 기축(A.D.209)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야(加耶, 아라가야)를 침범하니, 가야는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는 내음(奈音)에게 아라가야를 구하도록 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들을 죽이고, 사로잡혀갔던 가야인 6천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十六年 壬辰 三月 加耶質子于羅 而請伐其仇 羅以奈音伐保羅古自史勿草八骨浦柒浦加利星山等國 降之 勿稽子功最高而無報 人勧較之則 曰 “為人臣而忠 乃內事也 豈望報哉” 却之 而不顧 國人賢之 揭其寃于壁而無問 天以大雨漂屋 咸以為其蘖
16년 임진(A.D.212) 3월 가야(加耶, 아라가야)가 신라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어 원수를 갚아주길 청하니, 신라는 내음(奈音)에게 보라(保羅), 고자(古自), 사물(史勿), 초팔(草八), 골포(骨浦), 칠포(柒浦), 가리(加利), 성산(星山) 등의 나라를 쳐서 항복시켰다. 물계자(勿稽子)의 공이 최고였으나 아무런 보답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공을) 견주어 (여쭈어) 보라 권하였더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하 된 사람됨은 충(忠)이요. 곧 (공을 세운자에게 보답함은) 내사(內事, 집안이나 나라의 일)이다. 어찌 보답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며 (여쭈어보라 권하는 말을) 물리치며 돌아보지 않았다. 나라사람들이 그를 현명하다하고, 그 원통함을 벽에 게시하였으나 (나라에서) 물어보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큰 비가 내려 집들이 물에 떠내려갔더니, 모두 그 일로 인한 싹(蘖, 그루터기)이라 하였다.
≪견해≫ 포상국(浦上國)의 위치
보라(保羅) : 일연은 발라국인 듯하며, 나주(羅州)라고 함.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포(榮山浦)가 있다. 또는 월내국(月奈國)이라 지칭된 듯하다. 포상국(浦上國)의 우두머리 국가로 가장 강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자(古自)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신라사초에 고자(古自)는 신라의 수문(水門)이고, 대산도(對山島)라는 부속 섬이 있음. 고성군 옆에 거제도가 있으니 합당한 부분이 있음
다만 신라가 대산도(對山島)에 대산군(對山君)을 두어 다스렸다고 하므로 일본의 대마도(對馬島)가 의심되며 이 때에는 고자국(古自國)은 부산광역시일 가능성이 있음.
대가야, 금관가야, 아라가야, 월내와 함께 가야제국 중 강성했던 국가임.
사물(史勿)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로 고성군과 이웃하고 있다. 삼천포를 끼고 있으므로 합당한 부분이 있다.
초팔(草八)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옛날에는 포구가 있었다고 한다.
골포(骨浦)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 혹은 합포(合浦)
칠포(柒浦) : 통설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가리(加利) : 신라 6부중에 가리촌(加利村)이 있으나 동일한 지명은 아닐 것이다. 포상(浦上)의 일원이므로 가리포(加利浦)는 아닐까? 장보고가 청해대사가 되어 828년 5월에 가리포(加利浦)를 설치하였다고 한다(출전을 알 수 없다). 또는 가리포(加里浦)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이다.
성산(星山) : 성산가야 혹은 벽진(碧珍)가야라고도 하며, 통설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이다. 성산가야가 아라가야를 치기 위해서는 대가야를 지나야 하는데(성주에서 진주로 가기 위해서는 고령을 지나야 함), 당시 대가야는 신라에 내부해 있는 입장이어서 허락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전라북도 김제에 벽골지(碧骨池)가 있으므로 이곳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十九年 乙未 是年 骨浦漆浦古史浦等 侵加耶竭火 勿稽子擊破之 又無報 乃携琴入師彘山〈龍門山〉 彈古調 悲竹梪之性病 擬溪澗之咽響 粗衣菜食晏如也 上聞其賢 欲迎之 勿稽子曰 “忠臣不事二君 雖無寵幸 豈敢改嫁哉”
19년 을미(A.D.215) 이해에 골포(骨浦), 칠포(漆浦), 고사포(古史浦) 등이 가야(加耶, 아라가야)의 갈화(竭火)를 침범하였다. 물계자(勿稽子)가 그들을 쳐부수었으나, 또한 보답이 없었다. 이에 물계자는 거문고(琴)를 끌고 사체산(師彘山)〈용문산〉으로 들어가 옛 곡조를 탔다. 죽두(竹梪, 늙은 대나무)의 병적인 성품을 슬퍼하여, 산골짜기의 시냇물이 목메어 울리는 소리를 본떠 (노래하고), 조의(粗衣, 너절한 옷)를 입고 채소를 먹었으나 편안하고 태평스러웠다(晏如). 왕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맞아하려 하였으나, 물계자가 말하기를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신라왕의) 특별한 은총이 없다하여 감히 개가(改嫁, 결혼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일, 여기서는 다른 나라의 왕을 섬기는 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위화진경초(74p)
柳園之池有金蛙 慕楊柳神 祈願樹下 躍上柳葉 遊於樹宮 柳絮神以雪衣迎之 授其眞 乃生白兎大王 是爲月奈國始祖 治海上諸島 神乃浦上八國之始也
버드나무 정원의 연못에 금와(金蛙)가 있었는데 버드나무신(楊柳神, 유화부인, 고구려의 건국시조 추모왕의 어머니)을 사모하여, (버드)나무 아래에서 기원하고는 버들잎 위로 뛰어올라, 수궁(樹宮)에까지 노닐다가, 유서신(柳絮神)이 설의(雪衣)로 맞이하니, 그 진(眞)을 받아들여 백토(白兎)대왕을 낳으니 이분이 곧 월내(月奈)국의 시조로, 해상(海上, 바다 위)의 여러 섬(諸島)를 다스리니, (백토)신(神)이 곧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시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