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잠만자고출근
눈을 떴을 땐 밀실이었다.
벽에는 30이라는 숫자가 적혀 흐릿했다.
터져 나오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침침한 방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그녀 자신을 포함해 여섯 명의 사람이 세 명씩 양편으로 마주 앉아 안전띠를 맨 상태였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왜 죄다 잠들어 있는 거야?
상황 파악을 하려 어지러운 머리를 쥐어짰지만 이상하리만치 하얗게 텅 비어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뭔가 기억하는 게 있습니까?”
누구지?
“…아니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그쪽은요?”
“전혀 안 납니다.”
“제일 먼저 깨어나신 거예요?”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자는 척하는 게 아니라면.”
그러곤 무어라 말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고 빤히 쳐다봤다.
“왜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는 사이 같아서.”
묘한 말투였다.
삽시간에 벽이 사라진.
심해같이 짙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자니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혈관을 타고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이었다.
“리엘라.”
“기억이 없다면서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읽은 겁니다.”
그가 가슴께를 눈짓했다.
그제야 왼쪽 가슴에 새겨진 이름이 내려다보였다.
재빨리 남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슬란.
그사이 남자는 주위의 잠꾸러기들을 하나씩 깨우기 시작했다.
턱이 얍실하고 눈이 찢어진 젊은 남자,
종교에 귀의라도 한 듯 머리를 빡빡 깎은 여자
땋은 머리의 왜소한 여자,
배가 튀어나온 안경잡이 아저씨 등.
신음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지독한 멀미를 겪은 것처럼 상태가 안 좋았다.
총 여자 셋에 남자 넷.
인원을 확인한 리엘라는 조심스럽게 제 옆에 남은 한 사람을 흔들어 깨웠다.
“저기요. 잠깐만 일어나 보세요.”
하필 유독 튀는 인간이 그녀 옆에 앉아 있었는데, 딜런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검은 머리가 어깨까지 오는 데다 귀에는 피어싱이, 목에는 문신이 가득했다.
“혹시 이 자리에 잠들기 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 있습니까?”
“…….”
“현재 상황으로 추측건대 우리는 모종의 사고를 겪고 일부 지식을 제외한 기억을 소실했습니다. 의식을 차린 직후 머리 위 칸에서 산소마스크, 의자 밑에서 생존 키트를 발견했습니다.”
“의자에 비상 탈출 기능과 낙하산이 탑재된 것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는 기체의 내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빨리 나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불도 안 들어오는데 여기가 안전하다는 판단은 정확한 건가요?”
“안 그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
“밖에 이상한 물체가 있어서.”
“창문을 가린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시체를 봤습니다.”
“…뭐?”
“불을 켜자마자, 얼굴이 반쯤 검게 녹은 인간이 다가와 창문을 들여다봤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니다 빛에 이끌린 것처럼.”
“…….”
“…하. 아하하, 아니 뭐야, 이 새끼 이거 아주 골 때리네. 이제 보니 약을 먹인 게 아니고 지가 먹은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해. 너 말이야. 어디 인신매매 조직이랑 짜고 우리를 단체로 납치한 거 아냐? 어쩐지 낯이 익어. 분명 평소에도 내 주위를 얼쩡대거나 했겠지.”
“상상력이 좋네.”
“확실히, 어디 팔게 되면 장식으로 쓰는 네 머릴 먼저 잘라 넘기고 싶긴 한데.”
“이 새끼, 너 말 다 했….”
드륵.
거슬리는 소리에 멱살을 틀어잡은 딜런이 말을 멈췄다. 사람들의 고개가 일시에 돌아갔다.
창문 덮개가 열려 있었다.
“폐소, 공포증이에요. 난 이런 좁은 데 갇혀서 오래 못 있어요. 죽을 수도 있다고요.”
덮개를 연 범인은 아까부터 불안하게 호흡하던 민머리 여자였다.
“왜 안 열리는 거야, 왜!”
밤인가?
아니, 밤이어도 저렇게 빛 한 점 없이 어두울 수가 있어?
“봐, 역시 아무것도 없잖아? 시체는 무슨, 약물 검사라도 해 보든가 해야지.”
쾅 쾅 창문을 치는 여자를 보고 문득 정신을 차린 딜런은 금세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잡은 멱살을 턱 놓았다. 그리고 그가 창가로 가려는 순간, 뚫어지게 창문을 보고 있던 아슬란이 딜런의 어깨를 방금의 멱살잡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으로 잡아챘다.
그리고,
팍.
“…….”
맞은편에 선 리엘라의 뺨까지 뜨거운 무언가가 튀었다.
손은 검붉게 물들었고 속눈썹에서는 진득한 액체가 툭 떨어졌다.
마치 피 같은.
왜?
누구의?
“아, 아아아, 아아아아악!!!“
왜 덮개를 열었던 여자의 등으로 수십 개의 검은 벌레가 튀어나와 꿈틀거리는지.
왜 저편 창가에 앉았던 사람들이 하얗게 질린 채로 일어서다 다리가 풀려 고꾸라지는지.
“도망쳐!!!”
창밖에 사람이 하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왜 아슬란이 시체라고 칭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상태로는 어떤 인간도 살아 있을 수 없다.
머리의 좌반구가 검게 녹아 없어졌고 둥그렇게 드러난 안구는 눈꺼풀도 없이 커서 아이 주먹 정도는 될 성싶었다.
‘그것’이 창가에 널브러진 민머리 여자의 턱을 손으로 붙잡아 벌렸다.
이윽고 ‘그것’의 안구와 이빨로부터 검고 진득한 액체가 후드득 떨어져 여자의 벌어진 입 안으로 쏟아졌다.
“빛을 없애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손전등을 찾아야 합니다.”
리엘라는 필사적으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방향을 눈으로 더듬었다.
그러다 우연처럼 발견했다.
의자와 의자 사이.
그곳에 빛이 있었다.
몸을 훅 낮춘 채 안간힘을 다해 팔을 뻗자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손전등에 닿았다가 툭, 밀어냈다.
리엘라는 탄식을 흘렸다.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의자 밑으로 거의 몸을 밀어 넣다시피 했다.
조금,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잡았다!
손전등을 쥐고 벌떡 일어난 순간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창문에서부터 눈앞까지 검은 무언가가 일직선으로 뻗어 왔다.
누군가 세게 감싸 안은 것과 동시에 리엘라는 손전등의 불을 껐다.
달칵.
03222035 파일을 재생합니다.
2035년 3월 22일 09시. 현시간 부로 30호는 어비스에 돌입한다. 해당 녹음은 프로젝트 기간 탐사선 녹화가 손상되었을 경우를 대비한 보조용 기록이다.
어느 날 제3구역의 석유 시추 구가 무너지며 검은 구멍이 생겼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끝없는 심연, 연합 정부는 그것을 어비스라 명명했다.
일반 싱크홀과 달리 어비스의 깊이를 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어떤 기기든 어비스에 들어간 후엔 먹통이 되었고 무수한 군대와 연구원으로 이루어진 탐사 팀은 단 한 명도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지름 10km 정도에 불과했던 어비스는 시시각각 땅을 집어삼키다가 한 달 만에 지름 300km의 규모로 커지기에 이르렀다. 전 인류의 이목이 어비스에 쏠렸다. 종말이니 블랙홀이니 하는 말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투입되는 인간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군인, 연구원, 탐험가, 특정 종교, 국가, 나이대의 사람들, 심지어는 대형 참사에서 살아남은 기적의 유형까지.
안드레이 사에서 진행한 어비스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속한 30호는, 시한부 팀이다.
현재 30호는 어비스에 무사히 돌입한 뒤 자동 운항 중이다. 폐소공포증이 있는 폴리나 리바코프만 진정제를 투여했을 뿐 그 외 인원은 모두 정상적으로 탑승해 있…
지지직, 지직.
[여기는 어비스 1호, … 어비스 1호입니다…. 통신 가능한 전 탐사선에 알립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낙원을 발견했습니다…. 반복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낙원을 발견했습니다.]
<책소개>
눈을 떴을 땐 밀실이었다.
“뭔가 기억하는 게 있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그쪽은요?”
“전혀 안 납니다.”
벽에 적힌 흐릿한 30. 귓가를 울리는 이명.
“제일 먼저 깨어나신 거예요?”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자는 척하는 게 아니라면.”
옆에 있던 남자가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나직이 대답했다. 그러곤 무어라 말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고 빤히 쳐다봤다. 딸깍거리는 라이터 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의아하게 묻자 남자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는 사이 같아서.”
30호 - 손금
(작성일 기준) 리디북스, 알라딘에서 구매가능
정식사이트에서 봅시당😎
#로맨스판타지 #디스토피아 #미스테리/스릴러 #가상세계 #기억상실 #짝사랑 #미사노
(본문의 내용은 작품에서 발췌했고, 약간의 각색이 들어갔습니다. 문제 시 알려주세요.)
너무 재밌게 읽은 작품이라서 꼭 소개하고 싶었어!
이야기 중심이지만 로맨스 분량도 꽤 있다죠
언젠간 영화로도 나왔으면 싶어ㅜㅜ 존잼
무섭지 않을까 싶어서 [쫄보주의] 붙혔는데 별로 안무서운거 같기도 하고🤔
희란국연가
요한은 티테를 사랑한다
잠자는 바다
페르세포네를 위하여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
누가 도로시를 죽였을까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절벽에 뜬 달
사마귀가 친구에게
폐하 또 죽이진 말아주세요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메리 사이코
여러 해를 사는 나무여
문제 시, 울면서 수정 또는 삭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