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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료

조선합병을 반대했던 일본인들

작성자우렁각시|작성시간12.09.20|조회수122 목록 댓글 0

 

가쓰 가이슈(勝海舟)는 에도(江戶)시대의 말기와 메이지기(明治期)에 걸쳐 일본을 대표하는 현자(賢者)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구체제의 막부군과 신체제의 유신군이 에도성에서 결정적으로 대결하게 되었을 때, 오고 있는 일본의 새 시대를 향해 에도성을 무혈로 열어준 사령관이었다.

지략이 있었고, 무비가 충분했지만 100만명의 도시 도쿄를 전화(戰禍)에서 건지는 쪽을 가이슈는 택했다

일본에 닥쳐와 있는 영국, 프랑스 등의 외압 앞에서, 스스로가 속한 막부체제의 문을 닫고 전체 일본의 체력을 온존하려 들었던 것이다.

시대와 대국을 볼 줄 아는 혜안을 일본의 역사가들이 평가한다.

 

가이슈가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에 대한 가장 매운 비판자였던 것이다.

가이슈는 유신 주류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일본해군을 창설하기도 했는지라, 해방(海防)과 국가진로에 일정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가이슈(海舟)가 백작이란 작위를 받았을 때 이토는 총리대신이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그는 2차에 걸쳐 이토 앞으로 정치 의견서를 보냈다.

이 속에서 가이슈는 이웃나라와의 신의를 중히 여기고, 서양만 따라가지 말고, 전통 속에서도 지혜를 얻으라고 강조했다.

나아가서는 ‘지술(智術)과 서양법(法)’만으로 온전한 나라는 되지 못하니, 이토의 정치 자세를 ‘성의와 착실’로써 다지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헌법을 만들고 서양식 부국강병에 의심 없이 몰두하던 이토는 가이슈를 받지 못했다.

 

일본은 종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단순히 조선반도로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해 벌인 전쟁 정도가 아니었다.

일본 근대화의 국민교사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청일전쟁을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바람을 넣었다.

문야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후쿠자와가 조선의 갑신정변을 지원하다 실패하고서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을 부르짖은 것은 1885년이었다.

아시아 촌것들하고 같이 못 놀겠으니까, 이제부터 일본은 서양하고만 상대하고, ‘조선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서양사람들이 아시아 사람 대하듯이 대하자’는 것이 탈아론이었다.

한 10년 가까이 지나 일어난 청일전쟁을 일본의 어떤 사가는 탈아론 입문전쟁이라고도 한다.

 

이때의 일본책임자가 총리 이토 히로부미였다.

앞에서 본 가이슈는 청일전쟁을 무명(無名·명분 없는)의 전쟁이라고 강한 어조로 반대했다.

가이슈는 유신 전부터 한·중·일 삼국 동맹론자였다.

동아시아 3국이 대등하게 단결하여 구미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을 죽을 때까지 일관했다.

일본을 아시아 맹주로 올려놓은 이토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동양평화론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가이슈의 3국동맹론은 안중근이 옥중에서 밝힌 동양평화론과 근본 발상이 같은 것이었다.

 

가이슈가 청일전쟁 전후에 일본의 조야를 향해 특히 강조한 것은 중국과 조선에 대한 외경(畏敬)이었다

가이슈는 중국이 나라가 한 번 전쟁에 졌다 해도 사회는 미동도 하지 않는 강인함이 있으니 가볍게 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어제의 일본의 스승 아니냐’고 모멸론자들을 나무랐다.

 

가이슈는 반도로 대륙으로 군홧발을 뻗는 이토의 부류를 보고, ‘조선이나 중국을 때리거나 바보 취급하는 것이 근대국가라 한다면 일본은 근대국가를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松浦玲, , 岩波書店)

 

에도무혈개성(江戶無血開城)이라는 일본 사상 최고의 드라마를 연출한 가이슈의 혜안은, 수천 년의 형제 같은 이웃을 침략하는 이토식 탈아적 국가운영의 끝이 민족국가의 패망일 것임을 내다봤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대의 지상명령이었던 근대화까지도 말릴 수 있는 신념은 생겨났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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