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巖
영암군의 일생의례 (2009년) 망호리 제례
* 영암군 자료중 망호정 마을에서 행하고 있는 제례의식에 대한자료가
있어 약간 수정을 해서 올려보았습니다.
* 아마 이 자료는 영암군의 일생의례라는 자료로 이미 군청등에 보관
되어 있을것입니다.
내용이 약간 잘못된 부분도 있을수 있지만 영암군의 망호정 마을에 대한
자료이닌까 관심을 가지고 봐주시길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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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엿집
초상이 발생하면 개별적으로 상여를 제작하여 사용한다.
일부의 집성촌에서는
상엿집을 만들어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상여 물품을 보관하기도 한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는 부잣집 상여를 빌려서 사용한다.
망호리에는 마을 입구에 상엿집이 있었다. 이 상여는 30년 전에 문중에서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장강틀과 상여 뚜껑까지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대단히 비싼 편이었다.
상엿집에는 그 밖에 광중을 팔 때에 사용되는 삽·괭이 등
일체를 보관하였다. 현재는 상엿집을 헐어버리고, 마을 창고에 장강틀만
보관하고있다.
예전의 상엿집 자리에는 작은 정자가 지어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장례 물품
을 보관하던 터여서 지금도 그 앞을 지나가는 것을 꺼린다.
Ⅴ. 제례祭禮
라. 묘제墓祭/세일사歲一祀
영암읍 망호리 경주 이씨 시제
망호리에는 경주 이씨 익재공파의 후손들이 17대째 거주하고 있다.
망호리는 전체 70호 중 65호가 이씨인 동족 마을이다.
13대조 이반기 옹이 임란이 일어나자 마을로 피신을 하여 입향을 하게 되었다.
당시 관직으로 선전공을 재수 받았다.
현재13대조(함정동)와 12대조(방죽골)의 묘소만 인근의 선산에 위치하고 있다.
먼저 13대조 내외분의 묘소는 쌍분으로 함정동에 있고,
12대조 이인걸 옹의 묘소는 내동(방죽골)에 있다.
12대조의 장손인 이희규 옹의 묘소는 미암면 채지리에 있고,
그 아들 이주남 옹의 묘소는 해남군 북천면 동해리에 있다.
다음은 시제를 모시는 13대조부터 9대조까지의 계보도이다.
그림1. 영암읍 망호리 경주 이씨의 시제 모시는
13대조부터 9대조까지의 계보도
13대조
이반기 (선전공)
12대조
이인걸(仁傑)
11대조
이희규(希規)
10대조
이주남(柱南)
9대조
정양(廷亮) 남계공
정필(廷弼) 선전공
정만(廷蔓) 영벽공
정빈(廷殯) 죽와공
정하(廷河) 하의도 일원에 거주
마을에 거주하는 자손들은 10대조까지 크게 시제를 모시고,
9대조부터는 5개의파로 나뉘어 시제를 모신다.
곧 10대조가 휘하에 5형제를 두어서 5개 파로 분리된것이다.
해마다 음력 10월 보름에 13대조와 12대조의 시제를 모신다.
과거에는 묘소마다 찾아다니며 시제를 모셨으나 요즘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
이씨 문중의 사당인 영호사 강당에서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이처럼 제장이 바뀌고, 제사 절차가 간소화된 지 약 5년 정도 되었다.
영호사는 10대조가 지은 약 350년 된 건물이다. 강당은 강학(講學) 공간이고,
뒤에 후속 건물로 사당이 있다.
이곳에 22대조인 익재공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이후에 임란공신인 12대조
이인걸 옹의 위패를 가설하였다. 22대조의 위패를 ‘주백’
이라 하여 제일 높은 어른으로 관념한다.
한편 12대조는 임란 당시에 행주에서 전사했다고 하며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유림회에서제사를 모신다.
제사 비용은 미리 마련해 둔 문중 재산이 있기 때문에 그 비용에서 사용한다.
영호사는 제물을 마련하는 재실의 역할도 한다.
강당 앞쪽의 창고에는 제물을이송하는 가마부터 제사와 관련한 기물을 보관한다. 한편 강당 뒤편에는 부엌이 마련되어 이곳에서 모든 제물을 마련한다.
제비는 각 묘소마다 마련된 위토에서 난 소출로 충당한다.
각 마을에 흩어져 있는 위토를 모두 합하면 논으로 약 3,000평 정도가 된다.
과거에는 위토를 부치고 제물을 마련하는 조건으로 산지기를 두었다.
요즘은 남의 땅을 부치려는 사람이 없어서 자손들이 돌아가면서 짓는 ‘윤회답’이 되었다. 보통 1두락(200평 기준)당 1섬의도지를 낸다.
전체 약 50두락 정도 되므로 각 마을에 거주하는 자손들이 나누어서 경작한다.
제비로 시제를 모시는 데 평균 10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
제물 마련은 ‘시제답 유사’라고 하여 한 집을 미리 정해서 맡긴다.
그러나 제물의종류와 양이 많기 때문에 근처에 사는 자손들이 찾아와서 일을 거든다. 유사는 하루 전에 제수를 미리 마련한다.
시제에도 제물 중 크고 좋은 어물을 많이 올린다.
숭어·모치·병치·조기·상어가 이에 해당하며, 모두 삶아서 낸다. 특히 상어고기
는 큼직하게 토막을 내어서 꼬지를 하여 구워 올린다.
문어는 볏짚에 말아서 올린다.
적은 육적으로 돼지고기와 소고기 산적 올리고, 계적은 올리지 않는다.
건어(乾魚)로는 상어포나 문어포를 올린다. 편(䭏)은 대떡(가래떡)·인절미·시루떡 세종류를 제기에 높이 고여서 놓는다.
한편 어물 중에서 비늘이 없는 것은 올리지 못하게 한다.
또한 고춧가루는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쓰지 않으며, 동일한 이유로 과
일 중에서도 복숭아는 피한다.
제사를 앞두고 자손들이 모여서 벌초를 한다. 대개 추석 이전 공휴일을 택한다.
시제 당일에는 평균 50여 명 정도가 참석을 한다.
과거에는 먹을 것이 귀했기 때문인지 100여 명 이상의 많은 자손이 참석을 해다. 단, 제사를 모실 때에는 장가를 가지 않은 사람은 성인으로 치지 않으므로 참례를 하지 못하게 한다.
시제를 모실 때에는 제복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제관은 제사에 참석한 자손 중에서 항렬이
높고 연령이 많은 순으로 초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을 뽑
는다. 또한 집사를 정하여 홀기를 읽게 한다.
시제는 기제사와 마찬가지로 유교식 절차로 진행된다. 이때 집사자는 홀기를 읽
어 순서를 알린다. 초헌을 한 이후에 육적인 소간을 안주로 올리고,
아헌을 하고 그옆에 제육을 올린다.
마지막으로는 종헌을 하고 어물로 모치를 올린다. 삼적을 올리
는 공간은 메 앞에 미리 비워 둔다.
이처럼 강당에서 시제를 모신 이후에 제관 일행은 선산으로 가서 산신제를 모신
다. 묘소 위쪽에 산신제를 모실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 둔다. 이곳에 주과포를 올리
고, 산신께 시제를 모셨음을 고한다. 산신제를 지낼 때는 단잔을 올리고, 산신 축을
읽는다. 과거에도 항상 묘 앞에서 시제를 모신 이후에 산신제를 지냈다.
시제를 모신 후에는 모여서 음복을 한다. 자손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제물을
조금씩 싸서 보낸다. 한편 매년 음력 12월에 결산 총회를 한다. 문중 일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유사를 9명 뽑고, 이를 전체적으로 책임지는 ‘도유사’를 한 명 정한다. 도
유사는 문중 재산 관리를 총괄한다. 한편 유사들은 시제 준비, 재실 관리 등을 분담
한다. 요즘은 재실의 안방을 공동의 노동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망호정 마을 제례편 면담자 정보
● 이상채(남, 79세). 영암읍 망호리 524번지 거주, 현재 이씨 문중의 도유사를 맡
고 있다.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 이상옥(남, 70세). 영암읍 망호리 거주, 상·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 이상언(남, 72세). 영암읍 망호리 거주, 상·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 이부출(남, 73세). 영암읍 망호리 거주, 상·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
● 이상금(남, 80세). 영암읍 망호리 거주, 상·장례와 제례에 대해 제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