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포지션 - 와인드 업 - 테이크 백 - 릴리스 - 피칭. 이 다섯 단계를 따라 2초도 걸리지 않는 순간에 투수의 피칭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2초 동안의 폼에 따라 투수의 많은 능력이 결정된다. 제구력과 볼 스피드는 물론, 얼마나 체력을 덜 소모하는지, 부상을 얼마나 방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선수 생명까지도. 몇 가지 원칙만 지킨다면 자신의 신체에 맞춰 자유롭게 던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피칭폼이다. 백 명의 투수가 있으면, 백 개의 피칭폼이 나오는 것이다. 정답은 없다. 그렇지만 중심 이동 능력과 하체의 근력, 힘의 효율적인 사용, 순간 폭발력, 피칭 시간 등을 근거로 최고의 피칭폼을 꼽아 볼 수는 있다. 과연 누굴까?
이견은 없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당신의 짐작과 같다. 역대 한국 투수들 가운데 선동열과 최동원의 피칭폼이 단연 발군으로 꼽힌다. 명불허전. 이 둘의 피칭폼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최고다. 공에 몸무게를 싣는 능력과 유연성, 그리고 무엇보다 중심 이동 능력에서 최고의 피칭폼은 선동열이다. 셋업에서 팔로우 스윙까지 군더더기라고는 없었다. 게다가 공을 놓는 릴리스 포인트도 가장 늦었다. 쉽게 말하면 가장 앞에서 공을 던졌다는 거다. 타자가 구질과 코스를 파악하고 스윙할 수 있는 시간이 가장 짧다는 얘기. 릴리스 포인트가 늦게 되면, 대개 타자의 눈과 수평으로 공이 들어온다. 그러면 공을 칠 수 있는 포인트가 많이 생기지만, 워낙 몸무게를 잘 싣는 데다 힘이 좋고 공이 빨라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했던 건, 몸 중심이 홈플레이트 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약간 오른쪽, 그러니까 타자쪽으로 이루어 진다는 거다. 그리고 허리를 강하게 회전시켜 바깥쪽으로 공을 던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몸 중심이 서서히 뒤로 빠지게 된다고 고백하는 타자들이 많았다.
최동원은 중심이동보다는‘강철 어깨’를 이용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으며 순간적으로 손끝에 힘을 모으는 위력적인 투구로 타자들을 압도했다. 용트림 하듯 와일드했던 피칭폼에서 나오는 1백55km에 육박했던 강속구도 그렇거니와, 강한 손목 스냅에서 나오는 낙차 큰 커브도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수평으로 들어오는 공하고는 달라서,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히는 공을 칠 수 있는 포인트는 딱 한 번 뿐이다. 그의 피칭폼은 결코 크다고 볼 수 없는 키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피칭폼이 아주 다이내믹했으면서도 큰 부상 없이 선수 생활을 마쳤다는 점에서도 최고로 꼽을 수 있다.‘투수는 팔이 아니라 다리로 던지는 것’이라는 부친의 말을 따라, 혹독한 러닝으로 만든 하체 근력은 그의 와일드한 피칭폼을 든든히 받쳐 주었다.
최동원의 피칭이 셋 포지션에서 빠르게 와인드 업이 들어가고 테이크 백을 거쳐, 릴리스 포인트에서 폭발하는‘퀵-슬로우-퀵’이었다면, 선동열은 정민태나 임선동과 마찬가지로‘슬로우-슬로우-퀵’스타일 이었다. 두 투수의 피칭폼은 본인들의 성격도 잘 드러낸다. 최동원의 피칭폼이‘싸움닭’조계현이나‘삼손’이상훈과 마찬가지로 공격적이고 불 같은 성격을 따라 와일드했던 반면, 선동열은 정민태나 이상군, 김용수 같은 투수들이 그러하듯 외유내강형으로 무리 없이 쉽게, 조용하게 던졌다.
최동원과 선동열이 병역 문제 등으로 이루지 못했던 메이저리거의 꿈을 이룬 두 후배 투수, 박찬호와 김병현 또한 훌륭한 피칭폼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 둘이 공을 릴리스하는 시점을 눈여겨 보면, 왼쪽 어깨와 발이 안으로 완전히 닫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몸의 힘이 밖으로 도망가지 않고 안으로 갇혀있음을 볼 수 있다는 증거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 눈길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발끝을 높이 치켜드는 하이 키킹이었다. 하지만 키킹에서 중요한 것은 발끝의 위치가 아니라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라가느냐 하는 점이다. 메이저리그 초기에 박찬호의 고질병이었던 들쭉날쭉한 제구력은 발끝이 높은 키킹으로 인해 중심이 뒤로 빠지고, 그렇게 됨으로써 왼쪽 어깨가 빨리 열리는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키킹을 낮추면서, 그리고 퀵 모션에 능숙해지면서 박찬호는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됐다.
퀵 모션을 잘 구사하는 투수는 좀체로 도루를 허용하지 않는다. 키킹하는 발을 들어올린 다음, 포수의 미트에 볼이 들어갈 때까지 1.2초 정도 걸리면 메이저리그에서도 빠른 피칭폼으로 인정받는다. 박찬호는 이 시간이 1.15초로‘특A’에 속한다. 박찬호가 좀처럼 도루를 허용하지 않는 건 피칭폼도 빠른 데다가 견제 능력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김병현은 이 시간이 길어서 1.6∼1.8초에 달했지만 지금은 1.25∼1.3초 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다. 정민태는 이 시간이 1.34초로,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정민태와 정민철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름 값을 못하는 건 피칭폼이 느린 이유도 있다.
아주 독특했던 피칭폼들도 야구팬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일본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뛰고 있는 구대성은 특이하게 던지기 직전까지도 글러브를 이용해서 공을 쥔 왼손을 최대한 감춘다. 타자로서는 감춰져 있던 공이 늦게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셈이 된다. 또 그는 양팔과 다리를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으로 튼다. 그래서 안으로 힘껏 조여진 힘은 공이 릴리스되는 순간, 고무줄처럼‘탕’하고 풀리게 된다. 현대 유니콘스 김시진 투수코치는 대구상고 시절부터 늘 동년배인 경남 고등학교의 최동원과 비교됐다. 전형적인 오버 드로우였던 최동원에 비해 김시진은 스리 쿼터의 대명사였다. 그는 특이하게 던지는 축이 되는 왼발을 구부리지 않고 꼿꼿하게 세워서 던졌다. 가뜩이나 큰 키에서 다리도 굽히지 않았으니 타자들은 꽤나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가장‘야비한’피칭폼으로 꼽혔던 것은 빙그레에서 뛰었던 김연철이다.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해 한 템포 멈췄다가 던졌는데, 그것 때문에 경고도 많이 받았다.‘짱꼴라’로 통하던 두산 베어스 장호연도 느린 볼 스피드를 만회하기 위해 피칭폼의 완급을 조절하는 두뇌 피칭으로 13시즌 동안 1백9승이나 올렸다.
좌완으로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이선희와 한화 이글스의 송진우의 피칭폼이 가장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송진우의 수비는 선동열과 함께 최고로 꼽히는데, 이는 중심 이동이 좋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이드 드로우 투수 중에는 롯데 자이언츠노상수의 피칭폼이 가장 아름다웠던 것으로 꼽힌다.
하지만‘최고의 피칭폼’이란 건, 보는 관점에 따라 무의미할 수도 있다. 하일성 KBS 야구 해설위원은 특히 이 부분을 힘주어 말했다.
“결국 좋은 피칭폼이란 건 기본틀 안에서 자기 체형에 맞게 던지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팔 길이, 상하체 비율, 유연성, 힘이 모두 다 다른 데 어떻게 정답이 있을 수 있겠냐는 거죠. 자기에게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피칭폼보다 더욱 중요한 건 상하체 밸런스에요. 아무리 폼이 이상해 보여도 거기서만 나올 수 있는 결정구가 있거든요. 젓가락질 잘 한다고 밥 잘 먹는 거 아니잖습니까?”
에디터/ 송원석 도움말/ 하일성 KBS 해설위원, 이효봉 SBS 스포츠채널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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