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ㅣ 또 반복이다..내가 상황은 좋지않아 오랫동안 있어야했는데..도저히 버틸수없게 만든다..그러면서 뭐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위한다고 할수 있는가말이지..거리..시간이 길면 뭐가 온다고? 다들 힘들까봐 걱정한다고? 그 거리보다 더 먼거리를 대중교통으로 다니는사람들도 많아..그리고 개인차가 없어서 어쩌고저쩌고?... 비효율적인건 누가 비효율적인데..작성자[☆]요키멍아빠작성시간15.12.31
아니냐."고 말하고 후하게 대접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일은 명 태조에게도 감명깊었던 모양이다. 이 때, 명나라가 요구했던 무리한 조공도 철회시키는데 성공한다.
왜구와의 교섭 성과도 그렇고 이와 같이 명나라와의 관계 등,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성과를 올린 것을 보면 외교적 능력도 압도적이었다. 일본과의 외교 협상에서는 후에 그의 죽음을 안 일본인들도 애도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작성자Hell.K작성시간15.12.31
명나라 태조와 주변 신하들이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1384년,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아무도 명나라 사신으로 가려고 하지 않을때, 성절사로 명에 건너가 명과의 관계회복에 공을 세웠다. 게다가 이 때는 시간까지 촉박하여 바로 출발한다고 해도 명 태조의 생일에 맞춰 도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밤낮으로 필사적으로 달려서 기한내에 도착했다. 원래 고려의 성절사가 기한내 도착하지 못하면 그 핑계로 처벌할려고 일부러 기한을 촉박하게 잡았던 명 태조가 도리어 놀랬다고 하며 정몽주에게 말하길 "이번 사절행이 위험한 줄 알고 네 나라 대신들이 서로 미루다가 널 보낸 것이 아닌가. 너는 몇 년전에 왔던 그 사신이작성자Hell.K작성시간15.12.31
1372년에 처음 명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는데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난파당하여 십 수일을 표류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태조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바다 위를 수색하게 했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당시 난파로 사절단의 2/3이상이 죽고 살아남은 것은 정몽주를 포함한 일부였다. 난파된 바다위에서 발견될 때까지 버틴 것도 엄청나지만 발견된 것도 엄청난 확률...천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11] 물론 주원장이 정몽주를 수색해 귀환시킨 것은 외교적 문제 발생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구조된 정몽주가 다시 남경으로 올라가 명나라 조정에 들어갔을 때, 그런 조난사고를 겪고도 사신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모습에작성자Hell.K작성시간15.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