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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죽음

<라즈니쉬 명상건강> 죽음에 임한 사람을 돕는 방법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6.04|조회수43 목록 댓글 0

< 질문 : 몇 달 전 친구와 함께 죽어 가는 그 친구의 아버지를 찾아갔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무관심했는데, 모두들 떠나고 나자 갑자기 눈을 뜨더니 우리에게 말했습리다.

 

"몸이 두 개인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하나는 병들었지만 다른 몸은 완전히 건강하다. " 우리가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건강한 몸이 진짜니까 그 몸을 취하세요."

 

그 분은 "알겠다" 하시더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곁에 앉아 있는 동안 침대 주변을 감돌던 병적인 에너지가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그 새로운 에너지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당신(라즈니쉬)의 존재 안에‥‥ 지극히 아름다운 침묵 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떠나고 나서 그 분은 잠시 병세가 호전되어서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침대에서 평온하게 죽었습니다.

 

저는 10년이나 당신하고 있지만 그토록 신뢰와 맑음과 평화 안에서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준비가 된

 

그 분 앞에서 제가 너무도 무지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그대가 한 체험은 사람이 죽을 때에는 항시 가능한 것이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각성뿐이다. 죽어 가던 그 사람은 깨어 있었다 그런 체험을 위해선 그다지 큰 각성이 필요치 않다.

 

죽음의 순간에 그대의 물질적 몸과 영적인 몸은 분리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양쪽에 너무 빠져 있어서 분리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죽음이 일어나기 직전에 두 몸은 서로에 대한 동일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의 길은 달라질 것이다.

 

물질적 몸은 물질적 원소로 돌아갈 것이고, 영적인 몸은 새로운 탄생을 향한 순례를 시작하여

 

새로운 형태 속으로, 새로운 자궁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더구나 그대가 건강한 몸이 당신이며 병들어 죽어 가는 몸은 당신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한 순간에는 죽어 가는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서 그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주 쉽게 믿는다.

 

자신을 떨어져 나가고 있는 몸과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이 건강한 몸, 보다 깊은 몸이라는 것을 즉시 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사람을 더 크게 도울 수도 있었다. 그것도 좋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물질적 몸과 동일시하지 않는 그 사람의 체험만으로도 방 안의 에너지가 고요하고 평온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죽어 가는 사람을 돕는 법을 배웠다면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는 신뢰하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두번째 사실을 얘기해 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삶은 문제와 의심을 만들어내고 연기도 하지만, 죽음은 연기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사람은 "보도록 노력해 보겠소"라든지 "내일 보겠소" 라고 말할 수 없다.

 

바로 다음 순간도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지금, 바로 이 순간에 해야 한다. 아마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고 잃는 게 뭐가 있겠는가? 죽음은 어쨌든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니 신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다.

 

명확한 사실은 물질적 몸이 멀리, 아득히 떨어져 나간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건강한 몸이다" 하고 말한 것은 좋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단계도 말했어야 했다.

 

"당신은 그 두 몸의 관조자다. 죽어 가는 몸은 물질적 몸이고, 건강하다고 느끼는 몸은 심리적 몸이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두 몸을 볼 수 있다. 분명히 당신은 세번째일 것이다. 당신은 그 두 개 중의 하나가 아니다 "

 

이것이 바르도(Bardo)의 전 과정이다. 티벳만이 죽음의 예술을 발전시켰다.

 

*바르도(Bardo) : 티벳에서는 인간이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기까지 49일 동안 생과 생 사이의 중간상태를 겪게 된다고

 

하는데, 이 중음(中陰)의 상태를 바르도라 한다

 

티벳에서는 이 기간에 죽음을 겪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 해탈의 차원으로 갈 수 있도록 스승이나 승려들이 천도를 하게 되

 

는데,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에는 어떻게 인도하면 그 존재가 육신이나 카르마의 집착에서 벗어나서 원초적 광명상태

 

인 투휘광체 속으로 녹아들어가 해탈에 이르게 되는지, 임종자는 그 49일 동안 어떻게 사후세계를 여행하게 되는지에 대

 

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생전에 깨달았거나 거의 깨달은 준비가 된 사람들은 스승의 인도 아래 죽음의 순간에 각성을 가지고 육체와 자아와의 동

 

일시를 버리고 광체 속으로 녹아들어가지만, 생전에 수행이 부족하고 업이 두터운 사람은 그 빛에 들어가기 전에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로 떨어져, 이 바르도의 단계를 거쳐 다시 태어나는 경로를 밟게 된다.

 

전 세계가 삶의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티벳은 죽음의 예술과 죽음의 과학 전체를 발전시킨 유일한 나라였다. 그들은 그것을 바르도라 불렀다.

 

만약 그 사람에게 "당신이 한 단계를 나간 것은 좋았습니다. 당신은 물질적 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심리적 몸에 대한 동일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이 그 몸도 아니며, 다만 각성, 순수의식 자각입니다"

 

하고 말한다면, 만약 그대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은 이 몸도 아니고 저 몸도 아니며 몸을 입지 않고

 

형태도 없는 순수의식이란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면, 그때 그의 죽음은 전적으로 다른 현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대는 에너지의 변화를 보았다. 그대는 에너지의 또 다른 변화를 볼 수도 있었다

 

그대는 침묵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거기에 음악과, 춤추는 에너지와, 온 공간을 채우는 향기까지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은 새로운 현상, 빛의 오라를 보여 줄 수도 있었다.

 

만일 그가 두번째 단계마저 넘어갔다면 그때 그의 죽음은 마지막 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바르도에서는 그것을 '위대한 죽음'이라 부른다. 이제 그는 또 다른 형상을 입고 또 다른 감옥 안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영원 속에, 온 우주를 채우는 광대한 의식 속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잘 기억해 두라. 그대들 중의 많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친구나 친척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누가 죽을지 모른다.

 

그들이 죽어 가고 있을 때 그들이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첫째, 그들은 물질적인 몸이 아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자각하는 것이 아주 손쉽다.

 

첫번째 것을 자각할 수 있다면, 더 어렵긴 하지만 두번째 것도 자각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그는 두번째 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두 몸을 넘어서 있다. 그는 순수 자유이자 의식 이다.

 

만일 그 사람이 두번째 단계를 넘어갔다면 그대는 그 사람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단순한 침묵이 아닌, 영원에 속하고 불멸에 속하는 뭔가 좀더 생생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은 그 죽음이 애도의 시간이 아니라 축제의 순간이 된 데 대한 감사로 충만할 것이다.

 

그대가 죽음을 축제의 순간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면 그대는 그대의 친구와 그대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와 아내를 도운 것이다.

 

그대는 그들에게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준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있을 때에는 그 일이 아주 쉽다.

 

아이들은 삶이나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 젊은이는 생물학적인 게임에, 야망에, 부자가 되는 일과 권력을 가지는 일에,

 

더 큰 명성을 얻는 일에 온통 빠져 있다.

 

그는 궁극적인 질문을 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는, 죽음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야망을 가질 수 없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아무 차이가 없으며, 죄인도 성자도 아무 차이가 없다.

 

죽음은 삶의 모든 분별 너머로 삶의 모든 바보스런 게임 너머로 그대를 데려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돕는 대신 그 아름다운 순간을 망가뜨린다.

 

그 순간은 사람의 일생중에 가장 귀중한 순간이다 그 사람이 백 년을 살았다 하더라도 이 순간은 가장 귀중한 순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울고 불고 법석을 떨며 자신들의 동정심을 내보이면서 말한다. "아직 때가 아니야. 죽으면 안돼."

 

아니면 그 사람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이런 것들은 다 어리석은 짓이다. 의사도 이 멍청한 일에 한몫 거든다.

 

그들은 그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일러 주지 않는다. 그들은 핵심을 회피하면서 그대에게 계속 희망을 준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은 살 수 있을 거요." 그 사람이 죽으리란 걸 확실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그 사람이 죽음을 완전히 자각해야 하는 순간이며 정확하고 빈틈없이 깨어 있음으로써

 

순수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란 걸 모른 채 그에게 거짓 위로를 하고 있다.

 

 

그 순간은 위대한 승리의 순간이다. 이제 죽음이란 없고 영원한 삶만이 있다.

 

 

 

-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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