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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존 M. 홉슨,에코리브르,2005)중에서 2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05|조회수69 목록 댓글 0

17세기 이전만 해도 유럽 사람이 사용한 농기구는 고작 지중해식의 '긁는 쟁기'뿐이었다. 이것은 남유럽의 척박한 토양 조건에서는 마른 흙을 깨부숴 증발을 막는데 적당했다. 그러나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 젖은 토양이 대부부인 북서부 지역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 지역이 농업화가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결국 '흙판 달린 무거운 쟁기'는 배수를 위한 고랑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고, 이어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새로운 쟁기는 사용하기 전에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있었다. 먼저 비능률적인 나무 흙판과 바퀴 때문에 그것을 끌 수 있는 매우 강한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마리의 소가 필요했다(주로 한번에 4마리 정도). 하지만 소는 동작이 느려 비효율적인 데다 소 값이 너무 비쌌다. 시간이 갈수록 농부들에겐 소보다 강해 적은 수로도 쟁기를 끌 수 있는 말이 필요하게 되었다. 말을 이용하는 데도 두 가지 장애물이 따랐다. 그것은 마구를 채우는 문제와 말밥굽이 (젖은 토양에서) 썩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문제였다. 소의 배와 목에 잡아매는 기존의 끈은 여간 비효율적인 것이 아니었다. 짐이 너무 무거울 때는 동물의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 대안으로 끈을 말의 몸통에 매다는 새로운 '목띠 마구법'이 등장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것으로 견인력이 4~5배 증가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말발굽을 보해주지 않으면 젖은 땅에서는 말을 이용할 수 없었다. 습기로 인해 발굽이 썩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못을 박은 쇠편자가 등장하면서 해결되었다. 이렇게 10세기 혹은 11세기경에 발명한 목띠 마구법과 못을 박은 쇠편자 덕분에 유럽 전역에 중쟁기가 보급되었다. 이어 물방아와 풍차도 나타났다.

 

긁는 쟁기는 첫 1000년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아시아 전역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이용되었다. 하지만 중쟁기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슬라브족이 567년의 아바르족 침입 직후부터 중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아바르족은 552~565년 사이에 몽골과 알타이 지역에 터키 연합이 형성된 후 대초원에서 밀려난 '난민'들이다)....편자가 정확히 언제 발명되었는지 분명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5세기경부터 훈족이 사용했다는 정황 증거는 있다. 어찌 됐건 로마인이 사용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추측건데 동양(시베리아)에서 9세기 후반 동유럽으로 유입되어 말엽에 비잔티움에 전달되었고, 그곳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듯하다. 목띠 마구법은 3세기경 중국인이 발명했다. 이것은 기원전 100년에 중국 한나라에서 발명한 가슴띠 마구법을 개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슴띠 마구법은 서양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목띠 마구법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8세기경에 나타난 새로운 전쟁 형식(돌격 기병대)은 봉건 국가와 봉건 경제의 제도적 기틀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계기는 등자의 발명에 있었다. 등자가 나오기 전에는 말이 전쟁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기병이 엄지발가락만 올려놓는 등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인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기원전 2세기 후반). 100년경, 북인도(추운 날씨 때문에 기수가 맨발로 말을 타지 못한 지역)에서 기수는 장화 신은 발을 갈고리에 걸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기수가 질질 끌려갈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등자의 중요한 혁신은 3세기경 중국에서 발명한 청동 및 주철 등자로 완성되었다. 477년경에는 중국 전역에서 그러한 등자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특히 연연족(아바르족으로도 알려져 있음)은 다뉴브 강과 테이스 강 사이에 정착해 살다가 서쪽으로 쫓겨가면서 등자의 사용을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 694년에는 아랍인이 쇠로 등자를 만들었고, 이러한 기술 혁신은 바이킹과 롬바르드족을 통해서 서쪽으로 확산되었다...마르텔이 등자를 발명하지는 않았어도 '새로운' 돌격 기병대의 창설자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유럽'이라는 배경 안에서 원칙적인 혁신자였다. 실제로 돌격 기병대를 창설한 사람은 페르시아인(비잔틴인도 포함해서)이었다. 그리고 아랍의 무슬림이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돌결 기병대를 답습했다. 640년 이후에(마르텔의 '혁신'보다 거의 1세기 앞서서) 돌격 기병대는 이슬람 군대의 기본 골격을 형성했다. 기병대가 기원전 1000년의 어느 시기에 아시리아인이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이때의 기병은 활을 쏘았지만 등자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또한 중세 유럽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활,창,방패와 같은 많은 무기가 중동에서 처음으로 출련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슬람 군대는 긴 세월 동안 우월한 군사 기술을 활용했고, 그 대부분을 유럽이이 모방하거나 흡수했다. 결론적으로 마르켈은 등자도, 돌격 기병대도 발명하지 안흔 셈이다.

 

무슬림 역사는 투르푸아티에 전투, 마르텔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랍인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패배한 내용을(718년) 더 상세히 기술한다.

 

무슬림은 서부 유럽의 많은 지역, 그중에서도 에스파냐와 시칠리아를 점령한 뒤에는 더 이상 공격에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뒤쪽에 위치한 서유럽에 대해서는 구미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비잔티움은 더 강력하고 유혹적이었다.

 

유럽 내에서 항해하는 데는 충분하지만 너무 조잡해서 대양 항해에는 부적합한 포르톨라노 해도 역시 항해상의 제약이 되었는데, 이 문제는 아스트롤라베로 해결할수 있었다....아스트롤라베는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등장했다....아스트롤라베는 9세기에 저어들면서 정식으로 생산되었고, 10세기 중반 당시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에스파냐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흥미롭게도아스트롤라베에 관한 가장 오래된 라틴어 문헌인 <<센텐티 아스트롤라비:10세기 말 북부 에스파나>>는 아스트롤라베에 대한 알콰리즈미의 논문을 비롯한 많은 이슬람 책자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달성한 큰 업적의 결과로 유럽인이 아스트롤라베를 일반화한 점이다.

 

선미재 키와 사각형 선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국인의 작품이었다. 이것들은 400년에 등장해서 서쪽으로 전파되다가 1180년에 이슬람을 통해 유럽에 도착했다. 베네치아의 전함이 15세기 초의 우럽에서 가장 발달했다고는 해도 중국의 배 앞에서는 얼굴도 들지 못할 수준이었다. 장축 약 41미터, 횡축 약 6미터에 달한 베네치아의 갤리선은 각각 약 152미터, 약 51미터에 달한 초대한 중국 배들에 비하면 난쟁이였다.

 

제분소는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어 후에 로마제국으로 전해졌다. 최초의 수력 제분소(결정적 혁신이었다)는 기워전 1세기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출현했다...로마인이 중세 후기 수력 제분소의 기초가 된 수직 바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중국이 시초라는 근거는 중세 유럽의 수력 제분소가 '스프링 해머'에 의존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프링 해머는 기원전 4세기에 중국에서 발명한 것이기 때문이가.

 

풍차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644년 페르시아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니덤의 말처럼 더 확실한 것은 바누무사 형제(850~870년)의 작품에서 풍차를 언급했고, 1세기 후에는 몇몇 믿을 만한 저술가들이 세이스탄의 놀라운 충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예를 들면 아부 이샤크 알이스타크리와 아부 알카심 이븐 호칼). 페르시아의 풍차는 나중에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초의 공중시계는 1309년 밀라노의 세인트 유스트로지오 교회의 첨탑에 설치되었다. 최초의 휴대인 시게는 1335년 밀라노의 비스콘티 궁전에 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송의 소자용(蘇子容)은) 1086년에(는) 황제로부터 이전의 고리 모양의 시계[한공렴(韓公廉)이 발명함]를 다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시계 제작의 가장 큰 과제는 탈진기(정확한 시간 측정을 위해 시계 축과 문자반의 움직임을 고르게 하는 장치)의 발명이었다.  카드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바퀴의 출현 이래로 가장 위대한 인간의 발명품이된...탈진기를 발명한 어느 미지의 천재나 천재가 서 있는 계단 주변의 완전한 어둠 속에 서 있다." 이 수수께끼는 탈진기를 발명한 것이 중국인[725년 일행(一行)으로 추정]이었고, 더욱이 그것이 서양으로 건너간 증거가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의해 풀린다. 실제로 그 개념은 이슬람의 중동 전역에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277년(비스콘티 시게가 나오기 약 60년 전)에는 시간 준수-수은 탈지기가 북착된 분동의 개념이 포함된-에 관한 아랍어 문서가 톨레도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포르투갈 왕은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 등용했는데, 이들은 이슬람 지식을 번역해서 직접 전달해주었다(이는 십자군정쟁의 상황에서 무슬림과 직접 교류하는 것보다 더 '정치적으로 실행 가능한' 방법이었다). 더욱이 포르투갈인은 유대인 학살의 절정기인 14세기 말에 에스파냐에서 망명해온 유대인 과학자들의 이주로 더 많은 이득을 보았다...최초의 도전은 아프리카 서해안 보자도르 곶은 남쪽에 불어닥치는 강한 맞바람을 받으며 항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1440년대에 카라벨선의 건조로 해결되었다. 이 배는 선미재 키와 돛 세 개를 달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삼각돛이었다. 그러나 카라벨선의 기원은 포르투갈인이 이슬람의 카리브선을 바탕으로 작은 어선을 제작한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스트롤라베(는)...무슬람 천문학자들이 완성해서 10세기 중반 이슬람 지배하의 헤스파냐를 통해서 유럽에 전해졌다. 그러나 포르투갈인은 낮에도 정확한 위치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유명한 코르도반의 무슬림 천문학자인 이븐 아스사파르(그의 논문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에게 의존했다.

 

1580년대와 1670년대 사이에 유럽 전체가 동아시아로 수출한 은의 양이 평균 2240미터톤에 그친 데 비해 일본의 수출량은 6100톤에 육박한 사실....포르투갈이 동아시아 내에서 무역수지의 약 80퍼센트를 내륙 무역으로 충당했다는 사실이다....16세기 인도양 무역 체계에서 이용된 포르투갈 선박의 용적 톤수가 전체의 6퍼센트에 불과했다.

 

1434년에 공포된 이른바 '무역 금지령' 이후 사무역에 종사하던 많은 중국 상인들은 멜라카나 마카오에서 구입한 서류들을 지참하고 항해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배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았으므로 금지령을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VOC(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중반에 약 7만 필의 면직물을 수출했다. 그러나 99만 필이라는 구자라티의 1647년 수출량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흥미롭게도 처으으로 숫자를 도입한 것은 중동의 페니키아인었다(그들은 스스로를 지중해 동해안에 위치한 가나안에서 온 카나니 혹은 가나안 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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