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베트남의 다원적 천하관 | |
번호 : 8 글쓴이 : 麗輝 |
조회 : 5 스크랩 : 0 날짜 : 2006.05.06 19:56 |
그만큼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한 중국의 침략도 많이 받았다.
배트남의 대외투쟁사를 보면 첫째가 중국과의 끈질긴 투쟁, 둘째가 참파, 캄보디아, 라오스, 시암 등 남방에서의 쟁패전, 그리고 셋째가 프랑스에 대한 가열한 투쟁일텐데 일단 여기에서는 국초부터 깊은 영향을 끼친 첫째,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베트남 초기의 역사는 중국과의 대립과 교류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베트남의 국명은 '베트남'이란 한자어의 베트남어 발음으로, 베트남이란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전통왕조인 완조[阮朝:1802~1945]가 세워지면서 당시 청나라의 승인하에 제정된 국호로부터 유래한다. 한때 베트남의 별칭이었던 '안남'이란 말은 당이 베트남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연유한다. 즉,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동남아시아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잃지 않아서 단순히 중국의 일방적인 문화 전파와 그 수용에 따라 이해하면 안 되는 나라가 또한 베트남이다.
심지어 14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작자 미상의 설화집인『영남척괴(嶺南□怪)』에 의하면 베트남인의 조상은 중국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삼세손(三世孫) 제명(帝明)이라는 사람이 남방으로 순수하던 중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용녀(龍女)와 결합하여 태어났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베트남의 신화에는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이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용(龍)이라고 하는 베트남 고유의 신앙과도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만 봐도 베트남의 문화나 역사에 있어서 베트남 고유의 것과 중국적인 것이 어느 정도로 혼합되어 있는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인의 선조는 중국의 화남(華南)지방에 거주했던 월족(越族)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정치적 지배는 대략 B.C 219년 진 시황제의 남쪽 정벌에서 시작된다. 이 남중국의 땅에 중국은 '남해(지금의 광둥)', '계림(지금의 광시)', 그리고 베트남 북부에 이르러 '상군(象郡)' 등을 두었다. 진나라가 망한 후 지금의 광둥을 도읍지로 하여 '남월'이라는 나라가 생겨 세력을 떨쳤으나 한 무제가 B.C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구군(九郡)'을 두어 교주자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면서 이후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당대(唐代)에는 이곳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어 이후 중국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고 938년 중국의 원정군에게 대승리를 거둔 오권(吳權)이 이듬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는 중국에서 당이 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이 게속되던 시기에 해당한 바, 그 뒤 정조(丁朝:968~980). (전)레조(((前)黎朝:980~1010)를 거쳐 이조(李朝:1010~1225)에 이르러 비로소 장기적인 베트남 왕조가 세워졌는데, 특히 과거제, 구품관인제 등 중국적 통치체제를 받아들인 이조는 그때까지의 베트남인의 활동범위인 북부 베트남을 처음으로 넘어서 남쪽 참족의 국가 참파(占城의 후신)를 공략하여 지금의 광평성, 광치성 지방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이조 다음의 陳(찬)왕조가 1225년 성립하면서 북방 몽고의 압력을 받아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과감하게 물리쳤을 뿐 아니라, 서쪽의 라오스, 남쪽의 참파를 쳐서 이들에게 조공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은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패배를 모르던 원나라의 침입에 대해 3차례나 승리를 거둔 것(1257, 1284, 1287)은 베트남인들은 지금도 크게 자랑하는데 족히 그럴 만한 저항이요 통쾌한 승리였다. 베트남과 참파를 나누는 해운관(海雲關)은 이 무렵에 베트남령으로 귀속되어 앞으로의 베트남 세력의 남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물론 베트남의 남진이 항상 용이했던 것은 아니고, 진조(陳朝) 후기에 가면 참파의 북진에 적지 않은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진조에 이어 단명한(1400~1407) 호조(胡朝), 그리고 연이은 명대 중국의 직접 통치를 겪은 뒤, 1427년 (후)레(後黎) 왕조가 성립하거니와, 참파가 다시는 베트남에 대항할 힘을 못갖게 되는 것은 (후)레조의 성종(탕통) 때였다. 베트남에 반기를 든 참파의 제 15왕조 2대왕인 '반 라 자드안'의 10여만 군이 성종에 의해 격파되고, 수도 비자야(오늘날의 平定)는 함락되고 왕도 포로가 된 것이다. 이어 베트남은 참파라는 장애를 넘어서 그 남쪽의 캄보디아 서남령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부 베트남에 이웃한 라오스에 대해서도 정복의 손을 뻗어 버마 국경지대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듯 참파의 사실상 영유와 라오스에의 지배권 확립이 이루어진 레조의 성종대는 우리 나라의 조선 세조. 성종대에 해당된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베트남 남부는 이 무렵에도 완전히 베트남화되어 있지 못한 정복지였던 것이다.
16세기 초엽에 권신 막씨(莫氏)의 찬탈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나 남북 항쟁의 대립형세가 전개되어, 완씨(阮氏)가 순화(順化)를 배경으로 남방정권을 이룩하여 남쪽으로 진출함으로써 대북방 정권(鄭氏)에 대항할 힘을 기르려 하면서부터 남진의 성과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오늘날의 사이공이 위치하게 된 메콩델타 유역에 베트남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캄보디아는 베트남을 종주국으로 삼아 조공을 바치게 된다. 이어 1739년과 1755년에 차례로 완씨는 캄보디아와 교전하여 캄보디아의 해변 영토를 완씨령으로 편입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베트남이 불과 200여년 전에야 형성단계에 들어간 것과, 남부 베트남이 마지막으로 베트남에 귀속된 지역이라는 사실은 베트남의 남북문제를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전통의 관련 하에서 살필 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산(西山)의 완씨 삼형제의 반란이 남방의 완씨 영내에서 일어나 이른바 신원(新阮:西山)과 구원(舊阮)간의 싸움이 벌어지자 구원은 조상 전래의 근거지인 순화에서 밀려나와 가정(嘉定:오늘날의 사이공 근처)으로 쫓겨나면서 서남 해안지대는 결정적으로 베트남화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분쟁 때문에 문화적 중심이 변경지로 이동함으로써 그 곳의 문화수준을 높여 전국적인 문화수준으로 향상시킨 예는 중국사의 경우 동진이나 남송의 남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으며, 현재의 대만도 그 현저한 예라 할 것이다.
그 뒤 갸딩[嘉定]은 구원 세력을 축출한 서산 삼형제 중 동정왕(東定王) 구엔 반 류[阮文呂]의 통치 중심지가 됨으로써 남부 베트남의 베트남화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 비록 서산 왕조의 지배는 짧았지만,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를 포함한 오늘날의 베트남 전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서산 세력을 격파하여 새 왕조를 세운 구원일족 출신의 완조[阮朝]는 서산 세력에 의한 통일을 바탕으로 베트남 전역을 단일체제로 통치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이때가 180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채 못된 아주 가까운 때의 일이었다.
이상이 서구 열강 침입 이전까지의 대강의 베트남의 역사이다. 이처럼 주변국과의 끊임없는 대립 속에서 베트남은 성장하였고, 그 안에서 주변국, 특히 중국과의 대립과 교류를 통하여 중국 문화를 대량으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국적인 경향이 강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남월은 주로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B.C 207년에 진(秦)나라 장수 조타(趙佗)가 거기에 남월국(南越國)을 세움으로써 시작했고 조타는 스스로 남월무왕(南越武王)이라 칭하고 월인 여가(呂嘉)를 재상에 등용하는 등 독립국으로서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조타의 이런 자립에 한 고조는 곧바로 사절을 보내 그를 왕으로 봉하여 줌과 동시에 한나라에의 복속을 요구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조타가 고후(高后)와의 충돌로 한에 대항하여 황제를 자칭하고 나서자 한 문제는 다시금 사절을 파견하여 조타에게 제호를 버리고 전과 다름없이 왕의 칭호를 갖도록 권하였다. 이때 중국측이 내세운 이유는 양제(兩帝)가 병립하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 한쪽이 멸망하게 되는데 이는 인자(仁者)의 할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타는 한나라의 권유를 받아들여 칭신을 약속하고 이후 조공사절까지 파견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여전히 황제를 칭하고 모든 의례는 그에 준하여 행하였다.
이처럼 중국 황제가 베트남 군주의 칭제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후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례로 명나라의 영락제는 무력을 배경으로 대외팽창 정책을 써 베트남을 옛날과 같이 중국의 직접지배하에 두려고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그가 내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바로 당시 베트남 지배자였던 호계리(胡季□)의 황제 칭호였다. 영락제는 그가 중국의 정삭을 받들지 않고 건원칭제한 것 등이 망녕된 행동으로서 그 죄는 처벌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럼 이와 같은 중국측의 반응에 베트남 군주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들은 조타가 황제를 칭한 이후로 천년 간의 중국 지배기를 제외하면 한결같이 자신을 황제라 불렀으며 모든 의례도 황제의 예에 따라 행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하였고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황제라고 새겨진 옥쇄도 만들어 썼다. 이처럼 베트남의 군주는 누구나 다 자신이 중국 황제와 동등하다고 믿었으며 이런 의식은 비단 군주뿐만 아닌 일반 베트남인들이 다 갖는 공통된 인식이었다.
베트남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이상걸(李常傑)은 1075년 송나라 군대의 침입에 직면하여 시를 하나 지었는데 거기에서 베트남을 남국, 중국을 북국이라 하고 베트남 군주는 남제(南帝)라고 표현하여 중국의 천자(北帝)와 분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었다. 특히 이상걸은 이와 같은 사실이 하늘이 정해준 것이기 때문에 그 절대성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었다. 특히 명나라의 군대를 물리치는데 절대적인 공을 세운 원천(阮薦)은 산천의 봉역이 다르듯이 남북의 풍속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베트남은 조, 정, 이, 진이 각각 나라를 세워 한, 당, 송, 원과 더불어 그 나름의 황제를 가졌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의 다원적 천하관이 그대로 반영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시대 고려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인데 이렇게 본다면 대외적으로 천자, 황제를 표방하던 나라가 동아시아에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북중국의 요-금 왕조와 남중국의 남송을 비롯해서 동북방의 고려와 서북방의 서하, 그리고 남방의 베트남까지 동시대에 최소한 5명의 황제가 병존하던 시기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전에 고려의 독자적이면서 다원적인 천하관에 대해 언급할때에는 베트남을 제외했었는데 베트남도 분명히 당시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하나의 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원적 천하관을 언급할때 베트남 역시 그 하나의 사례로서 언급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런 베트남의 경우는 특징적인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베트남 사서에 등장하는 군주의 실제 이름과 중국측 기록에 나오는 동일인물의 이름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베트남 역사 연구자들은 중국 황제에 대하여 강력한 대항의식을 가지고 있던 베트남 군주가 자신을 비하하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실제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책봉을 받음으로써 그나마 형식적인 책봉 의례마저도 거부했던 것이다. 16세기 전반, 명나라 광동성의 관리였던 이문봉(李文鳳)은 그의 저서『월교서(越嶠書)』에서 '레조의 군주들은 정명(正名)으로 천지신기(天地神祇)를 섬기고 국내에 알렸으며 위명(僞名)으로 중국을 섬였고 백여년간 하루도 마음으로는 중국의 신하로 된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중국과의 교섭에서 베트남측이 실제 이름 대신에 위명으로 한 경우는 (전)레조가 처음이었으니 당시 군주였던 여환(黎桓)의 아들들이 각 지방의 왕으로 봉해져 송나라에 독자적으로 조공을 바쳤을때 사용한 이름이 베트남측 기록과는 전혀 달랐다. 뒤이은 이조에서는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진조에서도 역대 군주들은 위명을 사용하여 중국과 교섭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후 (후)레조도 역시 중국에 조공할때 가명을 쓰고 있다. 20여년간 투쟁한 끝에 독립을 쟁취한 태조 여리(黎利)의 경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실명이 거론되고 있지만 나머지 군주들은 베트남측 기록인『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와 중국측 기록인『명사(明史)』,『청사고(淸史稿)』의 것이 서로 다르다.
칭기즈칸을 숭배할 정도로 웅대한 뜻을 품었다는 서산조의 원문혜(阮文惠) 역시 청과의 교섭에 원광평(阮光平)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모 더욱이 청에의 친조를 약속하고는 자기를 닮은 신하를 보내 청조를 우롱하기까지 하였다. 뒤이어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여 등장한 원조의 군주는 비록 청나라에 대해 가명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대등의식은 어느 시대 못지 않아 오히려 청나라에 대한 우월성을 갖기까지 하였다.
그와 같이 사용된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제도는 바로 태상황제(太上皇制)였는데, 이는 진조와 뒤를 이은 호조에만 존속한 제도였다. 몽고의 침입이라는 위기 속에서 민족 정신이 크게 함양되었기 때문에 진조는 태상황제와 가명을 동시에 사용했는데, 이는 황제가 생존 시에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조정의 일상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군사와 외교와 같은 국가의 중대사에만 관여하는 것을 말한다. 본래의 목적은 아직 제위의 장자상속제가 미확립되었던 당시에 황제 사후 일어날지도 모를 제위계승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목적의 하나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베트남 최고의 지배자인 상황(上皇)이 자신을 신하로 칭하지 않고 후계자인 황제의 이름으로 함으로써 교섭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자 하는 의도이기도 했다.
이처럼 베트남 군주는 중국과의 교섭에 있어서 주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성과 국가의 당당함으로 표방하였다. 이는 베트남 군주가 중국 황제에 비해 열등한 지위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대등하다는 기본적인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대 조선과 비교했을때 상당히 많은 차이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다원적 천하관에 편입되지 못하고 철저한 사대주의를 표방했던, 표방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이 다시 한번 안타까워지는 순간이다.
- 참고문헌 -
劉仁善, 1993,「베트남의 傳統的 王權槪念」『東洋史上의 王權』, 東洋史學會 硏究叢書Ⅰ, 한울아카데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