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사람은 大海/小海를 보고 필자가 지명을 고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소위 조선국왕과 세자의 지위와 그 비유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고전번역원에 실려있는 난중잡록의 주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小海: 송(宋)나라 섭정규(葉廷珪)의 《해록쇄사(海錄碎事)》 〈제왕(帝王)〉에 “천자는 대해에 비유하고, 태자는 소해에 비유한다.〔天子比大海 太子比少海〕”라는 말이 나온다. ]
또 택당집을 보면
택당집(澤堂集) > 택당선생 속집 제4권 > 시(詩
중국에 조회하러 가는 윤 참의(尹參議) 안국(安國) 를 전송하며
유관의 동북방에 오랑캐 먼지 아직 일어 / 楡關東北尙胡塵
이 가을날 목도로 다시 사신 길 떠나시네 / 木道今秋復使臣
어떡하면 철산 바다 물결을 고이 잠재워서 / 安得剗平鐵山觜
우리 사신 옥하 나루 곧장 이르게 해 드릴까 / 送君徑到玉河津
동방에 대한 유언비어 씻는 일도 다급하고 / 靑丘市虎昭湔急
소해의 성홍을 축하할 이번의 사행(使行) / 少海星虹慶賀新
칠척 장신의 몸 확삭옹(矍鑠翁)이 따로 있나 / 七尺長身矜矍鑠
장한 뜻 지니신 분 다시 택거인이리이까 / 壯心非復澤車人
[주D-004]소해(少海)의 성홍(星虹) : 태자의 탄생을 가리킨다. 천자를 대해(大海)에 비유하여 태자를 소해(少海)라 일컫는데,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공동산엔 살기가 까맣게 뒤덮였고, 태자의 깃발이 이젠 천자의 황색.[崆峒殺氣黑 少海旌旗黃]”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6 長遊》 성홍(星虹)은 남조 양(梁) 유준(劉峻)의 ‘변명론(辯命論)’에 나오는 “성홍 추전이라, 성덕의 상서를 드러냈네.[星虹樞電昭聖德之符]”라는 말에서 기인하여 성자(聖子)의 탄생을 뜻하게 되었는데, 그 주(註)에 “큰 별이 마치 무지개처럼[大星如虹] 화저(華渚)에 흘러내려 옴에, 여절(如節)이 꿈속에서 그 기운에 감응하여 주선(朱宣), 즉 소호씨(少昊氏)를 낳았다.”고 하였다. 참고로 추전(樞電)은 황제(黃帝)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로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그 내용이 나온다.
이제 문제의 난중잡록의 해당 글귀를 보도록 하자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조정이 서경(西京 평양)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駐蹕]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다.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 확청(廓淸)되어 간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 암는 것이다.
위의 글을 광해군을 세자책봉교서라고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태자 책봉칙서라고 해야맞는가? 광해군이 세자이든 태자가 되었든 무언가 책봉을 받은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본문에 칠묘(七廟)가 보이는 데다가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를보면
관중이 한양이고 곧 중국임을 알 수 있으며 광해군은 小海이므로 태자로 고쳐불러야한다 .
또한 이 일은 마치 당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촉으로 피난을 가서 당 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하는 상황과 비교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의 글귀가 본문의 문맥과 비로소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 을유(1645,순치 2) / 6월10일 (신유)
상호군 김육이 지은 소현 세자의 애책문의 내용
소현 세자의 애책문(哀冊文)에 이르기를,
“순치(順治) 2년, 세차(歲次) 을유년 4 월 26일(무인)에 소현 세자가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졸하였으므로, 6월 19 일(경오)에 장차 고양(高陽) 효릉(孝陵)의 뒷등성이에 장사하려는 것은 예이다.
(......중략......)
그 사(詞)는 다음과 같다.
아, 성인의 조정이여, 누대(累代) 동안 어진 임금이 계속되었고, 종손과 지손이 백세를 내려오면서 성왕의 후손 계속 번창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동궁께서는 자품이 순수하고 강직하시어, 일찍이 위호(位號)가 정해져서 원량(元良)으로 높이 칭송되었다. 물결은 소해(少海)에서 맑고 광채는 전성(前星)에서 더하였으며, 마음은 항상 학문을 전념하는 데 있었고, 뜻은 경서를 탐구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불행한 시기를 만나 뜻밖의 액운을 당해서, 나라를 혼란시킨 환란이 도성 근교에까지 미쳤다. 그러자 부왕(父王)과 헤어져 민간(民間)으로 나가 피난할 제, 세자와 빈궁(嬪宮) 두 분의 태도로 인해 어질다는 명성이 백성들에게 깊이 칭송되었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혔으므로 부로(父老)들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나와 목을 길게 빼고서 눈을 닦고 자세히 우러러 보았다.
(......중략......)
만물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비운(否運)이 다하면 형통한 운수가 돌아오는 것이다. 참으로 천도(天道)가 항상 그런 것이니, 어찌 이 이치가 혹시라도 어긋나겠는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앞으로는 운수가 형통할 것이요 재액은 이미 다 없어졌다고 여겼는데, 그동안의 세월이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렇게 참혹한 화변을 내리었다. 아, 슬프다.
용루(龍樓)에 해는 저물고 봉전(鳳殿)에 바람은 슬피 불어, 부왕께 문안하는 예가 단절되었으니, 부왕의 음식은 누가 보살피랴. 다행히 원손(元孫)이 재지(才智)가 뛰어나서 종묘의 제사를 의탁할 데가 있는 것이 기쁘고, 억조 창생들의 큰 기대가 달려 있으니, 국운이 오래도록 이어질 줄을 알겠다. 그러나 파리해진 어린 아이가 부모 그리는 것이 비참하여 성상의 비통을 더하게 한다. 아, 슬프다.
서재(書齋)의 휘장은 적막하기만 하고 강석(講席)은 처량하기도 한데, 나나니벌[蜾嬴]은 창문에서 울고 제비[烏衣]는 기둥에서 지저귄다. 아첨(牙籤) 꽂힌 권축(卷軸)에는 먼지가 끼어 있고, 보전(寶殿)의 맑은 향기는 사라져가는데, 지난날의 늙은 환관이 남아 있어, 궁관(宮官)을 대하여 눈물을 줄줄 흘린다. 아 슬프다.
장사지낼 날짜가 기약이 있어 산소(山所) 자리를 잡으니, 산세가 마치 용(龍)이 서리고 범[虎]이 걸터 앉은 듯 웅장하여 부온(富媪)이 복을 저축하였고, 모든 신령이 와서 조회하며 세 방위가 다 공손히 읍(揖)을 한다. 이곳이 교릉(喬陵)의 신수(神隨)에 의지하여 또 송백(松栢)이 푸른데, 어지신 할아버지는 남쪽에 계시고 성스러운 어머니는 북쪽에 계시니, 아마도 영령(靈靈)들께서 서로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 완연히 평소와 같으리라. 아, 슬프다.
(......중략......)
이것은 상호군(上護軍) 김육(金堉)이 지은 글이다.
[주D-007]소해(少海) : 천자(天子)를 대해(大海)에 비한 데 대하여 태자(太子)를 소해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8]전성(前星) : 황태자의 이칭(異稱). 심성(心星)을 천자의 상징으로 삼고 심성의 앞에 있는 별을 황태자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오행지(五行志).
위의 글들로 보았을 때 광해군과 소현세자가 小海와 前星로 비유되었다면 선조와 인조는 바로 大海이므로 조선의 임금은 천자이고 광해군이니 소현세자니 하는 조선의 세자들은 전부 황태자인 것이다.
( 다만 일부 제후의 표전이나 글등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교육 받은 현실이 안타깝기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