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쓰라면 이제까지 아무도 쓰지 않은 제재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걸 써서 읽는 사람들을 놀래주겠다는 욕심에서입니다.
하지만, 그런 글감은 흔한 게 아닙니다. 아니,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이란 거의 없습니다. 20세기에 탄생된 비행기나 인공위성도 BC 5세기경 인도에서 쓰여진 {우파니샷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원 전에 생각해낸 것을 20세기에 접어들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걸 골랐다고 해도 결코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글감을 찾았다고 해도 작품으로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글로 쓰려는 것은 이와 같은 새로운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친숙하지 않은 것들은 자세히 묘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실한 심정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1915년, 영미 이미지스트(Imagist)들이 자기들의 이념을 알리기 위한 선언에서 "시의 제재 선택에서 자유로워질 것. 그러나, 비행기나 자동차 같은 것만이 새로운 제재라고는 생각하지 말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것을 고르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자기가 읽은 글 가운데 가장 감동을 준 것들을 고릅니다. 그리고 그마저 실패한 사람들은 학생들의 경우 선생님께 제목을 정해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남들이 성공한 걸 골라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니, 그런 글감일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먼저 쓴 사람의 글에 이끌려가기 쉽고, 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자기가 덧붙일 게 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글감을 정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자아를 표현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백일장이나 작문 시험처럼 여러 사람의 글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써야 합니다. 아니, 이런 경우도 일률적으로 정해주는 것보다 제재의 범주를 제시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런 점을 종합할 때 글감은 우선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들을 골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글감만이 남에게 새로운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기쁨에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이 강해지고, 섬세하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은 기억의 편의를 위하여 <추상화(抽象化)>되고 <고정관념화(固定觀念化)>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추상성과 고정관념이 벗겨내야 합니다. 이 장에서는 자기가 고른 제재를 이런 고정관념을 벗겨내고 참신한 것으로 바꾸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1. 윤리와 인과관계 벗어나기
우리가 시로 쓰는 제재들은 주로 <느낌>과 <상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아주 하찮은 것을 만나도 자기 나름대로 느끼고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라면 뭘 쓸까 망설이는 것은, 느낀 것이나 상상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윤리성과 인과 관계를 따지면서 이런 것은 좋고 저런 것은 나쁘다며 걸러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저는 대학교수이고, 나이도 꽤 지긋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외계인 V]라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본 뒤부터는 술기운이 아리잠잠하게 오른 상태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만나면 파충류의 여인인 "다이아나"를 연상하기가 일수입니다. 특히, 가을비라도 내리는 쓸쓸한 저녁 어쩌다 들린 술집에서 마담이나 아가씨들이 혼자 마시는 내 테이블로 와 "저도 한잔 마셔도 되겠어요?" 라며 튤립 모양의 칵테일 잔을 들은 모습을 보면 나는 한 마리 모르모트가 되어 그녀들의 술잔 속에 들어가 있는 환상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짙게 화장한 그녀들의 얼굴을 긁으면 푸릇푸릇한 비늘이 들어날 것 같아 몸서리를 칩니다.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고개를 흔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파충류의 여인으로 생각하다니…, 하고 엉뚱한 느낌과 상상을 지워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을 파충류의 여인을 떠올렸다고 해서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원래 느낌이나 상상은 윤리성도 인과성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과 상상을 글로 썼다고 해서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윤리적인 판단은 의지적인 행위에만 적용해야 할 기준이고, 논리적 인과관계 역시 문학 작품에서는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아니, 당대의 윤리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걸 다룬 작품일수록 새로운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홍길동전]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별다른 죄가 없는데도 사약을 받으면 임금님이 계신 쪽을 향해 사은숙배(謝恩肅拜) 하고 죽던 시절에 노비 출신의 어머니를 둔 그가 호형호부(呼兄呼父)를 못하는 게 한이 되어 관군과 싸운다는 것은 당시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우리 문학사에 최고로 꼽히는 것은 기존의 윤리와 도덕에 가리었던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비단 {홍길동전}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춘향전}도 그렇고, 김동인(金東仁)의 [감자]도 그렇고, 이상(李箱)의 [날개]도 그렇습니다. 문학사는 이와 같은 비윤리적인 인간상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가의 의무는 문학사라는 전시실에 걸리지 않은 새로운 초상화를 거는 것"이라고 믿는 문학사가들은 기존의 윤리나 가치관에 의해 가려져 있던 인간상의 제시한 작품들만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시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시대의 시는 모두 <인륜>·<자연>·<도> 같은 도덕적인 것들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공동의 선(善)>을 다루던 주제는 <개인의 선>으로 바꾸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개인적인 선도 순간적이고 찰라적인 선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또, 시에서는 인과관계 역시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시적(詩的)"이라고 생각하는 <꽃 같은 처녀>라는 표현만 해도 그렇습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고, "처녀"는 결혼하기 이전의 여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식물=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이 용인되는 것은 시라는 장르가 애초부터 사이비진술(pseudo statement)로 이뤄지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인과관계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사적 장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궂은비가 내리는 늦가을 오후, 낙엽이 딩구는 거리를 걷다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으면 사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가을비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지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같은 시각 같은 거리를 걷다가 만난다는 것은 우연일 뿐입니다.
하지만 문학의 목적이 새로운 인간상의 탐구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비윤리적인 제재를 채택하는 일은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에서 채택하는 인물이 이미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는 인물들을 달리 해석하는 작업이라 해도, 그런 인물만 골라 정당화시키면, 작가의 본래 의도와 달리 예외적 가치관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제재를 받아들이려면 비윤리성만 강조하지 말고, 상황에 대한 갈등과 투쟁, 그리고 그런 비윤리적인 것들을 받아들였을 경우 겪어야 할 고통 등을 그려 전인적 성격(全人的性格)이 드러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관점 바꾸기
하지만, 윤리나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느끼고 상상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은 모두 이들을 기준에서 이뤄지고, 그로 인해 어느덧 고정관념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에서 벗어나자면 먼저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사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두 가지만 질문해 볼까요? 첫 번째 질문입니다. 두 점 사이 최단의 거리는 직선입니까, 곡선입니까? 직선이라구요? 좋습니다. 그럼 하나 더 질문하겠습니다. <1+1>은 얼맙니까? 누구를 초등학교 1학년 취급하느냐구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얼맙니까? <1>이라구요?
좋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답밖에 없을까요? 힌트를 드리지요. 서울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합시다. 그 비행 궤적(軌跡)은 직선입니까, 곡선입니까? 해저 터널을 뚫고 가지 않는 한 곡선이지요? 그리고, 2진법(進法)에서 <1+1>은 얼마입니까? <10>이지요?
그렇습니다. 두 점 사이 최단의 거리를 직선이라는 답은 유크리이트 평면기하학(平面幾何學)에서만 진(眞)이지 구면기하학(球面機何學)에서는 곡선일 수도 있고 직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직선"·"곡선"·"평면"·"구면" 등은 논리적 가정에 불과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구면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평면기하학에 의하여 사고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여러 진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년 단위는 12진법을 사용하고, 절후와 하루의 단위는 24진법을 사용하고, 1주일 단위는 7진법을 사용하고, 1달 단위는 30진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1+1>은 2진법(進法)에서는 <10>이고, 3진법 이상에서는 <2>이고, 같은 <2>라고 해도 3진법에서 2와 10진법에서 2와 12진법의 2가 차지하는 위치와 양은 각기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1+1>은 10진법의 <2>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참다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선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같은 훈련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①대상의 위치 전환
②주체와 객체의 입장 전환
③서로 다른 것의 동정화(同定化)와 동일한 것의 이화(異化)
④작은 것의 확대(擴大)와 큰 것의 축소(縮小)
⑤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이동
그러니까, 모든 것을 바꿔보는 겁니다. 이와 같이 아주 하찮은 이야기에서도 심오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다이아나"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직업적 편견을 자극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만, 술 취한 사내들을 상대로 사는 술집 여인들은 아무리 화사하게 웃어도 아무에게나 마음을 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 잔에 적게는 몇 천 원, 많게는 몇 만원씩 하는 칵테일을 사달라는 제안은 나를 술잔 속에 넣고 마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홍길동전}의 경우는 너무도 당연해서 새삼스레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현대로 바꿀 경우에는 너무도 낡은 주제라서, 그릇된 사회제도를 바로잡는 데 앞장서는 방향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것보다는 자기 집 재산 상속 문제 쪽으로 이끌어가야 그럴 듯하게 보일 겁니다.
이와 같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하찮은 것에서도 아주 재미난 시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어느 날 우연히 버스 속에서 옆 사람이 "당신 말 속에 또 다른 말이 있는 것 같애"라는 말을 듣고, 언어는 공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써본 것입니다.
말 속에는 말이 있고
말 밖에는 말이 있습니다.
말과 말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
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구멍 가게가 있고
구멍 가게 한 가운데에는 꿈을 담은 사탕 항아리가 있고
그 뒤 쪽 지하실 계단 아래에는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가 있고
그 고양이는 밤마다 층계 위에 올라와 밤새도록 운다.
말과 말 사이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숲이 있고
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들 뒤엔 명털 뽀얀 소녀들이 있고
깔깔대는 그 소녀들 웃음은 화살이 되어
산등성이를 달리는 營?정갱이를 꺼꾸러뜨린다.
그러나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또 다른 말이 있고
또 다른 말 내부에는 눈부신 이데오르기가 있고
이데오르기는 도시 상공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
펄럭이는 깃발은 저를 위해 다른 말들을 공격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전쟁터에서 혼자 죽는다.
말과 말 사이에는
쓸쓸히 비가 내리는 바다가 있고
비내리는 바다에는 죽은 고래 한 마리가 있고
그 고래는 밤마다 제 짝을 찾아 울며 지구 저쪽으로 떠나고
그래서 지상의 우리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필자,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어떼요? "말 속"에 말이 있다면 "말 밖"에도 말이 있을 테고, 따라서 말은 입체적 공간일 수도 있고, 도시일 수도 있고, 국가이며 우주라고 보는 것은 잘못일까요? 만일 이 작품의 주제인 <언어는 우주이고 존재이다>, <언어는 이데오르기를 지니고 있다> 식으로 설명했다면 아주 난해하거나 뻔한 작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기 전에 선정한 제재들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바꿔 생각하기는 글을 쓸 때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바꾸어 생각해 봐야 독단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 자유 연상을 되풀이하고 중간 단계 자르기
이와 같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상상력(imagnation)은 슬슬 풀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관념을 접했을 때 본능적으로 그에 관계되는 것들을 떠올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연상(聯想, associ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연상의 유형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유형으로는 분필을 보면 선생님이 생각나고, 포크를 보면 나이프를 생각나는 식의 <연접(延接) 연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곁에 붙은 것들을 떠올리는 유형을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 유형으로는 맥심 커피를 보고 초이스 커피를 생각하고, 축구공을 보고 배구공이나 농구공을 생각하는 식의 <유사(類似) 연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검정 티셔츠를 보면 하얀 바지가 생각하고, 훌쭉한 아이를 보고 뚱뚱한 아이를 떠올리는 식의 <대비(對比) 연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올리는 <자유 연상>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일정한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올리는 자유 연상이 가장 새로운 결과를 가져옴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예컨데, <캠블 청키 수프>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캠블 수프사(社)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담당자가 사전에서 임의로 "손잡이"라는 단어를 골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로부터 "도구"를 연상하고, "도구"에서 다시 "포크"를 연상하고, 그러다가 누군가 옆에서 포크로 먹을 수 있는 수프가 어떨까 농담하자, 다른 사람이 그런 수프는 채소와 고기 등을 듬뿍 넣은 것이라고 해서 포크가 없으면 먹기 힘들 정도로 고기와 채소들을 넣은 캠블 청키수프가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연상을 하면서 중간 과정을 생략하면 <비유(metaphor)>가 됩니다. 다시 말해 원래 출발했던 사물은 < 원관념(tenor)>가 되고, 연상을 통하여 떠올린 사물은 <보조관념(vehicle)>이 됩니다. 그리고, 연상을 통해 어느 한 부분을 바꾸면 <부분적인 비유> 또는 <장식적인 비유>가 되고, 전체를 바꾸면 <기능적인 비유(functional metaphor)> 또는 <본질적인 비유(essential metaphor)>가 됩니다.
자유 연상 기법을 구사하여 시상을 새롭게 할 경우에는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한두 번 연상을 하고 그 결과를 작품으로 표현할 경우에는 자칫하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너무 되풀이할 경우 독자들이 원관념을 유추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유추할 수 있는 단계까지 연상을 하고, 그 중간 단계를 자른 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자아, 그럼 자유 연상의 기법을 구사하여 한편의 작품을 써보기로 할까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서재 유리창 너머로 푸른 바다가 좌악 열리고 있으니 "바다"를 소재로 잡고 연상해 보기로 합시다. 바다가 파랗군요. 그런데 꼭 목장(牧場)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정도는 연상할 수 있지요? "목장"하니까 막 달리고 싶다는 생각과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눕는 하이얀 풀꽃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나는 한 마리 말이 되어 네 굽을 놓고 푸른 목장을 달립니다. 그리고, 내 발굽에서는 밟힌 풀꽃들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좀더 알기 쉽게 그림으로 그려볼까요?( 다운을 받아읽지 않으면 도표가 안 보입니다.)
이 정도의 연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연결시키면 아주 재미난 시 한편이 됩니다. 연결해볼까요?
오후 2시
바다는 푸른 목장
바람이 불 때마다 하이얀 풀꽃들이 줄지어 눕고
나는 한 마리 망아지가 되어 짓달린다.
내 네 발굽에서는 오후 두시의 바람과 풀꽃 향내가 난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구요? 그럼 다시 상상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낯설어 독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앞의 단계를 작품화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상력을 이용하는 방법으로는 되풀이하여 연상하고 중간 단계를 자르는 방법 이외도 어떤 상상의 결과에 또 다른 상상의 결과를 결합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콜리지콜리지(S. Coleridge)가 상상력의 유형을 <제1상상력(primary imagination)>과 <제2상상력(secondary imagination)>으로 나누고, 전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에 해당하며, 후자는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이 제2상상력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와 같은 방법을 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4. 인과 관계를 비틀거나 풍경 바꾸기
우리가 새롭게 느끼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인식의 주체가 새롭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제재들을 택하려는 것은 누구나 듣고 생각한 것들을 말할 경우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스쳐 듣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부부간의 대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내가 조금만 눈빛이 달라도 무슨 일이냐고 민감하게 묻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아내가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수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너무 자주 그런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던 방식을 택하지 말고, 하늘을 보며 하이얗게 웃는다든지, 한 1분쯤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과 같은 낯선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과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낯설게 만들기(defamilarization)>라고 합니다.
낯설게 만들기는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비롯하여 <구조적 국면>과 <조직적 국면>에 이르기까지 전 국면에서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발상의 단계이므로 의미적 국면에서 낯설게 만들기의 방법만 살펴보기로 하면, 크게 인관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과 낯선 배경을 설정하는 방법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인과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김춘수, [눈물]에서
이 작품은 원관념을 잠재시킨 3개의 치환은유를 인과관계를 맺지 않고 병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남자와 여자의 젖은 아랫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오갈피나무의 젖은 아랫도리>가 무엇을 의미하여, 왜 <남자와 여자의 젖은 아랫도리> 다음에 이야기하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의 젖은 발바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들을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인과관계를 설정하면 숙친한 것들이 되고 맙니다.
(밤에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아랫도리가 젖어 있(었)다./밤에 (사랑하다가 창문 너머로 바라본)보는 오갈피나무,/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마치 사랑하는 자기들처럼) 젖어 있(었)다./(누군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너의 영혼의 바다를 건너는 것)/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새(처럼)가 되었다고 한다./(새처럼 가벼워)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수정에서 오직 추가된 것은 <사랑하다가>라는 상황 하나뿐입니다. <있다 : 있었다>는 원작의 경우 시에서는 과거도 현재로 표현하는 <과거의 현재화 기법> 때문이고, 수정한 것의 경우는 산문에서는 현재의 일도 과거로 표현하는 <현재의 과거화 기법>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서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된 랑그(langue)를 살펴볼 때에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새가 되었다고 한다 : 새처럼, 새처럼 가벼워>도 마찬가지입니다. 랑그의 층위에서는 <새처럼 되었다>입니다.
우리는 흔히 <논리와 비논리>, <인과와 비인과>, <연접과 단절>은 완전하게 끊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선은 무수한 점의 연속이고, 논리와 비인과 같은 상반된 개념은 한 쪽은 논리적이고 다른 쪽은 비논리적이라고 가정한 직선상의 한 지점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로 인해 비인과적인 것들도 그 빈틈을 메워주면 인과적인 것들이 되고, 이와 반대로 인과관계를 자르거나 비틀면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이루는 요소는 <화제>·<화자>·<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논의한 것들은 화자와 화제를 새롭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화자와 화제가 등장하는 배경을 아래의 예처럼 비일상적인 것으로 바꿔도 새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내 아득한 마음의 들판 한 구석/엇슥엇슥 엇베인 마른 수수대궁 밑으로/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네 웃음은 참 아름답다
→ 네가 웃는다/잔잔하게 웃는 네 웃음 속/이름 모를 풀꽃들이 하늘거리며 손짓을 한다.
어떻습니까? 배경만 바꾸어도 아주 새롭게 보이지요? 새롭다던지 낡았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배경을 바꿀 경우, "어? 비가 마음의 들판에 내리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하고 긴장을 하며 읽으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헤아려보기 때문에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아, 시상을 새롭게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고른 시상을 검토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생각해 봅시다>
1.시의 제재가 새로워야 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2.어떤 제재를 선택하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생각해 봅시다.
①대상의 위치 전환
②주체와 객체의 입장 전환
③서로 다른 것의 동정화(同定化)와 동일한 것의 이화(異化)
④작은 것의 확대(擴大)와 큰 것의 축소(縮小)
⑤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이동
3.어떤 제재를 선택하고 연상을 거듭한 다음 중간 단계를 자르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봅시다.
4.자기가 좋아하는 시 한편을 고르고, 그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꿔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