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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학 강 좌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 문덕수

작성자Jaybe|작성시간05.08.11|조회수10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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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는 제재(또는 사물), 언어, 시인, 독자, 미디어(잡지, 신문, 방송), 출판, 서점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울려 상황을 구성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관점에 따라 輕重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실 어느 한 가지인들 중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의 경중을 따져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소들 중에서 특히 '사물'과 '언어'라는 두 요소에 집중하여, 이른바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이라고 할까, 관계라고 할까, 그런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한 마디로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또는 관계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잠재되어 있다. (1) 사물과 언어 또는 관념과의 일치 여부 또는 준별 가능성, (2) 사물(thing)이라는 개념의 범주 확정, (3) 이 문제에 불가피하게 관련되는 비유, 상징, 이미지, 지성, 정서, 상상력, 구조, (4) 시쓰기의 原點 또는 출발점 등이다. 이렇게 열거하고 보면,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사실상 시의 모든 문제를 전부 포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볼 수는 없고, (1)번 문제에 집중하되 나머지 문제도 관련되거나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언급해 보기로 한다.


누군가 이미 한 말 같다만 사물은 시간마다 달리 보이는 법, 그래도 관념은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까닭 없는 슬픔은 온몸 가득 번져 나른한데, 다탁 위에 놓인 내 손끝을 잡고 애써 웃는 그대를 새롭게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윤석산, 「칸나꽃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하여」에서


이 시에서, 尹石山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사물과 변하지 않는 언어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고, 따라서 사물과 언어는 다른 것이며, 변화하는 그 사물에 알맞은 새로운 이름을 부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다"라든지, "언어는 사물이다"라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는데, 尹石山은 사물과 언어, 사물과 관념과의 불일치 또는 구별을 의식하고 있다. 바다를 언제나 항상 '바다'라고 부르는 것, 빗속에 흔들리는 칸나꽃을 항상 '붉다'고만 하는 것은 확실히 사물과 언어와의 불일치를 무시한 언표일 수 있다. 하물며 연인의 경우, 사랑하기 이전과 이후는 그 이름이 마땅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


같은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집단(종족, 민족)이나 언어나 개인 등에 따라 달리 언표되는 사례는 늘 경험하는 일이다. '개 짖는 소리'에 대하여, 한국인은 '컹컹'이라고 하고, 일본인은 '완완'(ゆんゆん)이라고 하고, 미국인은 '바우와우'(bowwow)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일례다. 또 '컹컹'은 개가 짖는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는 예도 있다. 이를테면, 沈相運은 "아직도 몇몇 목공들은 살아서 / 컹컹 기침을 하며 / 환한 속살의 각목을 켠다"(「木工幻想」에서)라고 하여, 목공들의 기침 소리를 '컹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침소리의 음성상징(의성어)에도 리얼리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서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매암, 매암'(준말은 '맴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울시내, 아파트 틈새의 매미소리는 '맴맴맴'을 7번~10번 정도에서 끊고, '매애앰'하고 길게 뽑는다. 몇 년 전 강화도의 전등사에 갔었는데, 경내의 숲에서 들은 매미소리는 15번~17번이나 울고서는 그 다음에 '매애애애앰' 하고 길게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등사 경내의 매미는 '맴맴'이 아니라 '맹맹' 또는 '매앵, 매앵' 하고 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운이 없는, 또는 공해에 병든 매미는 '미미' 또는 '매매'로 울고, 건강하고 생기 있는 매미는 '맹맹' 또는 '매앵, 매앵'으로 탄력이 넘치는 소리로 들린다. 이러한 매미소리의 분석도 실제의 매미소리와 얼마만큼 일치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시인은 시쓰기에 있어서 사물과 언어와의 완전한 일치를 가장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물과 언어 사이에는 분열, 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완벽한 답은 神의 몫이겠지만, 대충 말한다면 사물에 대한 언어의 양적 빈곤, 사물과 떨어져 있는 언어의 독자성, 그 可動性(mobility), 언어의 추상성과 언어의 구조적 결함, 언어 사용자의 주관, 등등을 들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이런 정도로 해둘까 한다.



2


사물과 언어의 불일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리가 잘 아는 시가 있다. 이 시는 그러한 문제를 사물 쪽에도 있고, 언어 쪽에도 있고, 그리고 언어 주체(사람) 쪽에도 있음을 암시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1」에서


이 작품은 어떤 사물(절대 존재, 또는 사람, 연인 등)에 이름을 불러주기 이전과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차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사물, 이름(언어),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주체(사람) 등이 다 표면화되어 있으므로, 사물과 언어의 불일치 또는 일치 문제의 요인들이 다 암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물상'(物象)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름을 불러주자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물상'과 '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의 '이름'은 동식물이나 사람이나 무기물 등 상호간을 구별하기 위하여 부르는 명칭, 성명이나 명의(名儀) 등의 사전적 의미라기보다는, 특별한 관심(동정, 연민, 사랑, 믿음 등)을 가지는 어떤 존재(신, 절대자, 연인, 친구, 존경의 대상)에 대한 특별한 의미나 가치에 대한 명칭, 또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호칭(명칭)은 언어화 또는 언어로 표출되는 명명행위라는 점에서, 견강부회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간략하게 '언어'라고 해둔다. 아담이 만물에게 이름을 지어 불러준 그런 의미의 이름 불러주기라고 하더라도 역시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한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물상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불러주자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꽃도 물상의 일종이지만, 金春洙의 이 작품에서는 물상과 꽃이 준별되어 있다. 그러니까, '물상'은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꽃'과는 다른, 말하자면 이름 이전, 이름이 없는, 다시 말하면 언어 이전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만물을 창조한 이후,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기까지의 기간에 존재했던 사물이 물상이 아닐까. 그러한 사물에 이름을 불러주니까, 그 사물이 모두 내게로 와서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한 존재(꽃)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 줄 믿는다. 또, 언어(이름)는 물상을 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意味가 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든지,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애벌레가 나방으로 변신한다든지, 개구리가 땅 속의 동면에서 깨어나고 싶은, 그런 '변신'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상황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즉, "나는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 물음이 내포되어 있고, 그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데카르트식의 근대적 자아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나와 너'(Ich und Du)라는 부버(M. Buber)식의 존재방식임을 알 수 있다. '나'란 무엇인가 라는 근대적인 물음이,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일방적'폐쇄적 코스가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하여, '너'에게로 나아가는 쌍방적•개방적 코스를 통해서, '개인'이나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더불어' '함께' '共生'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버가 인간존재의 원범주로서의 인간의 '간'(間, das Zwischen)이라는 개념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가 너를 대상화하여(즉 물상화하여)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서로 '꽃'의 의미를 지닌 주체로서의 공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金春洙의 「꽃1」에서 이상과 같은 해석을 전제로 하여 두 가지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이름을 부르기 이전(즉 언어 이전)의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춘수는 그것을 '물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특유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불렀던 간에, 아직은 이름이 없는 언어 이전의 적나라한 사물세계임이 분명하다. 둘째, 작자는 이 시에서 신화적•창조적인, 어떤 점에서 아담과 비슷하기까지 한 명명행위를 체험하고(?)있다.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이 없는, 언어의 인공적 가공의 퇴적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물의 원점에서 이름을 지어 불렀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기존의 관념이나 선행언어들을 고친 것, 즉 개명도 추가도 아닌 새로운 명명행위라고 할 수 있다.



3


사물과 언어와의 분열•불일치는 여러 가지 이유에 기인한다는 점을 앞에서 말했다. 그러한 분열․불일치가 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여 일치시켜보려는 시도(즉, 진실과 진리의 추구나 노력)에서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의 양상도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사물과 언어와의 분열•불일치의 여러 원인 중이서, 사물을 관찰하는 주체 즉 시인의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큰 다른 양상을 가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먼저 어떤 관념을 정해 놓고, 그 관념에 알맞은 사물을 찾아 그 관념을 해석하거나 그 관념에 사물을 끌어다 연결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태도의 근원은 낭만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에 있다고 하나, 고전주의에도 있다. 사물보다 관념을 선행시키는 태도는, 사물을 이데아의 가상(假像)이나 모상(模像)이라고 하여 참된 실재로 보지 않고, 참된 사물의 실재는 '이데아'라고 주장한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그 이론적 연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관념'을 먼저 만들지 않고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의식하려고 하는 리얼리즘의 방법이다. 이 경우, 그 사물에서 가급적이면 인생론이나 사회론 같은 관념을 배제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 사물에서 어떤 관념을 귀납적으로 끌어내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의 양상에서, 낭만주의(휴머니즘)와 리얼리즘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분기점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음도 흥미롭다고 하겠다.


먼저 전자의 경우부터 살펴보겠다. 관념을 먼저 만들어 놓고(정해 놓고), 그런 다음에 사물을 찾아 연결시키는 방법을 관념의 감각화, 관념의 肉化(incarnation)라고도 말한다. 관념을 관념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도 물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전형적인 예로서 이방원의 「何如歌」(관념을 설정한 후, 사물을 끌어다 연결시킨 것)와 답가인 정몽주의 「丹心歌」(관념 즉 일편단심이라는 의지를 의지 그대로 표현한 것)를 들 수 있다. 현대시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가장 성공한 시인은 金顯承일 것이다.


나의 희망,

어두운 땅속에 묻히면

黃金이 되어

불 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캄캄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김현승, 「희망」에서


이 시의 제목은 「희망」인데, 그것은 앞으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어떤 가망, 염원을 의미하는, 보편성을 띤 관념이다. "나의 희망(이) / 어둔 땅속에 묻히면 / 黃金이 되어"라는 선조적(線條的)•축자적 표현을 차례대로 분석해 보면, "어둠의 땅속"이나 "黃金"이라는 사물에 앞서서 먼저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또 "나의 희망은 무엇이며, 너의 희망은 무엇일까" 등 일련의 의문이 결합된 문제 즉 관념이 형성되고, 그런 연후에 그런 관념에 적합한 '사물'(땅속, 황금)을 발견하여 연결시켜 감각적으로 구체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주지주의에서 강조하는 "사상의 감각화"라는 것은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 경우, 혹자는 작자가 '희망'이라는 관념을 떠올리기 이전에 "어두운 땅속에 묻힌 黃金"이라는 사물(또는 사물 이미지)을 먼저 발견하고, "이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숙고한 끝에 '희망'이라는 관념을 찾아낸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사물에서 어떤 관념을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품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작자의 심리세계, 즉 역순(逆順)이 자유로운 혼돈의 상상세계와, 그것을 정리하여 작품(텍스트)으로 일단 조직화한 후의 축자적․선조적 질서와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어떤 성질의 해석과 분석이든, 어떤 관념(예를 들면 '희망' '자유' '고독' 등등)을 먼저 설정하고, 연후에 그 관념을 구체화•감각화 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서 그것에 결부시켜 표현할 작품임이 분명할 때, 그 작품의 축자적•선조적 질서를 뒤엎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관념을 먼저 설정하고, 연후에 그것을 구체화•감각화 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 결부시키는 방법을 중시할 때, 그러한 작품의 의도나 목적은 '관념탐구'(또는 어떤 사상의 선전)에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실재(참된 사물의 모습)를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즉 사물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더 중시하고, 그 관념을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失觀念 後事物의 방식을 취할 때, 관념(언어)과 사물과의 일치여부, 적합여부를 분석하는 기준은 사물이 아니라 관념 쪽에 있다고 하겠다. 즉, 진리로 정립된 관념을 얼마만큼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그 기준을 둔다.


앞에 든 김현승의 작품을,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조금 살펴보자. "나의 희망, 어두운 땅속에 묻히면 / 黃金이 되어(「희망」)"라는 대목은 어떤가? 자기의 희망이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땅속에 묻혀 있으면 도리어 고귀하고 아름다운 '黃金'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즉, 내가 추구하는 '희망'이 실현될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과연 '황금'과 같은 물질(상징)이 되고, '돌'이나 '마른 나뭇가지' 같은 다른 사물은 될 수 없을까. 즉, 관념(내 희망)과 사물(황금)이 일치된 상태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 다음에는 "너의 희망 / 캄캄한 하늘에 갇히면 / 별이 되어"(「희망」)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관념(희망)과 사물(별)과의 일치여부가 문제로 제기된다. 즉 '별'만 되고 '달'이나 '태양'이나 '무지개' 같은 다른 사물은 될 수 없는가. 또, 나의 희망의 경우에는 '황금'과 결부되는데, 너의 희망의 경우에는 '별'과 결부되는 까닭, 그리고 황금과 별의 차이는 무엇인가 ― 이런 의문도 제기된다.(이러한 의문 제기는 부질 없는 것일까).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김현승, 「堅固한 고독」에서


'견고한 고독'은 이 시인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개인 레벨을 초월하려고 하는 의도도 엿보인다. '고독'이라는 인간조건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삶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 더 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독을 혐오하거나 기피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며 확고부동한 자세로서 수용하고 고수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견고한 고독」이라는 제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껍질을 더 벗길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깡마른 흰 얼굴은, 작자를 접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작자의 실제 몰골을 연상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한 것이다. 일종의 고독 나르시시즘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작자는 고독을 사랑하고, 그러한 고독의 여러 양상 중에서도 '견고한 고독'을 특히 중시하고 강조하는 그런 인생태도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견고한 고독이란 어떤 고독일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의문에서, 작자는 삶의 어떠한 불리하고 부정적인 조건에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고독'의 고수야말로 '진실한 삶'이라는 의지를 정립한 것이다. 아마 그러한 고독의 관념은 양심이나 정의와 연결되어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관념(견고한 고독)을 구체적•감각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는 사물로서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 단단하게 마른 / 흰 얼굴"을 연결시킨 것이다. 문제는 견고한 고독을 구체적•감각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는, 더욱 더 적합한 다른 사물은 없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제기된다. 껍질을 더 벗길 수 없는,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만이 견고한 고독과 완전히 일치하고, 이를테면 '바위'나 '마른 논바닥'이나 '양철' 같은 사물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어쨌든, 이 경우 판단의 기준은 신념화된 '견고한 고독'이라는 관념 쪽에 있다고 하겠다.



4


시쓰기의 또 다른 중요한 하나의 방향이 있는 것 같다.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는 방향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한 만물에 이름을 지어준 이후, 수많은 시인들의 명명행위는 되풀이되고 있는데, 사물이란 되풀이되는 그런 명명행위의 축적으로 가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언어에 의하여 왜곡되거나 오염되어 진실한 모습이 은폐되거나 훼손되어 있다. 그러한 선행관념은 모두 인공적 가설(?)이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시쓰기에 있어서, 그러한 선행관념의 부정은 물론이요, 사물의 체험에 앞서서 먼저 관념을 설정하는 일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직접 체험하여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를 지향하려고 한다. 그런 태도가 사물이나 세계의 진리나 진실을 추구하는 기본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물을 가리고 있는 누적된 언어적 인공물을 제거할 수 있는가, 또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언어 이전의 사물을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사물과 언어(또는 세계와 언어)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2분법 사고의 소산이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언어는 사물이다"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 자연의 風景은 자연과 문화의 교환관계에 의한 매개적•이중적 장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논란은 언어의 의미기능, 언어구조, 언어의 언급성(referentiality) 등의 문제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어서, 여기서 꼬치꼬치 따질 계제가 아니다.


언어를 거두어 낸 뒤의 사물, 또는 언어 이전의 사물의 세계라는 것이 있을까. 시쓰기에 있어서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진실, 진리의 세계이고, 그것은 일단 있는 그대로 사물의 참된 실재를 추구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플라톤이 이데아와 가상<假像>을 구별하고, 칸트가 물자체와 현상을 구별하는 식의 이론에 대한 왈가왈부는 일단 젖혀두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구약성서』 창세기 2장 19-20


시인이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체험하는, 아담이 사물에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하여 사물(피조물)을 보고 듣고 체험한 행위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물창조(창조설을 믿든 안믿는 별문제로 하고 일단 창세기의 창조설을 상징적 의미로 수용한다)와 아담의 명명행위에 대한 창세기 이야기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신의 창조 이후 아담의 이름 지어주기까지 사이로 '이름이 없었던 사물세계'(무명의 사물세계)요, 다른 하나는 아담의 '이름지어주기'(명명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 문제부터 보기로 하자. 엿새 동안의 창조행위가 끝나고, 며칠 뒤에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성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이 문제는, 신의 창조 이후 아담의 명명 이전의 기간을 이름이 없었던 사물세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어쨌든, 신의 창조행위가 완료한 직후의 하루만에 아담의 명명행위가 끝났다고 가정하자(하루만에 모든 사물의 명명행위가 다 끝났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엿새 다음은 일요일이니까 하루는 휴식한 셈이고, 월요일부터 아담의 이름지어주기가 시작되었으므로, 전주의 첫째날(월요일)에 창조한 사물(빛과 어둠, 낮과 밤)은 7일간이나 이름이 없는 상태로 있은 셈이고, 둘째날(화요일)에 창조한 사물(궁창 즉 하늘,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은 6일간, 셋째날(수요일)에 창조한 사물(뭍, 바다, 풀, 채소, 과목 등)은 5일간, 넷째날에 창조한 사물(궁창의 광명, 사시와 일자와 연한, 해, 달, 별)은 4일간, 다섯째날에 창조한 사물(물고기류, 조류 등)은 3일간, 여섯째날에 창조한 사물(땅의 생물 즉 짐승, 육축, 기는 모든 동물 등)은 2일간으로 각기 이름이 없는 사물 그대로의 세계로 있었던 셈이 된다. 즉 언어 이전의 사물, 또는 언어라는 의상을 완전히 벗어버린 적나라한 사물로서,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문제를 보기로 하자. 아담의 이름지어주기에 대해서, 성서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세기, 2장 19절)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이 없다. 아담의 명명행위의 현장에는 명명행위의 근원인(이름을 지어 부르도록 지시한 주체) 여호와가 보고 있었고, 여호와신이 보는 앞에서 이름을 어떻게 짓는가 하는 '명명방법'은 아담에게 일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명방법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신의 명령(지시), 신의 피조물에 대한 이름짓기, 신이 만든 인류 최초의 인간에 의한 이름지어 부르기라는 점에서, 적어도 神聖性과 神話性 및 창조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어떤 관념이나 언어도 없었으므로,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다만 신 또는 창조라는 우주적 질서와의 동화 내지 일체가 된, 主客 미분의, 그리고 사물(피조물)에 대한 신성한 외경감 같은 순수직관에 의해 이름이 지어지고 불리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관념을 설정하고 사물의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직접적, 구체적 체험에서의 명명행위였으리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5


이제, 鄭芝溶의 작품을 통하여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는 시쓰기의 한 방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정지용, 「春雪」에서


정지용의 「春雪」의 첫연인데, 그 다음에 "우수절 들어…"라는 말이 계속된다. '우수'는 입춘과 경칩의 사이에 있고, 양력으로 2월 18일 무렵이다. 2월이면 아직도 겨울철이므로, 이 때에 내린 눈을 '춘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러나 달력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춘설'이라는 그때의 실제 계절감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겨울이 거의 다 끝난 계절이라, 눈이 내리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절기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자, 그 찰나 뜻밖에도 밤새 춘설이 하얗게 덮인 먼 산봉우리가 이마에 선뜻 와 닿아 매우 차다(寒)는 것이다.('차게 느껴진다'가 아니라 바로 '차다'이다.) 단지 이것뿐이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문 열자"와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사이에는 단절이나 연장(延長)이 없는 찰나의 감각경험 뿐이다. 즉 동작(문 여는 것)과 풍경 및 감각(먼 산이 이마에 차라)이 연속되어, 미처 다른 생각(관념이나 사상)이 끼어 들어갈 틈이나 여유가 없다. 그래서, 어떤 동작이나 사태의 찰나적 신속성을 나타내는 부사 '선뜻'이 알맞게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 열자"는 이른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는 동작이고, 그 찰나 간밤에 모르게 내려서 하얗게 덮인 먼 산봉우리의 봄눈이 선뜻 이마에 와 닿는 찬(寒) 감각, 그 찬 느낌이 가득 차는(滿) 촉감은, 그 자체 어떤 인생론이나 자연철학 같은 관념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개념에 의한 조직이나 구성 같은 인위적 加工도 배제된 순간의 감각적 체험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 산봉우리에 내린 봄눈의 감각과, 작자인 시인이 느끼는 감각을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로 분리하여 구별할 수 있을까. 간밤에 내려서 덮인 산봉우리의 봄눈이 내게 차게 느껴지고, 차게 느껴지는 그 감각을 사유(思惟)하는 과정을 거쳐서 인식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산봉우리의 봄눈을 객체나 대상으로 보지 않을 뿐만아니라, 그것이 이마에 선뜻 와 닿는 찰나의 감촉을 주관적 사유에 의한 인식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대상'과 '나' 사이에 티끌만큼의 간격이나 틈이 없다. 사물과 체험, 대상과 인식 사이의 분열이나 거리가 없다는 것은 主客未分의 상태, 언어 이전의 세계라고 할 수 없을까. 이러한 경지에서 시는 생명, 사물, 진실 그 자체의 참된 실재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몇 대목 더 실례를 들어보자.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정지용 , 「달」에서


프로펠러 소리

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갔다

―정지용, 「아침」에서


담장이

물 들고


다람쥐 꼬리

숱이 짙다

―정지용, 「毘盧峯」에서


앞에 든 「달」 「아침」 「毘盧峯」 등은 모두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의 직접적•감각적 체험을 그대로 드러낸 것들이다. 뜨인 눈에 하나로 영창에 가득 차버리는 달빛, 선연(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간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 물이 든 담장이, 숱이 짙은 다람쥐의 꼬리 ― 이러한 순간적•찰나적 감각체험 속에는 어떠한 사유도 분석도 판단도 끼어 들 틈이 없다. 이러한 감각체험에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든지, "그렇게 느꼈다"든지, 그러한 체험 후의 관념 활동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지 않고, 또 "나는 이러저러한 인생관, 세계관을 가리고 사물을 본다"와 같은 관념의 선행활동도 없는 것이다. 만약에 사물의 찰나적 체험 전이나 후에 그러한 관념활동이 추가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사물의 실재를 대상이나 객관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대상이나 객관을 의식하는 '나'나 '주관'과의 대립•대응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 타자와 자기의 분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든 정지용의 사물체험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분석해 낼 수 없다고 본다. 즉, 주객미분의 상태, 知情意 미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언어 이전, 관념 이전, 주객분열 이전의 사물의 실재 그 현장 ― 이것이 정지용이 지향했던 시의 원점이고, 또 출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관념으로 시를 쓰지 않고 '사물'로 시를 썼다. 정지용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해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 쟁론하고 좌단할 수는 있으나 정확한 견해는 논설 이전에서 이미 타당과 和協하고 있었던 것이요, 진리의 보루에 의거되었던 것이 오……"(「시의 옹호」). 사물에 대한 "정확한 견해"는,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여 체험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논설 이전에서"는 기존의 퇴적된 언어 이전, 관념 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지용의 말은, (1) 관념을 먼저 설정한 뒤에 사물을 끌어다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참된 실재를 감각적으로 직접 체험하는 사물주의, (2) 기존의 언어를 완전히 벗어버린 뒤의 발가벗은 사물 그 자체, (3) 주객미분의 사물세계 즉 사유나 사고나 분석이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찰나적 체험 ― 이러한 특징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정지용이 지향한 적나라한 사물과 그 현장이 그의 시의 원점이며 출발점이라면, 우리는 이 점을 매우 중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토포스는 모든 것이 자유스러운, 즉 어떤 기존관념이나 기존 언어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고, 따라서 창조행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관념을 거치지 않는다든지, 선행 관념을 설정하지 않는다든지, 또 누적된 기존 언어에서 벗어난다는 등의 말을 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념•사고•분석•판단 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주객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다. 이 점을 곡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로(zero) 지점과 같은 원점, 또는 출발점 즉 사물 자체의 참된 실재와 그 현장의 직접적•감각적 체험을 통해서, 그 체험을 수용하여 그 속에서 다시 관념이나 사고나 주객(主客)이 발생하는 과정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물의 참된 실재, 그 자유로운 원점의 체험이 없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을 추종한다든지, "나는 낭만주의자다, 근대주의자다, 모더니스트다"라고 하는 것은, 스타트 라인에까지 가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경주에 참가하는 반칙행위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 한국영역시 감상 >>



詩는 술이다/정공채 시/고창수 역



詩를 읽는 동안에

나직이 따뤄지는

흰빛

술의 盞의 가득함.


詩를 읽고 있는 동안에

오고 있는

따사로운 불빛의 가득한 點燈.


詩를 읽고 있는 동안

가버렸던

馬車의 삐걱대는 바퀴가

싣고 오는 가을.


시끄럽지 않은

밤의

저 푸른 별의 얼굴.

잊어버린

都市의 밤하늘!

이 모두가 詩를 읽고 있는 동안에

조용한 혼자의 술.

희디흰 혼자의 술.


Poetry Is Wine / Gong-chae Jung


Translated by Chang-soo Ko

While I read poetry,

The wine glass fills to the brim.

Glittering wine pouring calmly


While I read poetry,

The lantern is lit fully.

Warm brillinance

Approaching


While I read poetry,

The creaking wheels of the erstwhile carriage

Fetching the autumn.


The face of the blue star

Of night

All quiet.

The night sky of

The forgotten city!

All this

While I read poetry.

The serene wine of solitude

The glittering wine of solitude



<< 일본의 앤솔로지 >>



1


도쿄의 명문 출판사 土曜美術社(도요비쥬스샤, 東京都新宿區西早稻田 3-31-8, (03)5285-0730)는 월간 시종합지 『시와 사상』을 내면서, 매년 연말에 연간 앤솔로지 『詩と思想 詩人集』을 내고 있다. 2001년도판 앤솔로지는 구랍 25일에 나왔다. 실무 편집은 시인 森田進(모리다 스즈무)씨, 감수는 시인 小海永二(고카이 에이지)씨가 맡고 있다. 일본 전국 및 해외(한국, 대만 등)에서 265명의 시인을 정선하여, 1인당 1페이지씩 배당하여 최근의 신작을 실었다.


『詩と思想』(시와 사상)은 시와 인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운동체로서 키워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편집인 모리다 스즈무 시인은, 후기에서 이 앤솔로지에 대하여 모두 신작 발표라는 점, 1편 1편의 음미에서 시의 교향(交響)이 자아내는 포에지 세계의 깊이에 압도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다음 대목은 작년(2001)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폭격이라는 충격적 사태와 관련되는 이 앤솔로지의 의미에 대한 언급이어서 주목된다. "21세기의 모두를 장식하는 해이지만, 지구는 지금 국제 테러리즘을 둘러싸고 소연해 있다. 21세기 최초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어둔 여명의 크리스마스에, 앤솔로지가 간행되었다. 테러 이전에 씌어진 작품으로부터 시대의 변화가 어떻게 보이는가. 예언자로서의 시인의 언어의 힘을 찾아낼 수 있을지의 여부, 이것도 이 앤솔로지에 접근하는 하나의 길이다." 물론, 이 앤솔로지가 단행본으로서 출판된 것이 9.11테러 이후이지만,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테러 이전에 씌어진 것임이 틀림없지만, 이 세계적 사건에 대한 어떤 예언적 암시도 있을 것이다. 또 9.11테러의 충격이 '문학에 대한 충격'도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이 앤솔로지는 265명의 시인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음은 앞에서 말했다. "선택된 265명에 의한 21세기 최초의 현대시 산맥 『시와 사상』 운동이 내놓은 일곱번째 앤솔로지"라는, 이 책 띠의 케치프레이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전국의 역량 있는 시인들의 수준급 작품집이다. 한국 시인으로서는 具常(구상), 趙炳華(조병화), 文德守(문덕수), 金光林(김광림) 시인들이 수록되어 있고, 대만 시인으로는 陳千武(진천무) 시인의 이름이 보인다. 이 앤솔로지가 '국제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아시아는 물론 유럽 쪽을 향하여도 문호를 계속 더 열어 놓아야 할 것으로 된다.


일본 시인으로는 齋藤(사이토 마모루), 伊藤桂一(이토 케이이치), 小海永二(고카이 에이지), 新川和江(신카와 카즈에), 秋谷豊(아키야 유라카), 高橋喜久晴(타카하시 키쿠하라), 原子修(하라코 슈), 森田進(모리다 스즈무), 一色眞理(잇쇼쿠 마리), 河邨文一郞(카와무라 분이치로), 片岡文雄(카타오카 후미오) 시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은 한국에서도 이미 알려져 있지만, 일본 시단에서도 비중이 무거운 시인들이다.


수록 시인 중에는 알송달송한 이름도 없지 않다. 가령 '李美子'라는 시인도 보이는데, 당대 한국의 최고의 인기가수인 李美子(이미자)씨와는 물론 동명이인이다.

李美子시의 「우리 읍내」(わが町)라는 작품에 "북으로 돌아간 클라스메이트로부터/30년만의 연하장"이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혹시 '북'이 '북한'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趙南哲'이라는 시인도 보이는데, 이미 작고한 한국 바둑계의 국수(國手, 9단)인 趙南哲(조남철)씨와는 역시 동명이인일 것이다.


チョソンサラムの音からのやいかたなんやからな

アボジもオモニも ハラボジもハルモニも

ご先祖さまはみんなそうやってきたんやからな

(조선인은 옛부터 하는 버릇인기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선조 대대로 모두 그렇게 해왔던게야)


「靈魂」이라는 시의 제1연인데, 카타카나로 '조선사람'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등의 한국어가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趙南哲은 한국계(혹은 조총련계?)임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영혼이 되어도 현해탄(玄海灘)은 멀구나"와 같은 대목이 보이고, 흔히 일정시에 한국의 헐벗은 산을 보고 '하게야마'(禿山, 독산)라고 했거니와, 그런 단어도 발견된다. 문제는 시의 질, 시의 수준에 있는 것이지, 한반도와의 관련성 같은 것은 문제가 안된다.


지역의 경우, 일본 국내 출신지역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 점은, 편집후기에서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시작업을 하고 있는 시인에 대한 평가"라는 취지와 부합된다. 홋카이도나 오키나와 같은 먼 곳에 있어도 작품이 좋으면 수록되어야 마땅하다. 시와 시단의 폐쇄성은 문화창조의 편협성으로 직결된다.


연령이나 세대면에서도 이 앤솔로지는 열려 있다. 가령 美濃千鶴(미노 치쓰루) 시인은 32세(1970년 생)이므로 30대로 볼 수 있고, 山本耕一郞(야마모토 고이치로) 시인은 95세이다.(千鶴이라는 이름은 한국시인 權千鶴과 이름이 같다.) 그런데, 港敦子(미나도 아스코)씨는 1971년이므로 미노 치쓰루씨보다 1살이 더 젊다. 이와 같이, 연령도 30대에서부터 90대에 이르기까지 고루 열려 있고, 특히 90대를 넘었는데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내가 죽거든

―친구들에게

小海永二(고카이 에이지)


내가 죽거든

너희들 잡지에

얇은 추도시집을 엮어달라


그것이 소수의 독자에게 건너가

그들이 그것을 다 읽거든

꼭 그걸 모아 불태워주지 않겠는가


불태운 재를 바람에 날려

하늘에 뿌려다오

내가 벗들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도록


이윽고 기억도 희미해져

사라지겠지

그때 나는 완전한 무(無)가 되겠지.


한 사나이가 살았다는 자취마저

완전히 없어질 때

그 때 내 시는 완성되고

空無의 격조가 울리게 되겠지

노래의 향기만이 세계를 떠다니겠지



立冬(입동)

―시사이드 남아타미(南熱海)

新川和江(신카와 카즈에)


강풍이 불어

사가미만(相模灣)1) 가득히 흰 물결 일어

난바다로 난바다

로 달려가고 있다


저같이

일심으로 돌아갈 곳이 내게도

있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바라본다

수프 한 접시만의 조반 후의 한때


막 얼어나자

동쪽 바다의 하쓰시마(初島)2)에 겨우 닿을듯

또렷이 보이던 또 다른 섬그림자는

朝刊을 펼쳐본 뒤의 지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역시 그 섬에도

이쪽을 뚫어지게 보는 사람이 있어

"아버지 건물은 하나뿐이예요

안경이 맞지 않아요"

가족에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인쇄 미스처럼 엇갈려 서 있는 고층집단 주택을


그 눈으로 포착하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있는 10층의 이 창은

어쩌면 환영(幻影)의 건물 쪽에 있어

이미 눈으로부터 사라져 바렸다?


물결이

라고 생각하면

해면에 닿을 듯 스쳐 날아가는 갈매기

갈매기가

라고 생각하면

난바다로 난바다로 서두르는 파도


※1) 사가이만(相模灣) :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한 만(灣).

※2) 하쓰시마(初島) : 일본 시즈오카현(靜岡縣) 아타미시(熱海市)에 속하는 섬. 해상 10㎞ 지점에 위치함.



비둘기(雉鳩)에 대하여

伊藤桂一(이토 게이이치)


雉鳩는 언제나 두 마리 한쌍으로 나뭇가지에 머문다

한쪽이 죽으면 남은 쪽이 그날부터 다른 짝을 찾아 운다

만날 때까지 계속 운다 열심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깊은 마음의 울음 한결같은 애처로움

이윽고 새로운 짝을 데불고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는다

죽은 한쪽이 수컷이든 암컷이든 울음소리도 구애도 변함이 없다

따라서 치구는 항상 한 마리가 아니다

두 마리가 한 마리이다


<雉鳩처럼 울 수 있으면 좋겠네

너의 대신을 찾아서

네가 그 대리에 옮아서

원래대로 나란히 가지에 머물러>―라고 亡妻(망처)의 유영(遺影)에게 말하면서 線香(선향)에 불을 붙인다


(물론 雉鳩의 생태에 대해선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 조류도감의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지만)

석가모니 탄생의 전야

―한국의 절에서

森田 進(모리다 스즈무)


캄캄한 山頂에

붉은 달이 머물러

더욱 빨갛게 응고된다


中腹(중복)의 암자에선

壯年(장년)의 승려가

격렬하게 송경(誦經)을 계속하고

어둠은 더욱 짙어간다


난세를 구하려는 의지

활활 불타고

승려는 화염 속에 몸을 내던져 사라졌다


이윽고

誦經(송경)이 목어(木魚)를 두드리자

붉은 달이 다가와서

암자를 품어 안았다


날이 새자

음력 4월 초파일이었다




<< 신인우수작품상 >>



캡슐 속의 언어외 3편

이윤옥


1

사람들은 아무도 조업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다만 철 이른 망초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졸음에 겨운 어부의 안경너머 도수 높은 파도가 출렁거렸다 지도에도 없는 외로운 부표처럼 선착장 건물이 멍하니 서 있었다 혼자 떠나고 싶은 청진호는 가까스로 폐쇄된 길을 흔들었다 또다시 이음새가 느슨한 바람이 허리끈을 푸는 정오의 부두를 끌고 갔다 이미 선적된 하늘은 엷은 안개를 띄우며 세상이 눈을 뜨는 시간마다 흐린 풍경을 퍼다 날랐다 작은 불빛들은 지구에서 가장 먼 변두리로 사라졌다


2

어부들은 섬 근처에 아무도 가지 않았다 수척한 마을마다 산달 가까운 물살이 모여들고 물 속 깊숙이 노을을 빠트린 하늘은 자꾸 눈이 멀어갔다 얼룩진 바다의 무늬가 차츰 흐려지면 사내들은 그 해 가장 따뜻한 가슴을 열었다 간혹 저무는 불빛들이 힘없는 손짓을 내저었다 이미 난파된 길은 점화할 수 없었다


3

곧 어둠이 바다를 덮쳤다 가끔 하얀 띠를 두른 파도가 왔다 가고 작은 뱃길은 문을 닫았다 여린 새들은 해묵은 마을을 찾아가고 누이의 역마살을 태운 향유고래의 울음이 먼 바다에서 들려왔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은 섬들은 하늘만큼의 눈높이를 채우고 식구들은 잠시 어둠을 지폈다 수면위에 새겨둔 고깃떼의 문신이 커질수록 그 해의 파도는 몸이 무거웠다 꿈을 정박시킨 포구의 아이들은 온기가 새어나간 골목에선 병정놀이를 하지 않았다 억새가 지저귀는 산비탈로 헛발치며 내려온 달은 당산나무의 잘록한 허리를 밤새 쓸어안았다

박쥐를 찾아서

날이 저물자 나는 섬이 되었다

치마끈을 걷어 올린 불빛들은

삐걱이는 추억을 끌고 나오고

새 꿈을 꾸는 사람들 내게 잔을 바쳤다

나는 밤새 취기를 난발하며

잠시 허튼 슬픔을 풀어 헤쳤다

아버지의 유서는 유령처럼 날아다니고

내 영혼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먹구름이 잠겨 있는 글자마다

겨울은 슬픈 나무로 서 있었다

내겐 기절해 버린 시간이 깨어나고

새벽에는 자주 눈이 내렸다

뜬소문이 길을 내는 겨울 한가운데로

떠도는 곡마단이 잠든 마을을 깨웠다

첫눈은 능선을 타내려 오고

외줄에 걸린 늙은 여자의 몸짓이 젖고 있었다

이른 달이 진통을 시작하자

난쟁이의 공중 곡예는 검은 잎을 날렸다


낯선 불빛이 웅성거렸다

흩날리는 은행잎들은 가을의 임종을 알리고

텅 빈 가지마다 달빛 한올씩 휘날렸다

느린 수레의 바퀴들은 어두운 기를 굴리며

문을 닫는 간판들이 작은 눈을 깜박거렸다

젊은 마네킹의 여름원피스는

한번도 색상이 바랜 단추를 풀지 않았다

골목을 뛰쳐나온 길들이 캄캄한 절벽으로 뛰어들고

추위가 끓어오르는 경마장엔

야생의 말들이 밤새 흐느껴 울었다

자갈치의 비

자주 빗줄기에 쌓인 상점들은 회색 창문을 내걸었다

흐린 가로수 사이로 캄캄한 비의 벽을 뚫고 나오는 사람들

힘센 불빛이 넘나드는 방파제엔 가지 않았다

한 벌의 눅눅한 수의를 갈아입은 밀물은

조금씩 몽유병을 앓았다

가끔 심야버스를 타고 대교너머 발길을 옮기면

늦도록 별들의 잠꼬대가 들렸다

청동빛 물살은 허공에 그물을 쳤다

공룡의 발자국 엎드린 해안선따라

숱한 물의 길을 열었다

검은 하늘 헤매던 등대

며칠째 푸른 소인이 찍힌 꿈을 갑판위에 내려놓았다

고물에 잠겨 있는 탐조등이 돌아오면

여자들은 야윈 저녁 연기를 하늘 끝에 꽂았다

선창은 어둠이 차 오르는 배편을 기다리며

늘 항해 저지선 근처에 떠 있었다


때로 바다는 실어증에 시달렸다

뜨내기 물살들이 어스럼을 지고 올 시간

아낙들은 하루분의 허무를 캐고 있었다

먼 바다로 간 바람의 안부가 그리워지고

몸 저린 나무들은 흐린 안개를 목에 걸렸다

인적이 끊어진 마을마다 슬픈 파도가 달려오고

겨우 구름 한 자락 쓸어올리는 동안

길은 더욱 바다쪽으로 쏟아졌다



남쿠릴 열도

장혜실


1

사람들은 아무도 조업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다만 철 이른 망초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졸음에 겨운 어부의 안경너머 도수 높은 파도가 출렁거렸다 지도에도 없는 외로운 부표처럼 선착장 건물이 멍하니 서 있었다 혼자 떠나고 싶은 청진호는 가까스로 폐쇄된 길을 흔들었다 또다시 이음새가 느슨한 바람이 허리끈을 푸는 정오의 부두를 끌고 갔다 이미 선적된 하늘은 엷은 안개를 띄우며 세상이 눈을 뜨는 시간마다 흐린 풍경을 퍼다 날랐다 작은 불빛들은 지구에서 가장 먼 변두리로 사라졌다


2

어부들은 섬 근처에 아무도 가지 않았다 수척한 마을마다 산달 가까운 물살이 모여들고 물 속 깊숙이 노을을 빠트린 하늘은 자꾸 눈이 멀어갔다 얼룩진 바다의 무늬가 차츰 흐려지면 사내들은 그 해 가장 따뜻한 가슴을 열었다 간혹 저무는 불빛들이 힘없는 손짓을 내저었다 이미 난파된 길은 점화할 수 없었다


3

곧 어둠이 바다를 덮쳤다 가끔 하얀 띠를 두른 파도가 왔다 가고 작은 뱃길은 문을 닫았다 여린 새들은 해묵은 마을을 찾아가고 누이의 역마살을 태운 향유고래의 울음이 먼 바다에서 들려왔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은 섬들은 하늘만큼의 눈높이를 채우고 식구들은 잠시 어둠을 지폈다 수면위에 새겨둔 고깃떼의 문신이 커질수록 그 해의 파도는 몸이 무거웠다 꿈을 정박시킨 포구의 아이들은 온기가 새어나간 골목에선 병정놀이를 하지 않았다 억새가 지저귀는 산비탈로 헛발치며 내려온 달은 당산나무의 잘록한 허리를 밤새 쓸어안았다

박쥐를 찾아서

날이 저물자 나는 섬이 되었다

치마끈을 걷어 올린 불빛들은

삐걱이는 추억을 끌고 나오고

새 꿈을 꾸는 사람들 내게 잔을 바쳤다

나는 밤새 취기를 난발하며

잠시 허튼 슬픔을 풀어 헤쳤다

아버지의 유서는 유령처럼 날아다니고

내 영혼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먹구름이 잠겨 있는 글자마다

겨울은 슬픈 나무로 서 있었다

내겐 기절해 버린 시간이 깨어나고

새벽에는 자주 눈이 내렸다

뜬소문이 길을 내는 겨울 한가운데로

떠도는 곡마단이 잠든 마을을 깨웠다

첫눈은 능선을 타내려 오고

외줄에 걸린 늙은 여자의 몸짓이 젖고 있었다

이른 달이 진통을 시작하자

난쟁이의 공중 곡예는 검은 잎을 날렸다


낯선 불빛이 웅성거렸다

흩날리는 은행잎들은 가을의 임종을 알리고

텅 빈 가지마다 달빛 한올씩 휘날렸다

느린 수레의 바퀴들은 어두운 기를 굴리며

문을 닫는 간판들이 작은 눈을 깜박거렸다

젊은 마네킹의 여름원피스는

한번도 색상이 바랜 단추를 풀지 않았다

골목을 뛰쳐나온 길들이 캄캄한 절벽으로 뛰어들고

추위가 끓어오르는 경마장엔

야생의 말들이 밤새 흐느껴 울었다

자갈치의 비

자주 빗줄기에 쌓인 상점들은 회색 창문을 내걸었다

흐린 가로수 사이로 캄캄한 비의 벽을 뚫고 나오는 사람들

힘센 불빛이 넘나드는 방파제엔 가지 않았다

한 벌의 눅눅한 수의를 갈아입은 밀물은

조금씩 몽유병을 앓았다

가끔 심야버스를 타고 대교너머 발길을 옮기면

늦도록 별들의 잠꼬대가 들렸다

청동빛 물살은 허공에 그물을 쳤다

공룡의 발자국 엎드린 해안선따라

숱한 물의 길을 열었다

검은 하늘 헤매던 등대

며칠째 푸른 소인이 찍힌 꿈을 갑판위에 내려놓았다

고물에 잠겨 있는 탐조등이 돌아오면

여자들은 야윈 저녁 연기를 하늘 끝에 꽂았다

선창은 어둠이 차 오르는 배편을 기다리며

늘 항해 저지선 근처에 떠 있었다


때로 바다는 실어증에 시달렸다

뜨내기 물살들이 어스럼을 지고 올 시간

아낙들은 하루분의 허무를 캐고 있었다

먼 바다로 간 바람의 안부가 그리워지고

몸 저린 나무들은 흐린 안개를 목에 걸렸다

인적이 끊어진 마을마다 슬픈 파도가 달려오고

겨우 구름 한 자락 쓸어올리는 동안

길은 더욱 바다쪽으로 쏟아졌다




<< 이 시인 >>




농부와 어부

최연홍


농부는

봄이 오면

땅 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 오면

추수를 하지만


어부는

씨도 뿌리지 않고

물고기를 낚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바다

달나라에서 보면

지구는

아름다운 바다와

파도가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 뿐이다


누가 구름을 만들고

비를 만들고

농부와 어부를

아름다운 세상에

살게 하는가


오, 하느님


바다 •2

바다가 없으면

고래도 없고

고래가 없으면

사람도 없다


바다가 있어서

우리는 푸른 파도를

사랑하게 되었다


바다 •3

바다 속에는

2만종의 물고기들이

산호, 식물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습니다


바다 위에는

거함(巨艦)을 침몰시키는

폭풍이 그의 폭력을

때때로 자랑합니다


그러나

조그만 물고기들은

폭풍의 위력을 무시하고

유유히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모두 수장(水葬)되고 맙니다만)


바닷가에서 •1

갈매기들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파도는

그 발자국을

깨끗하게 지운다


파도가 밀려오면

갈매기들은

하늘로 떠오르며

파도를 응시한다


고층 호텔 베란다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파도를 모른다


10년 후

파도는

바닷가의

모든 건물들을

모두 지워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갈매기들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에


안개가 걷히고 나면

갈매기들이 날기 시작합니다

바다가 싫어서

강안에까지 날라온 갈매기들은

끼룩끼룩 울지 않아요

조용히 수면 위로 날다가

물 위에 앉아요


물 위에 떨어지는 햇살을

먹고 사나요

파도가 싫어

강안으로 올라온 갈매기들은

눈부신 햇살을 사랑하나 봐요


해가 질 때는

물빛은 금빛이 됩니다

몇만 톤의 금괴가

강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어느 해적이 여기까지 와서

금을 숨겨두었을까요


어둠이 짙어지면

달빛, 별빛

떨어져

강의 수면에

흑진주가 자라는 것이 보입니다


갈매기도

어둠 속으로 숨고

사람들은

꿈 속으로 잠듭니다

그리고

안개가

수면을 감추어 버립니다


귀향기 •3

아침 추억의 옹달샘에 가

조롱박으로 약수 한 잔 떠 마시면

우리는 30년 젊어진다.


오후 덕수궁 담을 돌아 나오면

30년 세월이 군중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리고 흰 머리칼이 가을바람에 차다.


저녁 우리들의 추억은

30년 동안 따지 않은 비장의 포도주 되어

우리를 취하게 한다.


아무도 그가 지난 30년

어디에서

어떻게 잠들었는지 묻지 않는다.


잠든 백설공주의 입술에

입 맞추는 왕자는 외계로부터

비행접시를 타고 왔나니.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었다가

다시 거대도시가 된

세월은 종착역에서 무심할 뿐이네그려.


수묵화 •1

안개비가 내리는 숲지대를 지나며

연인들은 수묵화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저녁 마을 불빛이 하나, 둘 켜지고


연인들은

안개비 속을

얼마나 더 지나야

섬의 따뜻한 방에서

잠들 수 있을까요.

은은한 숲 지대에 내리는

안개비 속에서

그들은 수묵화같은 사랑에 젖고 있네요


수묵화 •2

먹물이 한지에 번지고 있어요

보드랍게 껴안는

연인들이

수묵화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포토맥강

1

아팔라치아 산맥의 옹달샘으로부터 출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깨끗한 물이

다른 물들과 몸을 섞으며 강을 만들고 강폭을 넓힌다.

농부에게 비옥한 토지를 만들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만들고

시민들이 마실 물을 공급한다.

바닷물의 소금기가 거기까지 와 있고

사람들은 조지타운으로부터 배를 타고

만으로, 바다로 나간다.

조지 워싱턴의 집을 지나

그때부터 강은 굽이굽이 돌아가며

끝이 안 보이게 펼쳐진다

강이 끝나면 췌사픽 만이 나오고

(미국 어족의 보고(寶庫)가 거기 있다)

대서양이 나온다


2

그러나 강물은 현대의 병을 앓기 시작했으며

기형어를 낳기도 했다. 인간의 쓰레기는 독성(毒性)이었다.

물고기들이 노는 강가의 풀들은 산소 부족으로 죽어갔고,

물고기들을 죽이는 독초(毒草)가 커갔다.

사람들은 다시 아름다운 자연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죽은 강을 살리기 위해 독성의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고,

세계적인 폐수처리장을 세웠다.

줄무늬가 있는 농어를 5년동안 낚시질 못하게 했다.

강과 만을 살리려 노력했다.


3

그후 강물엔 풀들이 자라고 건강한 물고기들이 살아나고

연인들은 강변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아, 아름다운 만남과 우정의 강

강은 우리들의 사랑을 싣고 바다로 간다.


하와이 •1

바다가 거울 속에 들어와 있고

하얀 비둘기가 베란다 위에

올라와 있네


내 방은 11층에 있었습니다.


하와이 •2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싶네

여자의 속옷을 벗기고 싶네

파도를 타고 싶네


발가벗은 것이 부끄럽지 않아

바다와 섬이 천진한 아이들 같아

여자들은 파도를 손짓하고

야자나무 잎은 바람에 갈라지고 있어


하와이가 파도를 타고 있어

어, 세계가 파도를 타고 있어


파도가 씻어낸 비너스,

바다 밑에서 올라온 비너스가 아름다워

아니야, 고혹적이야

정말 고혹적이야

여기 꽃처럼




아고라

지역감정, 그 아나크로니즘



문덕수


차량들이 얽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출근길 네거리에서, 기다리다 못해 짜증이 난 한 택시기사가 클랙슨을 몇 번 울려도 기척이 없자, 앞차를 보고 "뭘 하는 거냐. 오른쪽으로 좀 빼지 않고, 제기랄……"하고 격한 역정을 낸다. 시간에 쫓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택시 기사뿐만 아니라 서울시민 아니, 지구 위의 인류 전체가 지금 이 택시 기사와 마찬가지로 분초를 다투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던 9.11테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폭격 현장을 TV영상을 통해서 동시에 보면서, 우리는 뉴욕과 서울, 아프가니스탄과 한국 사이의 먼 공간적 거리가 소멸되었음을 실감한다. 휴대전화, TV, PC 등 현대의 첨단 전자무기에 의하여, 시간의 공간정복 현상을 매일 체험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글로벌리제이션이 구축하는 '월드 시티'의 새로운 시민으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공간을 죽이고 있다"든지, "시간이 공간을 무차별로 공격하고 정복하는 상황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말도 이제는 예사로 들린다. 그만큼 우리 자신의 의식도 '시간화'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세기의 90년대 이후 글로벌리제이션이 가속화하면서, '지구촌'이라는 말의 유행이 암시하듯이 이제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 모든 도시, 심지어 국경도 허물어지면서 하나의 '세계도시'로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도시로 축소되고 있는 것은 공간적 압축현상이라기보다는 '시간의 공간정복'이라고 함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공간에 대한 시간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공간은 이동, 변화, 운동보다는 항상 정지 상태에서 그 견고성을 나타내며, 안정과 보수를 추구한다. 진보, 혁신, 혁명은 공간에 대한 반란이다. 험준하고 높은 성벽이나 살의(殺意)의 철조망은 어떤 지역, 지방, 국가 등의 경계표지이면서 그 공간을 영유하기 위하여 식별하고 방어하고 특권화하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공간 특성은 지리상의 전유물만이 아니라 사상, 이데올로기, 종교 등에도 있다. 공간이 탐욕이나 불순한 목적으로 극단화할 때, 그 공간에는 시간이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어진다.


시간은 공간의 한계성, 폐쇄성, 특권성에 대한 적이다. '속도'가 생명인 시간은 부단히 운동하며, 그 운동 속에는 이전, 이동, 여행, 진보, 발전, 혁신, 갈등, 투쟁, 그리고 탄생과 소멸이 있다. 사람은 3만년 전의 원시인이 지녔던 보행(步行)의 속도를 지금도 변함없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 전자기술의 발달에 의한 광속(光速)을 향유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미사일, 항공기, 로켓 등이 인간의 두 발을 언젠가는 퇴화시켜 버릴지도 모를 불안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광속 사이버 세계를 추구하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속의 시간 속에서, 지금 한국인은 지역감정의 좁은 공간 속에 갇혀 반이성적(反理性的)인 증오와 대립을 일삼고 있다. 이 망국적 시대역행이 글로벌리제이션의 광속에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최근 지역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다고들 한다. 지역감정이란 무엇일까. 어떤 특정 지역공간에 포로가 되어, 자기 이익이나 권력, 특히 타지역에 대한 우월권을 지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 조직된 반이성적 집단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새해 정초에 TK몫이니 충청도 대권 운운하는 신년교례회도 시대착오적인 희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시인•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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