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 마음속의 고도한 연민 종교가나 철학자에게도 그렇겠지만, 시인이나 작가의 정신에도 무엇보다 먼저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인 줄 안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찍〈애인 사이에도 마지막엔 연민이 있어야 지탱된다>는 뜻의 말을 한 일이 있지만, 어떤 악착스런 현실의 밑바닥이라도 끝까지 아껴 사랑해 도와 갈 수 있는 이 연민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지 않으면 시인이나 작가 정신도 결국 인류의 현실에서 괴리할 밖에 없을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는 원래부터 인류의 스승을 자처해 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심우(心友), 될 수 있으면 인류의 제일심우(第一心友)가 되는 것을 성의껏 목적해 온 사람들로 나는 안다. 이 제일친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들의 딱함에 마음속으로 가장 고도하게 공명할 수 있는 큰 울음통이 필요한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의 병약에서 오는 사생활상의 어떤 부족점들을 우리가 서러워하면서도 그를 철저하게 시인이라 하는 것도 바로 진짜인 그의 이 마음속의 울음통 때문인 것이다. 또 시인이나 작가이려고 작정한 사람이면 그 작정한 바로 그때부터는 어느 경우에도 스스로 의식하고 인간의 존엄을 에누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기와 남 누구를 두고서도 여기 에누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바른 시인, 바른 작가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인간존엄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당연히 물을 듯하다. 물론 그것은 딴 게 아니라. 시인이나 작가가 되려고 작정한 사람의 작정한 그때의 〈인간존엄의 의식과 느낌〉을 기준으로 할 밖에 없다.
그대가 만일 어느 종교의 한 성전의 존엄 속에서 문학을 하러 나섰다면 그 성전체(聖殿體)의 존엄을 에누리해 가는 자여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그대가 만일 저 그리스의 비너스나 에로스같이 찬란 황홀한 아름다운 육신의 사랑을 섬기는 한 존엄에서 출발하거나, 또는 늘 지옥행의 보살도(菩薩道)의 고됨만을 섬기거나, 또는 저 이백(李白)의 〈양인대작산화개〉(兩人對酌山花開)같은 자연과의 풍류적 합일에서 출발하거나, 또는 공자의 저 가족 살림살이 사이의 질그릇들 같은 그런 걸 위주로 하거나 또 무엇을 위주로 하거나, 그 관점은 어느 거나 좋지만 시인이나 작가는 이 관점을 자의로 포기하는 일은 있어도 이걸 에누리하고 사는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되는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는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의 가치에 철저해야 한다. 자기가 생겨난 나라나 세계의 딱한 환경을 저주하고 어지럽히고〈에이 내버려 두어라〉버리기도 하는 일을 시인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누가 보아도 조무래기지 큰 시인이 할 짓은 아니다.
인류가 언제는 어디 땅에 천국을 고스란히 다 마련한 일이 있었는가? 다소간에 여기는 석가모니 말마따나 괴롭고도 서러운 지옥행의 연속이었다. 여기서 시인이나 작가되려는 자가 가져야 할 길은 무엇이라야 쓰겠는가?
그것은 그 괴롬 많은 역사 속을 지금가지 흘러온 전통의 바른 맥 속에 자기를 담는 일이다. 그래 자기 힘으로 이 오랜 전통에 되도록이면 생색을 내드리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저절로 묻게 된다. 이 땅 위에 역사 있은 뒤 가장 고단한 역경만이 계속되어 온 대한민국 같은 나라의 일원으로 태어나서, 땅의 갖은 신산을 맛보며 산다는 것은 시인에게 불리한 것이냐고? 그러나 나는 스스로 대답한다.〈서양의 좋은 시인 R.M.릴케도 어디선가 우리를 위로하는 것처럼 나 비슷히 말했지만, 만일 시인의 경우라면 세계 역사상 최난의 역경은 바로 이것이 시인의 최상 명당이라〉고 …….
나는 그래 우리 한국 시인은 세계 제일의 시 명당집 자손들이라고 늘 후배 시인들을 격려해 왔다. 우리같이 되려는 제군도 이 각오 하나만은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도 인제는 누구에게 강압당하지 않고 세계문학 속에 들어가서 문학작용을 할 수 있는 때와 조건이 되어서 다행이고, 또 내가 보기엔 우리 시나 소설의 상당수는 충분히 세계문학 속의 꽃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또 다행이라고 느낀다. 이건 뒤에 서서히 세계 사람들이 두고 본 뒤에 이야기될 것이겠지만, 1945년의 해방 뒤 30년간의 몇몇 시인 작가들의 뼈를 갉아온 듯한 그 각고의 노력에 나는 감사한다. 민족정신사의 한 부면인 문학 속의 조용하고도 진지한 참 발전이 잘되어 온 것으로 안다.
새로 문학을 하려는 사람들도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상의 역경은 최상의 상명당이라는 의식, 그리고 나머지는 각골의 괴로운 노력만이 우리의 길이란 것을 ……. 시뿐만도 아니겠지만, 우리가 시를 우리나라 말로 쓰려고 나설 때 첫째 각오해야 할 것은〈무슨 매력으로 나는 그 전 시인들보다 한술 더뜨느냐?〉하는 것이라야 될 줄 안다. 물론 시표현도 정신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고, 그럴려면 하여간 무슨 언어미의 독특한 매력을 꾸미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시인일려면 이것을 첫째 잘 해내야 한다. 그런데 이걸 하기 위해서는 꼭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거쳐야 할 길이 있다.
그건 딴 게 아니다. 동서양의〈세계의 시〉들을 고전부터 현대까지 쓸만한 것들을 골라 재독(再讀)해 내는 일인데, 그것은 흔히 독자들이 하는 것 같은 의미 흡수만의 독서법을 따르는 게 아니라, 동서양 시의 표현사적 고려에서 유파별의 각기 시인들이 언어미학상의 한술 더 뜬 건 무엇인고, 또 얼마만큼 성공해 있느냐를 살피면서 읽는 독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인이려고 하는 자는 이런 시의 표현사적 고려를 통한 시집 독서에서, 자연히 현대시사의 자기 시의 표현은 어떻게 하면 사적(史的)으로 한술 더 뜨는 것이 될까를 사적 자신 속에서 설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만이 시표현사의 정도요, 아무 자신도 없는 우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점 시인이나 작가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정도를 거치기를 나는 여기에서 권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천재적이었다는 몇몇 시인들의 일을 회고해 보자면, 그들은 그 천재를 꾸준히 성의껏 다시로 발현하기보다는 그냥〈나는 천재로다〉하는 그 소위 기분내기로 으스대고 많이 놀고 간 이들이 적지도 않은 것 같다. 이럴 필요가 어디에 쬐끔이라도 있을까?
여기서는 역시 몇몇 과거의 성인들의 가르침을 되씹어 볼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서 절제하는 것이다. 제 재조 잘난 값으로 까불기보다는 미련한 소같이 도사리고 앉아 제 천재라는 것을 여섯 번 일곱번 반추해 되새김질하는 어리석고 또 끈질긴〈소의 행〉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조는 손해 보는 일이 없다. 몇 갑절 그 깊이를 더해 갈 뿐인 것이다.
시인되려는 자, 부디 까불지 말기 바란다. 무엇하러 이런 대단하고 얼얼한 곳에 한번 태어나서 엉터리 까불이로 제 잘난 체나 하고 살 멋이 어디 있는가? 나는 여기서 석가모니라는 2천5백 년 전의 한 인도사람이〈나는 하늘과 땅에서 가장 높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낸다.
이것은 참 대단한 말이다. 맞았다. 나는 재군에게 불교도가 꼭 되리고 권하지는 않지만, 이 한마디 말씀은 인류가 이 땅에 태어나서 뱉은 모든 말씀들 중에서는 고래로 으뜸이다. 그렇다. 시인도 언제 어느 귀신이 잡아갈는지는 몰라도 이 땅 위에 한번 태어나서 살다 가기라면, 석가모니 그의 말은 대단히 뼈에 저려 참고해야 할 줄 안다. 하늘과 땅, 영원의 기둥뼈인 그 주인의 자격 아닐라면 무엇하러 이런 데 생겨나서 이 고초 다 겪는가 …….
나는, 그런데 내가 이 쓰거운 세상에 태어나서 약으로 덕본 무슨 그런 비방 같은 걸 말하려 하면서도 아직 말 못하고 온 것 같다. 그걸 마지막 잠시 말하려 한다. 딴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내게도 노자 같은 이의 문중에 있었던 것처럼 그건 잘 자란 소나무에 새로 열리는 청솔방울 같은 것이다. 몰라. 딴 분들은 더한 무엇이 있어서 어떤지. 하여간 나는 지금까지의 내 모든 불행과 고민의 꼬투리들은 이 잘된 소년의 작은 주먹 같은 청솔방울 앞에 오면 저절로 다 해소되어 버린다. 지금 설명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내 최근의 심경인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되려는 제군들에게 나는 꼭 나 같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나도 한 참고를 하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