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칠보 [孔七甫, 1884~1939]
독립운동가. 1919년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현 오산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본 관 : 곡부(曲阜)
본 명 : 공석윤(孔錫允)
생존기간 : 1884.05.27.~1939.10.27.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 생 지 : 경기 오산(烏山) 궐동159 번지
주요수상 : 대통령 표창(1995)추서
본관은 곡부(曲阜), 본명은 공석윤(孔錫允)이다. 자(字) 칠보(七甫)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경기도 오산(烏山)사람으로 1884년(고종 21)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귀골(貴骨)이 장대(壯大)하고, 성품(性品) 또한 강직(剛直)하여,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그는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라(庚戌國恥)는 치욕적(恥辱的)인 국가적(國家的) 슬픔을 가슴에 품고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에 저항하여 왔다.
공칠보(孔七甫)는 1901년 9월 이후부터 시작된 경부선(京釜線) 철도부설 현장에 끌려가 강제노역(强制勞役)에 동원 되었으며, 사유재산 및 토지 등 모두를 약탈당하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反感)은 더욱 커져갔다.
1904년 6월 공칠보(孔七甫)는 김기우(金箕祐) 등 32명과 함께 제1차 배일통문(排日通文)을 발기 작성하여 철도 부설에서 일어난 일본의 작폐를 비롯하여 국권의 침탈과 이권의 착취, 그리고 북진하는 일본군의 야욕 등을 지적하여 총궐기를 부르짖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9년 3월 1일에 벌어진 독립만세운동 이후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공칠보(孔七甫)는 수원군(水原郡) 성호면(城湖面)(현 오산시)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유진홍(兪鎭弘), 이성구(李成九), 이규선(李圭璇), 김경도(金敬道), 정규환(鄭奎煥), 김용준(金用準), 안낙순(安樂淳)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거사 일을 오산장날인 3월 29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등 준비를 진행시켜 갔다.
거사 일에 이르러 공칠보(孔七甫)는 오산 장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시위 도중에 공칠보(孔七甫), 안낙순(安樂淳), 유진홍(兪鎭弘)등 주동자 7의사가 일경에 피체되자, 시위 군중들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오후4시경 다시모인 5백여 명의 시위군중은 공칠보(孔七甫)등 7의사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경은 곧 7의사를 석방하였으며, 석방된 공칠보(孔七甫)는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면장 류진열(劉鎭烈)에 대항하여 면사무소를 점령하고 우체국의 전화통을 파괴하여 수원(水原)으로부터 오는 일본군의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인근의 일본인 주택 및 상점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밤늦게까지 주도하였다.
이에 출동한 헌병대(憲兵隊) 및 일경(日警)들은 강경책(强硬策)으로 시위 군중을 향해 무도하게 총을 발사하였고, 공칠보(孔七甫) 외 3명이 중상을 입고 오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년 여간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서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투옥(投獄)하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騷擾) 혐의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경찰 일본인 폭행 등으로 체포 및 석방을 반복하면서 요시찰(要視察)에 걸려 초주검이 되어 인천(仁川)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일제에 당한 잔혹한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간절히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39년 10월 27일 고향땅인 오산(烏山)을 등지고 인천 용현동(仁川 龍現洞)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8월15일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그의 아들 공진택(오산시 궐동 153 번지 출생)은 6.25전쟁 전상 국가유공자로 두 분을 나라에 바치고 평생을 사랑하는 가족 얼굴 한 번도 못 보시고 돌아가셨으며,
그의 손자 공남식(오산시 궐동 153 번지 출생) 또한 월남전쟁 전상 국가유공자로 심장을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으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공상 소방공무원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평생을 바치시고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였다.(일제강점기 6.25전쟁 월남전쟁 3代 국가유공자 대한민국 유일)
註·판결문(1919. 11. 06. 경성지방법원)
·3·1운동실록(이용락) 375·37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343∼348면
·3·1운동시 피살자 명부 203면
·매일신보 1919.03.31. 3면1단(오산 형세심이불온)
·매일신보 1919.04.02. 3면 5단(민심이 소요하다)
·매일신보 1919.04.05. 3면 6단(부상자가 세명)
·두산 백과사전 한국사회 인물편(네이버 참조)
·오산역광장 3.1독립항쟁의사 추모비
·1959년 발간 곡부공씨 파보 4권 29면
·1996년 발간 곡부공씨 세보 2권 62~63면
·화성시사편찬위원회(화성시사)
·1904년 제1차 배일통문(排日通文)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신리 소재 공석준(공석윤의 친형) 묘비
※ 위 내용은 공칠보(孔七甫) 의사의 증손 공병삼(孔炳森)이 여러 참고문헌과 친지들의 증언을 모아 2018.11.18.(일)에 작성함.
독립운동가 공칠보의 묘(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신리 산46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