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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신라는 지방관청도 종이문서를 사용했다

작성자마이피|작성시간16.01.05|조회수194 목록 댓글 0

 

신라는 지방관청도 종이문서를 사용했다

 

 

 

 

 

 

신라가 6세기 중반부터 지방행정에까지 종이문서를 썼음을 입증하는 ‘인덱스용 목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특히 이 목간의 출토는 신라가 이미 호적제도 등을 통해 전국적인 인력동원 및 관리를 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는 24일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112점에 대한 적외선 촬영결과 93점 300여자를 판독했으며 이 가운데 책갈피에 꽂거나 끼우는 이른바 색인용 목간 1점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인덱스 목간과 종이문서

 

제첨축(題籤軸)이라고도 하는 이 목간은 ‘책갈피’를 연상하면 좋다. 문서를 둘둘 말면 위에서 볼 때 가운데 공간이 생기는 데 이 목간을 그곳에 꽂았다. 구멍에 빠지지 않도록 윗부분은 네모난 머리 형태이며 밑은 꽂기 쉽게 얇고 긴 모습이다. 여러 문서를 분류할 때 쓰는 것이며, 특정한 문서를 찾기 쉽게 윗부분 네모난 곳에는 사람 이름이나 지역명을 적어놓았다.

이 목간을 확인한 성과는 크다. 신라가 그 비싸고 귀하다는 종이를 문서로 활용했고 그 종이문서를 지방행정에까지 썼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문서창고가 이 성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성을 축조하고 관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고, 동원된 사람들을 관리하려면 종이문서가 필요했던 것은 당연한 이치.

이용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는 “신라가 524년 법흥왕때 율령을 반포한 것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법흥왕 때부터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면서 호적을 만드는 등 제도를 정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도 “이런 목간이 일본에서는 성산산성보다 1세기 늦은 시기에 나온다”면서 “이 목간은 중앙권력이 각 지방의 호적을 작성하고 이를 통해 민(民)의 실태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작성되기 힘들다”고 뒷받침했다.

◇신라이름의 ‘○○지’는 요즘의 ‘○○씨’

 

이번에 판독된 글자 가운데 23명의 신라인 인명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중 19개가 ‘지(智·支·知·只)’로 끝났다. 아나휴지(阿那休智)·아나설지(阿那舌只)·내은지(內恩知)·거조지(居助支)·구례지(仇禮支) 등이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이 ‘지’자는 이름 뒤에 붙는 존칭 같은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씨’의 뜻”이라고 밝혔다. 이용현씨도 이름에 붙이는 접미사로 보았다.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패(稗)’자의 뜻이 곡물명인 ‘피’임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 ‘패’자를 ‘피’가 아니라 신라의 외위(外位) 10등급인 ‘피일(彼日)’의 이칭(異稱)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맥석(麥石)이라는 묵서, 즉 麥(보리)자가 확인됨으로써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 ‘맥석’이라는 뜻은 보리 한 섬이라는 뜻이며 기존의 패석(稗石)도 ‘피 한섬’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같은 필치에 같은 내용이 담긴 목간이 4점이나 출토됐고, 하나의 목간에 2명의 사람이름이 기재된 것도 9점이나 확인됐다.

예컨대 ‘진성파혜지패(陳城巴兮支稗)’가 새겨진 목간이 2점 확인됐는데 이는 진성에 사는 파혜지라는 사람이 바친 곡식이라는 뜻이다. 이용현씨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화물을 보낼 때 여러 개의 물품꼬리표를 만들어 각각의 화물에 붙인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그 뜨거웠던 550~560년대의 성산산성

 

목간에 나타난 지명은 이번에 확인된 고타(지금의 안동)·급벌성(영주·봉화)·감문성(김천)·진성(의성·구미?)·구리벌(의성과 안동 사이?) 등 경북 북부 지명만이 등장한다는 것.

주보돈 교수는 “지금까지 출토된 목간은 산성의 한 지점에서만 발굴된 것”이라면서 “이 지점은 경북 북부 사람들이 축성이나 관리를 맡았던 곳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결국 다른 지역 사람들은 성안의 다른 곳을 담당했을 것이며 발굴이 확대되면 신라지방 각지의 지명·인명을 쓴 다양한 목간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로 경주 왕경 축조에만 동원된 백성들이 지방인 함안 성산산성을 쌓는데 징발된 이유는 무엇일까. 주보돈 교수는 “성산산성은 신라가 아라가야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백제나 왜 등 배후 세력들을 효과적으로 막고 북으로는 대가야 공격을 위해 쌓은 중요한 성이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신라는 아라가야를 560년 무렵에, 대가야를 562년에 잇달아 합병했다.

이번에 다수 발견된 목간의 밑부분에 V자홈이 파여있는 것으로 보아 곡물 등 물자를 자루 같은 곳에 집어넣고 그 자루를 동여맬 때 같이 맨 물품꼬리표, 즉 하찰(荷札)임이 분명해졌다. 이용현씨는 “물류비용을 줄이기 위해 물자를 보낼 때 중앙을 거치지 않고(혹은 장부상으로만 처리) 낙동강 하류로 직접 내려보낸 6세기 중후반의 물류체계와 지방행정 체제를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목간(木簡)이란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사용했던 죽간(竹簡, 대를 갈라 글씨를 써서 한 장 한 장 끈으로 꿰어 종이처럼 사용했던 대나무 조각)과 더불어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했던 목편(木片)이다. '목독'(木牘) 또는 '목첩'(木牒)이라고도 불리는 목간은 나무를 폭 약 3 cm, 길이 약 20∼50 cm, 두께 3 mm 정도의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 묵서(墨書)했던 나무조각이다

 

 

 

 

 

 

 


신라시대의 옛 목간(먹글씨가 쓰여진 나무쪽 문서)과 목기 등이 대량 출토됐던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터(사적 67호)에서 최근 같은 시대의 목간(사진) 33점과 댕기 모양의 머리카락 뭉치, 빗자루 등 목기 생활용품이 무더기로 나왔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는 지난 3월부터 최근까지 동문터 부근 저수지터 습지대 조사 결과 이런 유물들을 발굴했으며, 현재 정밀 분석 작업중이라고 19일 밝혔다.
분석 결과 먹글씨 쓰여진 목간 23점에서는 ‘하맥’ ‘매곡촌’ 등 경북 일대로 추정되는 당시 지명들이 새로 드러났으며, 신라시대 옛 비석에 새겨진 것과 같은 글자도 발견됐다. 또 책갈피 꽂이용 막대인 ‘제첨축’ 1개도 나왔다

 

신라가 6세기 중반 진흥왕(540-578년) 무렵에 이미 각 지방별로 치밀하게 호적을 작성해 지방과 민(民)을 관리했음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인덱스(index 색인)용' 목간(木簡)이 경남 함안 성산산성 출토 유물에서 확인됐다.

이는 일본 열도보다 100년 가량 앞선 것으로, 신라가 일반적인 통념을 훨씬 뛰어넘는 이른 시기에 중앙 국가권력이 지방 곳곳에 깊숙이 침투했음을 잘 보여주는 획기적인 유물로 평가된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선태)는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제 유물류 중 목간으로 생각되는 112점에 대해 적외선 촬영을 실시한 결과 그 중 93점에서 묵글자 약 400자 가량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24일 발표했다.

이들 묵글자 중 300여 자는 판독이 가능하며 나머지 95자는 판독이 어렵거나 학자간 이견이 있다고 밝혔다.

목간이 제작된 시기에 대해 묵글씨에서 확인되는 신라의 벼슬 이름이나 지명 표기 등을 볼 때 6세기 중후반 무렵 혹은 그 이전에 작성된 신라시대 목간이라는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특히 목간류 중에는 두루마리 문서에 꽂는 목편으로 오늘날 '인덱스' 혹은 '책갈피'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목간이 확인되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런 목간은 한국보다 목간학 연구가 활발한 일본에서는 '다이센지쿠'(題籤軸)라고 일컫는 것으로, 모양은 마치 농기구 중 하나인 넉가래나 삽처럼 생겨 긴 자루에다가 네모난 머리가 일체를 이루고 있다.

'다이센지쿠' 목간은 지방관아에서 사용하던 문서류 일종으로서, 둥글게 말아 풀어지지 않도록 끈을 동여맨 종이나 비단류 문서에 꽂아 사용했다.

'다이센지쿠' 목간은 대체로 네모지거나 둥글게 생긴 머리 부분에다가 해당 문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지를 간략히 기록해 두게 된다.(관련 그래픽 참조)

100여 점 이상이 출토된 함안 성산산성 목간류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3점에 달하는 '다이센지쿠' 목간이 확인됐으나 이 중 묵글씨가 확인되는 것은 1점.

여기에는 '利豆村'(리두촌)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생각되는 세 글자가 판독되고 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일본 와세다대 이성시(李成市)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국제통화에서 "이는 신라시대 성산산성에 행정 문서를 보관하던 '문서창고'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이 무렵 신라의 문서행정 레벨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또 "이런 목간은 중앙 국가권력이 각 지방 호적을 작성하고, 또 이를 통해 각 민(民)에 대한 실태를 철저히 파악하지 않고서는 작성되기 힘들다"면서 "단양 적성 신라비(진흥왕대)와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신라가 진흥왕 무렵에는 호적을 작성하고 이를 통해 지방과 민(民)을 통치했음은 거의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이어 "이런 목간이 일본에서는 1세기 가량 늦은 7세기 후반에야 나오기 시작하며 나라(奈良)의 쇼쇼인(正倉院)에는 실물이 남아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정밀판독 결과 지명으로는 기존에 확인된 級伐城(급벌성)ㆍ감문성(甘文城)ㆍ진성(陳城)ㆍ구리벌(仇利伐) 외에 古陀(고타. 안동 추정)ㆍ추문(鄒文)ㆍ巴珍兮城(파진혜성)ㆍ巴珍兮村(파진혜촌)ㆍ阿卜智村(아복지촌)ㆍ양촌(陽村) 등 17개가 확인됐다.

또 인명으로는 기존 波婁(파루)ㆍ居利支(거리지)ㆍ伊竹伊(이죽이)ㆍ巴兮支(파혜지)ㆍ구잉지(仇仍支) 외에 阿那休智(아나휴지)ㆍ阿那舌只(아나설지)ㆍ內恩支(내은지)ㆍ居助支(거조지)ㆍ仇禮支(구례지) 등 23명이 추가로 확인됐다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출토 6세기대 신라 목제유물 중 어로장비와 저울 등과 관련된 제품들. 이 중 빨강색 네모안 목제유물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새긴 눈금 10개가 확인됨으로써 저울 부속품 중 천칭(天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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