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법문 019-1/퇴옹성철
6. 십이연기의 재해석
이제부터는
십이연기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합니다.
먼저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의 문제인데,
여기에는
시간적 인과(因果)관계로 보는 해석과
존재의 원리로 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종래에는
십이연기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비등하게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연기의 본래 의미는
존재의 원리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십이연기에서
연기를
소승의 유부적(有部的)인
생멸(生滅)의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연기,
중도(中道)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하면,
과거 천태대사나
현수대사 같은 분들이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시켜
생멸의 범주로
구분한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원시경전인 아함경은
대승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를
적지 않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실례는
가전연경 등에서
일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십이연기의 본래적 의미는
시간적 관계라기보다
존재의 법칙인 까닭을 말해 보겠습니다.
그때 존자(尊者)
마하구치라(mahakautthika)는
존자 사리불(Sanputta)에게
이렇게 물었다.
"벗 사리불이여,
노사(老死)는
자기가 지은 것(自作)입니까?
노사는 남이 지은 것(他作)입니까?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또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
"벗 사리불이여,
생(生)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벗 사리불이여,
식(識)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식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名色)에
연(緣)하여 식(識)이 있습니다. "
"벗 사리불이여,
이 말한 바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겠습니까?"
"벗이여, 비유하면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이
명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에 연하여 명색이 있습니다.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으며,
육처에 연하여 촉(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입니다.
벗이여,
만일 그들의 갈대 묶음 가운데서
하나를 제거해버리면
나머지 하나는 넘어져버리며,
다른 것을 제거해버리면
그 다른 것이 쓰러져 버립니다.
벗이여,
그와 같이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식의 멸함이 있으며,
식의 멸함에 의해서
명색의 멸함이 있으며,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육처의 멸함이 있으며
육처의 멸함에 의해서
촉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입니다. "
(相應部經典 2券
南傳大藏經 13 pp. 164-166)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의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行)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行)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行)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남전대장경과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
에 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잇는 것과 같아
하나는 주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객체가 된다는 것보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즉, 연기란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던 것이
새로 탄생하여 생겨난다는
생성의 기본원리라기보다는
모든 일체 만물이 존재하는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연기를
만물이 어떻게 생겼나를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적 해석이 됩니다.
연기는
본래 존재의 모습을
말하는 기본원리였었는데,
후대에 오면서
생성의 원리를 말하는
시간적 관계로 보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연기란 우선적으로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
를 밝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기의 근본 성품에는
앞의 남전장경에서 본 것처럼
진여(眞如)의 의미도 포함되고 있는데 ,
진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연기를
생성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변설(轉變設)에 떨어지게 됩니다.
전변설은 오늘날
하나님격인
범(梵:Brahman)에서
일체만물이 나왔다고 하는
인도 고대종교의 사상이며,
부처님은 애초부터
이것을 부정하였습니다.
후대의 불교에서는
전변설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데,
유식설(唯識說)은
은연중에 이러한
전변설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기란
전변설처럼
무슨 본질이 따로 있고
지말(支末)이 따로 있어서
그 본체에서
지말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華嚴)의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에서
성기(性起)라는 말을 하는데
그 일어난다(起)는 말을,
생겨나서 일어난다는
생기(生起)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불법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란'
서로 의지해 있는것(相依性)'
이라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의지하고
나는 너를 의지해 있다고 하셨지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생겼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생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 연기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란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연속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평등인
형제 사이라는 것이며,
우주가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말함이지
성경의 창세기처럼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
를 말하는 그런 이론이 아닙니다.
흔히 나에게 묻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합니까? "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교에서는 연기법이 있다.
이 우주라는 것,
법계(法界). 진여(眞如)라는 것은
누가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누가 부술 수도 없는 것이다.
법계 그 자체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不生不滅),
늘지도 않고 즐지도 않는
(不增不減)것이다.
거기에서는
서로가 의지하여
원융무애하게 존재할 뿐이다.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면
외도법인 전변설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방식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란
평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융화하여 무애자재함을
말할 뿐이지
서로 앞서고
뒤서고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학자나 스님들은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된 것으로 분류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인용 경전과 그 해설에서
그와 같은 취급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점을
다소간 이해하였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