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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4월호] 불효회不要悔 - 후회하지말라 / 조주스님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05.01|조회수81 목록 댓글 1

< 이달의 법문 >

 

 

 

 

불요회不要悔 -후회하지말라

 

 

 

글 | 조주 스님

 

 

 

오늘 아침 제가 존경하는 보살님께서 톡을 보내주셨는데 그내용이 지금 제 심정과 같기에 인용합니다.
한 소년이 고향을 떠나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쳐보기 위해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노인을 찾아가 인생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하여 달라고 하자 그 노인은 말없이 <불요파(不要怕)-두려워말라->라는 구절을 써주고는 “인생의 비결은 딱 여섯 글자이고, 오늘 그 중 세 글자를 써주었으니 네 인생의 절반을 이 글자 대로 살면 크게 잘못된 일은 없을 것이다”. 소년은 중년이 되어 어느 정도 성공을 했지만 마음을 다친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노인을 찾아왔는데 노인은 죽고 그 아들이 노인의 편지를 전하여 주었는데 그 내용은 <불요회不要悔 -후회하지말라>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그 소년이 혹 제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저도 지난 30년을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소련이라는 나라와 러시아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선배스님이 한번 가보라고 하신 말에 따라 소련이라는 나라를 왔습니다. 그게 1991년 7월경이었습니다. 3개월의 여행비자로 소련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에 가볍게 왔습니다. 그로부터 소련은 붕괴되고 연방의 15개 공화국은 독립하여 지금은 각각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처음 3개월의 일정이 소련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만나고 부터 제가 할 일을 찾은 듯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도 고려인들이 생활이 어렵다고 알려져 왔는데 어떻게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온 1991년대에만 해도 한국보다 고려인들의 생활수준이 훨씬 높고 사는 것도 풍요로웠습니다. 지인의 권유로 소련의 우크라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을 여행하고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 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금수강산이라고 하여 아름다운 나라라고 하지만 소련의 각지에 있는 경치도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거기다가 인구도 많지 않고 땅도 거름지고 넓어서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풍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1990년대 당시 구소련은 정말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파견 나와서 열심히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직적이고 활용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대사관은 물론이고 한국문화원, 교육원, 심지어 koica 단원들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장악하여 한국의 대외협력재단을 기독교 선교사업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엄청난 물량공세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선교사무실에 미국 국기를 게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으면 미국처럼 잘 살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1991년 이후 약 30년 동안 이곳 우즈베키스탄에 있으면서 부족한 것을 알았기에 많이 노력했고 많이 인욕 했습니다. 지금 현재 나의 위치는 우즈베키스탄 불교회의 대표이고 대통령내각종교위원회(대표;내각 부총리)의 불교분과 자문위원입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국제전통종교회의의 불교 측 상임비서이며 국제전통종교간의 화해와 협력에 공헌했다 하여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표창 매달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토스카나 자은사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나를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 모로 많이 부족하고 또 성질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닙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지 않았고 성의 없이 깨끗하게 주지 않는 보시는 거절하였습니다. 적어도 일부 한국의 권승들이 비난받는 신도의 시주 돈과 삼보정재를 유용한 삶은 살지 않았고 나의 힘이 닿는데 까지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서, 또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공산중의 치하에서, 또 이교도 이슬람의 땅에서 나는 이와 같은 자리를 나 홀로 마련했습니다. 아니 나 홀로는 아니다. 나는 항상 위기 속에서 부처님을 느꼈고  힘든 일을 당하면 부처님을 대행한 다른 손의 도움에 의해 그 힘든 것을 이겨나갔습니다. 또 나를 겁박하던 많은 일들과 사람들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고 또 벌을 받은 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30여년 머리글에 썼듯이 나는 두려움으로 지낸 세월입니다. 아직도 두려움이 가득하지만 그 두려움은 나의 안일과는 무관합니다. 어떻게 하면 어렵게 일깨운 불교를 소멸시키지 않고 전개시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중도의 길을 가도록 하는 이정표를 세울까? 혹 내 힘이 부족하고 나의 지혜가 부족하여 잘못전달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30년은 글쎄? 30년이 될 지 3년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 공부가 부족하여 동국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는데 어느 때인가는 점심, 저녁때에 못  보던 스님들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쭈었다 혹 무슨 과목을 들으세요? 스님들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학생이 아니고 해제 철에 잠시 학교 근처에 잇는 고시원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아니 왜 스님이 고시원에 머물러요? ”
예전에는 해제 철이 되어도. 그냥 선원에  남아서 다음 결제 철에 다시 방부를 들이고 그랬는데 요샌 규정이 바뀌어서 해제 철엔 선원을 나가야 합니다. 은사나 도반이 있는 사찰의 주지나 좀 힘이 있으면 거기로 찾아가서 기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갈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해제 비 받은 돈으로 대학교 근처의 고시원에 묵으면서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시원을 쫒아 갔더니 이건 베니아 합판으로 칸막이를 하고 겨우 몸만 누일 수 있고 옆방의 소음도 그대로고. . .  이렇게 살다간 건강을 다 버려 놓겠다. 더군다나 일부 고시원의 주인 중에는 몰지각한 것들이 많아 스님보고 아저씨 할아버지 이렇게 부르고 있었고 혹 옆방에 건설 노무자가 들면 술 먹고 부리는 행패가 심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비구인 경우는 조금 나은데 비구니의 경우는 낭패를 보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혹 이일로 기존의 사찰 소임자 스님을 비난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찰에서도 소임 보는 스님들에게 독방을 주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또 옛날 건물들은 방이 좁다. 그런데 옛날 사찰들은 대부분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고 그린벨트 내에 위치해 있는 절들이 많다. 주지하신 스님 중에는 범법자가 간혹 있습니다. 폭력이나 사기 등의 파렴치범들이 아니라 사찰 건물을 잘못 손대면 문화재 관리법 위반으로 입건됩니다. 서울 동대문의 조그만 사찰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태풍에 비가 내려서 옛날 담장이 위태롭게 아랫집을 덮칠 것 같아서 구청에 보고하여 시정을 요구했으나 시정되지 않아서 스님이 인부를 사서 담장을 헐어내고 다시 옹벽을 쌓았는데 나중에 문화재관리법위반으로 집행유예에 벌금형을 받아서 범죄자가 되었다고 한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사찰에서 이 분들을 모시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또 한국에서 이분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자면 경비도 많이 들고 유지비도 많이 든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은 건축비도 적게 들고 또 식음료도 풍부하고 저렴하며 인건비도 싼데다가 요즈음에는 한국인에게는 무비자 한 달이다. 이곳에 해제철의 스님들을 모시고 두 달 동안  요양하게 하시고 또 불교유적지를 답사하시어 불교문화를 공부하는 시간으로 하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또 이렇게 왕성하고 화려했던 불교가 어떻게 쉽게 망해버렸나를 생각하면 스님들의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스님들이 자주 왕래를 하시면 현지 사람들에게 불교가 친숙하게 다가갈 것이 틀림없다. 또한 유럽이나 미국 요사이는 태국이나 스리랑카 등 에서도 불교 유적지를 찾아서 순례를 오는데 이 분들에게도 숙소로 제공할 수 있고 또 한국의 스님들께서 체류 중에 불교와 참선 등을 가르쳐 주면 지장보살님께서 좀 더 빠르게 환생하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을 완성하는 것이 앞으로 나의 인생에서 <不要悔=후회하지 않는> 생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냥 역사로 흘려들었던 펜더믹의 비극이 우리 시대에서도 일어나니 모두 당황함으로 갈피를 못 잡습니다. 14세기 유럽에 일어났던 페스트의 피해, 또는 1920년대에 스페인에서 일어났던 독감사태들을 단지 책으로, 역사의 단편으로 읽고 그냥 그랬나 보다 하다가 막상 우리 시기에 이 펜더믹이 오니 당황스럽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니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 코로나에 매일 몇 명이 걸리고 몇 명이 죽고 또 몇 명이 나았는지 백신은 어떻게 되는지 하는 것의 보고가 끊임이 없습니다.
이러한 충격 속에서도 한국에서는 교회를 통한 전파가 크게 문제가 되는데 비해 우리 절 집 에서는(정상적인 종단의) 코로나로 인한 피해가없어서 다행입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신행행태의 차이도 조금은 원인이 있다고보여집니다. 기독교의 경우는 밀집한 장소에서 대중이 모여서 통성기도를 중시하며 박수를 치거나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불러서 균들이 비말의 상태로 쉽게 전파하고 가쁜 숨을 쉬어서목구멍 숨을쉬니 바이러스가 기관지에서오래 지체되고, 사회생활 속에서는 소위체면이라는 것 때문에 감추고 주저해야 할 것들을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중들 속에서 자아를 망실하고 속에 있는 온갖 본능의 불편한 것을 방언 또는 은총이라는 거짓으로 끄집어 내어서 토해 내게 하고 평상시라면 절대할 수 없는 행위들을 하게 만드니 스트레스해소와 욕망의 성취를 정당하게 하여 목적 달성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지만 정작 이런 바이러스라는 외부의 충격에는 오히려 취약함을 드러내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신앙행태에 비해서 불교는 절과 참선 또는 명상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다 보니 자연스레 깊은 호흡을 하고 그 깊은 호흡은 바이러스가 목구멍에서 빠르게 위로 이동시켜서 사멸시켜 버리기에 펜더믹의 소란이 덜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명상은 닦고 버리고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살펴 볼 뿐이다. 반야심경에서 맨 첫귀절에“관자재보살”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불교의 기본적 지향점이 아닐까 합니다. 관-본다는 말이지요. 보는 것도 그냥 스쳐가듯 보는 것이 아니라 세밀히 본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올바로 보는 것이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바라밀의 첫 걸음이란 말씀이라서 맨 앞 구절에 놓지 않았을까요? Avalokitesvara는 자재롭게 보는 이, 또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도 있고 또 더 이상 위가 없는 최고의 신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 첫머리에 관자재보살이라고 주목시키면서 불교의 핵심을 지적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인간성의 궁극적 완성을 이루어 걸림 없는 자재를 누리도록 하는 종교이다. 교주인 서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천계(신들과)와 인간의 일체의 속박으로 부터해탈 하였다. 너희들 역시 천계와 인간의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였다. 비구들이여, (여러 곳으로)유행하여 교화하라. 많은 사람들(육도중생으로 신, 인간, 축생, 아귀, 수라, 지옥)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해 두 사람이 함께 가지마라.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끝도 좋게 문리(文.理)를 갖춰 가르침을 설하라.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밝혀라. [세간에는]진애에 적게 물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만약 법을 듣지 않으면[법으로부터] 멀어지지만 듣기만 하면 법을 깨칠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역시 우루벨라 세나촌으로 가 법을 설하리라.”

저는 이 전법선언이 저의 승려생활의 기본 전제입니다.

 

 

 

 

                                                                                                   글쓴이 조주스님은 1990년에 연등
                                                                                                         국제불교회관(당시 소격동. 현 강화:
                                                                                                          관장 원명스님)에서 해인사로 출가
                                                                                                          하였고, 1991년부터 우즈베키스탄
                                                                                                          에서 거주하며 자은사를 건립하여
                                                                                                          수행과 포교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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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밤과꿈 | 작성시간 21.12.12 명문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시원 이야기는 가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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