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 셔먼의 처녀 시절 이름은 리디아 댄버러였다. 1825년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에서 태어난 리디아는 17세 때 자녀를 여섯이나 둔 42세의 홀아비 에드워드 스트럭을 첫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리디아는 결혼 첫 해에 건강한 딸을 출산했다. 그리고 연달아서 아이 여섯 명을 낳았다. 부양할 아내와 자식 열 세명을 둔 스트럭은 맨해튼에 살던 당시 경찰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1863년에 칼을 휘두르는 한 주정뱅이가 호텔 바텐더를 공격했을 때 신속히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그 무렵, 스트럭이 처음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은 이미 성장해서 집을 떠난 상태였고, 리디아가 낳은 아이 한 명은 내장 질환으로 숨지고 없었다. 따라서 그의 집에는 아이들이 6명만 남아 있었다. 수입이 한 푼도 없던 탓에 스트럭은 극도로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스럽다고 판단한 리디아는 비소를 섞은 죽을 먹여 남편을 살해했다. 집안의 주치의는 사망 원인을 ‘폐결핵’이라고 진단했다.
리디아는 수입이 전혀 없는 42세의 과부가 되었다. 남편을 처치한 지 막 한 달이 지났을 때 리디아는 혼자서 6명의 아이를 부양하는 힘든 생활에 그만 넌더리가 나고 말았다. 7월 첫째 주 동안 그녀는 어린 자식 세 명을 비소로 독살했다. 짐을 약간 덜어내자 리디아의 상황은 나아졌는데, 특히 14세이던 큰 아들 조지가 페인트공의 조수로 일을 한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뒤 조지는 ‘도장공 산통’이라는 병에 걸렸고,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리디아는 아들이 건강을 회복하게 1주일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나 아들의 병이 낫지 않자 끝내 비소를 탄 차를 먹여서 죽였다.
리디아의 자식들 중에 남은 아이는 두 명이었다. 리디아와 이름이 같은 18세의 큰딸, 그리고 12세의 앤 엘리자만 살아 있었다. 앤 엘리자는 몸이 허약해서 종종 열과 오한에 시달렸다. 리디아는 딸을 간호하는 일도 짐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1864년 3월에 리디아는 시중에서 구한 약에 비소 한 숟갈을 섞어서 어린 딸에게 먹였다. 사인은 장티푸스로 기록되었다.
이후 6주 혹은 7주 동안 리디아 모녀는 브로드웨이 북쪽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단 둘이 살았다. 5월 초, 맨해튼 남부에 사는 배다른 언니를 만나러 가느라 하룻밤을 세운 딸 리디아는 돌아온 후 열이 났고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간호하고 싶지 않았다. 1866년 5월 16일, 딸은 어머니가 준 역한 냄새의 약을 먹었고, 나이가 18세이던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았고, 아버지와 다섯 동생들 곁에서 쉬게 되었다.
사건을 저지른 직후 리디아는 코네티컷 주 스트랫포드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데니스 헐버트라는 늙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헐버트는 상당한 재산을 지닌 지역 농부였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헐버트는 아내가 만들어준 특별한 조개 수프를 먹은 뒤 갑자기 쓰러져 죽고 말았다. 사망 원인은 단순히 콜레라로 기재되었다.
46세에 또다시 과부가 된 리디아는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만약 그녀가 단순히 돈이 욕심이 나서 범행을 저질렀다면, 그 후에는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리디아가 범행을 저질러 상당한 이득을 보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돈이 그녀에게 죄를 짓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살인범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살인 자체에서 순수한 기쁨을 얻는 사람이었고, 잔인함과 죽음에 중독되어 있었다.
헐버트가 죽은 지 몇 달이 지났을 때 리디아는 술주정꾼에다 자식 넷을 둔 홀아비 호레이쇼 셔먼과 결혼한다. 1870년 11월 중순, 결혼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때, 리디아는 셔먼의 가장 어린 자식인 막내 아들 프랭키를 독살했다. 프랭키는 태어난 지 4개월 밖에 안된 아기였다. 그 다음 달에 그녀는 14세의 큰딸 아다를 독살한다.
자식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셔먼은 망연자실했다. 그의 폭음은 예전보다 심해졌다. 그는 1주일 내내 술을 퍼마시다 집에 들어왔고, 며칠씩 침대에 뻗어 있었다. 그가 일을 다시 나간 것은 1871년 5월 월요일부터였다.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리디아는 독이 든 핫 초콜릿 한잔을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이틀 뒤 셔먼은 죽었다.
겉보기에 건강했던 셔먼이 갑지기 사망하자 그의 주치의인 비어즐리 박사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검을 허락받은 뒤 셔먼의 위장과 간장을 떼어냈으며, 예일 대학의 독극물학과 교수에게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결과는 3주 후에 도착했다. 셔먼의 간에서는 비소가 검출되었으며, 리디아 셔먼은 즉시 체포되었다.
1871년 6월 7일, 리디아 셔먼은 뉴욕 시티에서 체포돼 뉴헤이븐으로 이송되었으며, 호레이쇼 셔먼을 죽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녀의 재판은 전국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결국 리디아는 2급 살인죄로 유죄가 확정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웨더스필드 형무소에 갇혔고, 1879년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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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온라인 작성시간 11.02.22 무섭네요..... 그런데 저렇게 자기 자식 남편을 많이 죽였는데 2급살인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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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2.22 원래 1급 살인은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무기를 사용해야 하고 여러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죠. 그리고 검사기 어떻게 기소하느냐도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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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자우림 작성시간 11.02.23 그래도 우리나라 솜방망이 처벌보다는 나은듯...ㅡㅡ 사람을 죽이면, 최소한 무기징역이나, 최저 25년 에서 사형이렇게 해야지..ㅡㅡ; 우발적 사고에의한 사망도 아니고, 술먹고 약간 헤롱한 상태에서 사람을 죽이면 감형이 되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