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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건희 올림)
다음으로 삼성이 사회에 기여하는 폭을 넓히는 일입니다. 삼성은 우리 국민, 우리 문화
속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룬 성과를 우리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988년, 삼성 창사 50주년
기념사) 삼성이 초일류기업이 되는 날, 모든 열매와 보람은 함께 땀 흘린 임직원들과 협력업체가
골고루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임을 다시 한 번 약속합니다. 먼 훗날 삼성의 역사에서 여러분과 내가 함께 이 시대를 빛낸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1993년 3월 22)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취업 준비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업 1위가 삼성이며,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 이건희 회장이란다. 이런
삼성의 이미지와 모순되는 또 다른 삼성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적게 내고 재산을 대물림하면서 변칙 상속 증여의 의혹을 받아왔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는 절대로 안 된다'던 아버지의 뜻을 여전히 굳건히 지켜가는 <무노조 삼성>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실제로 변칙 상속 증여 문제로 해서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고, 천문학적이 돈을 가지고 버티며 몸빵을 대신한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같은 전과자인 이명박의 도움으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지금 그는 밴쿠버에 가 있다. 아버지 이병철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조를 구성하려는 사람을 핍박하고, 보장되어야 할 사생활을 파헤치는 일을 서슴지 않는
것은 삼성의 전매특허이다. 그러면서 법을 이용해 혹은 법률가를 돈으로 매수해서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삼성의 장기가
되었다. 돈이 권력이 된 시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돈>이다. 인격을 형성하고 평가하는 것도, 모든 사회적 지위의
가치, 정치적 권력의 가치 기준마저도 바로 <돈>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한 개인의 도덕성과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재산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잰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통한 <가치의 전도>를 요구한다. 어떤 광고에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지위를 결정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참으로 천박하고 ‘노예스런 세상’이 되었다. 이런
광고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방송심위위원회는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아파트가 위치하는 장소에 따라 사람의 차별을 가하는 사회,
이런 사회를 야만이 판치는 사회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배부른 돼지들이 판치는 세상 아닌가? 그리스의 정치개혁자였던 솔론의 말처럼, '부에는 끝이 없다. 과다는 오만(hybris)을 낳는다. … 불의(不義)한 이익에는
곧 화(禍)가 미치기 마련이다. 화재와 마찬가지로 처음은 대단하지 않지만, 그 끝은 몹시 나쁘다." 이를 받아 테오그니스는 "오늘 가장 원하는 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두 배를 소유하고자 한다. 부(돈)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하였다. 가진 부와 입는 옷, 그리고 사는 집에 따라 사람이 미쳐가는 정도는 다르다. 이게 오늘의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여전히 더욱 갖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부(富)는 오직 그 자신만을 목적으로 삼을 뿐이다. 돈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마땅히 주어진 자연적 권리와 도덕적 가치를 망각하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범법자인 삼성의 이건희는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모두 정직해야 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놓고 떠들어댄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다. 양심이란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다. 단순히 생계의 방편으로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만들어졌던 돈이 그 자신의 목적이 되어 버렸고, 그 어떤 것도 도대체
진정시킬 수 없는 세상 일반의 물릴 줄 모르게 지속되는 한정 없는 욕구로 변해 버렸다. 참으로 슬픈 세상이다. 우리는 자본의 밑바닥에서 타락된 인간의 성향과 전도된 의지, 다른 사람보다 더 소유하고, 자신의 몫 이상으로 소유하고 싶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픈 끝없는 인간의 소유욕을 발견한다. 이런 전형적인 부정의(不正義)의 화신이 바로 삼성의 이건희다. 부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양극화 현상과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부조화를 치유하기 위하여 그리스
정치가 솔론은 국가의 한가운데에 움직이지 않는 석주(石柱)처럼 우뚝 서서 대립하는 집단 간의 조화를 확립하고, 대립되는 힘들 간의
평형을 세우는 일에 진력하였다. "나는 각자에 대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하지 않은 정의를 규정하는, 즉 낮은 지위의 사람과 높은 지위의 사람 모두를 위하여
동일한 법률을 제정했다"고 솔론은 말하고 있다. 부(富)가 여전히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는 시대는 되어서는 안 된다. 부가 명예와 권력을 동반하는 구조는 분리수술을 받아야
한다. 부를 가진 자가 가난한 자들의 방해가 되고, 부를 축적하는 데에 있어 진입 장벽을 형성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이미 자본이 이 사회의 모든 권력을 지배하고 있고, 그 밑에서
일하는 모든 시민들은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삼성의 노예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우리는 돈의 노예인가 삼성의 노예인가? 우리는 삼성공화국에 살고 있는가? 삼성의 시민인가? 누군가는 말한다. 변칙적으로 재산 상속을 하는 것이 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면 범죄이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고. 아무리
법을 거미줄처럼 총총하게 만들어도 권력과 부를 소유한 <강한 자들>은 그 법의 거미줄에 걸려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쳐 놓은 그 거미줄을 찢어 버리고 나아갈 터이니 말이다. 이건희는 당당하게 거미줄 같은 법을 찢어 버리고
유유히 내뺐다. 그것도 법치주의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권하에서. 그리곤 ‘모두 정직하라’는 삼성 십계명 하나를 내려줬다. 이 말은 법이 다른 사람들의 부정의와 탐욕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아테네의 현인 솔론을 조롱하기 위해 아나카르시스가 한
말이다. 총총한 법망(法網)에 걸려드는 자들은 오히려 힘없는 자들뿐이다. 이게 바로 법치주의의 약점이다. 그래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법)는 보다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불법과 비도덕적 행태를 자행하는 삼성이 대한민국의 최고의 기업이란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땅의 기업의 역사에 <사회 윤리적 의식을 내팽개치고 역사의식이란 전혀 갖지 못한 채, 한 때는 잘나가던 그저 돈벌이
잘하는 기업이었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원들은 황제인 회장에 복종하는 노예들이었다>고 기록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김용철, 언론 그리고 김상봉 그러나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은 삼성이 '한 때 잘 나가는 그저 돈벌이 잘하는 기업에
불과하고, 그 밑에 일하는 사원들은 황제인 사장에 복종하는 노예들이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게다가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는 <경향신문>에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를 소개하면서 삼성 및 이건희 전 회장을 강하게 비판한 칼럼(‘삼성을 생각한다’, 프레시안과 무브온 21, 서프라이즈
참고)이 ‘신문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된다’면서 칼럼을 게재할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고 한다.
삼성은 정치권력, 경제권력, 언론권력을 장악하고, 종국엔 전 국민을 삼성공화국의 노예로 전락시켜 복종하며 살아가기를 강박하고
있다. 전 국민의 삼성화, 전 국민의 노예화, 이것이 진정 삼성 이건희가 원하는 궁극적 목표이다. 이번 일을 두고 김상봉은 <경향신문>을 비난하기보다는 도리어 진정한 독립 언론의 길을 걷도록 더 열심히 돕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를 표방하는 경향신문마저도 삼성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는 그저 소소한 잔털에
불과했음을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분명하게 알았다. 무언의 압력으로 김용철 변호사의 책 광고를 내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보이지 않는 삼성의 막강한 권력이
거미줄처럼 총총하게 이 사회 곳곳에 퍼져 감시하는 안테나로 작동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은 <대한민국의 모든 주체들이 자연스럽게 삼성의 노예화로 진행되고
있고, 이미 이 나라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비판적 언론을 포함한 사법부, 검찰, 행정부 등 모든 권력 집단이 삼성에 길들여
있으며,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줬다는 것이다.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자본에 권력을 넘긴 오늘의 이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기검열을 할 수 밖에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선 그저 삼성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분명히 알 게 되었다. ‘삼성 관련 기고를 게재 거부한 것은 지금 한국 사회의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김상봉의 말처럼, “지금은 자본 권력이 대신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시민적 자유와 주체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일간지에 광고할 수 있는 지면을 얻지 못하고, 외부 칼럼으로 기고한 저의 원고가 신문사 자체 검열에서 끝내 게재를
거부당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삼성이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력이 되었다는 것을 웅변해줍니다.” 과연 신성불가침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삼성 이건희는 황제인가? 김상봉은 이건희를 루이 16세와 비교했다. “이건희가 소유한
지분은 0.57퍼센트에 불과하다는데, 그는 자기 머슴들의 배설을 억압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우리 모두의 입과 귀를 가리려
한다. 그러면서 이 짝퉁 루이16세 폐하께서는 황송하옵게도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한다'는 교시까지 내리셨다 한다.” 김상봉의 주장처럼 지금이 “삼성을 해체하고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한국식 자본주의를 타파할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시점이어야 한다.
(cL) 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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