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선생 묘소 일원(충남 기념물 47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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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선생 묘역군 전경. 맨 좌측에 김공휘선생 묘역은 봉분 끝만 보입니다. |
조선 중기의 대학자였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선생과 광산 김씨의 중흥을 이룬 양천 허씨 부인(陽川 許氏 夫人), 김철산(金鐵山), 공안공(恭安公) 김겸광(金謙光), 김공휘(金公輝), 김장생(金長生), 김선생(金善生) 등의 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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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선생 묘역 부근에 도착하니 마을 입구에 안내판(위 사진)이 있었습니다. 김계휘신도비는 나오면서 들르기로 하고 도로를 따라서 조금 가보니 우측에 신도비(아래 사진)가 있어서 뒷편에 김장생선생 묘역이 있는 줄 알고 올라가 보았더니 일반 묘역만 있어서 다시 내려와서 신도비 내용을 보니 김겸광선생 신도비였으며, 김겸광선생의 묘역도 이 곳에는 있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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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판을 조금 지나서 도로 우측에 있는 김겸광(金謙光) 신 신도비. 김겸광선생 묘와 신도비는 김장생선생 묘역 우측에 위치. |
다시 도로를 따라서 조금 올라가 보니 이번에도 우측에 이수가 멋진 신도비(아래 사진)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김장생선생 묘일 것으로 생각하고 묘역을 둘러보니 묘역들이 단촐해서 묘비들를 일일이 확인해 보았는데, 김장생선생 묘는 없었습니다. 입구로 내려와서 신도비의 비문을 확인해 보니 분명히 비문에는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 신도비로 쓰여 있는데, 김장생선생의 묘는 이 곳에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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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겸광선생 신도비를 지나면 다시 도로 우측에 신도비가 보이는데 이 신도비가 김장생선생 신도비입니다. |
또 다시 도로를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재실도 보이고 묘역군이 보였습니다. 이 곳이 김장생선생의 묘역이 있었습니다. 신도비가 대부분 묘역 입구에 있는데, 김장생선생의 신도비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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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에 재실과 관리사가 있으며, 그 뒤로 김장생선생 묘역군이 보입니다. |
김장생의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이며, 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장성하여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에게 사사했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창릉 참봉에 천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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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좌측에 봉분 4기가 있습니다. |
▲ 김장생선생 좌측 김선생(金善生)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이어 순릉참봉·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동몽교관·통례원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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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생 묘역 우측, 묘역군 맨 위에 위치한 김장생선생 묘역 전경 |
그뒤 남양부사·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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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선생 묘역 좌우측에서 바라 본 모습 |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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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선생 봉분 뒤에서 내려다 본 묘역 전경 |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가운데 성균사업은 그를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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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선생 묘역 전경. 추석이 이틀 지난 날이어서인지 후손이 제물을 올리고 예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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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선생 묘역에서 내려다 본 양천 허씨 부인 묘역 |
▲ 사계 선생의 7대 조모인 양천 허씨 부인 묘역 전경 |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으로 옮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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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 맨 앞의 봉분이 양천 허씨 부인 묘역이고, 그 위에 있는 봉분이 김장생선생 묘역이며, 좌측은 김선생(金善生) 묘역입니다. |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그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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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 좌측부터 김공휘 묘, 김철산 묘(사계의 6대조), 김철산 부인 안동 김씨 묘, 김선생 묘 |
그뒤 1630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연산에서 83세의 나이로 죽어, 진잠(鎭岑)에 장사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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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선생 묘역군을 한 화면에 잡았습니다. |
묘역은 주변이 소나무숲으로 둘러 싸여 있고 김씨 일가의 묘소와 사당, 비 등이 한곳에 모여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정치·군사·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광산 김씨의 정신적 터전을 이루는 유서 깊은 곳이다. |
김겸광선생 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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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선생 묘역군 우측 산자락에 김겸광선생 묘와 논 끝에 구 신도비가 있습니다. 김겸광은 사계의 5대조인 김국광과 형제 |
김계휘 신도비(충남 유형문화재 110호) |
김계휘선생 신도비는 김장생선생 묘역을 돌아 나와서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마을 안쪽 우측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도비 우측에 묘역이 있어서 김계휘선생 묘인줄 알았더니 묘비를 보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김계휘선생 묘역에는 조부, 증조부 묘도 있다고 하며, 마을 주변에 있을텐에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다음 행선지로 향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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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계휘선생 신도비와 앞면 이수 모습. |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계휘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광산 김씨의 유적이 많이 모여 있는 고정리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김계휘(金繼輝) 선생은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로, 조선 중종 21년(1526)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문장을 짓는 재주가 남달랐다.
명종 4년(154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교리에 임명된 후 사관을 거쳐 이조좌랑에 이르렀다. 한때 파직을 당하여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다시 재등용되어 이조정랑이 되었다. 명종 21년(1566)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 대사헌이 되었으며 예조참판에 올라 경연관이 되었다. 선조 15년(1582)에 생을 마치었으며,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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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뒷면 이수 부분의 조각이 훌륭합니다. 400년이 넘은 석비로는 상태가 아주 양호합니다. |
비는 조각이 있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중기의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에는 4면에 글씨를 새겼으나 많이 닳아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머릿돌의 앞뒷면에는 각각 두 마리씩의 용들이 여의주를 물고 다투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
김장생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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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7-4외 5필 화살표 ↑ 위치 부근에 김장생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