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여행[충남 아산] 윤보선 전대통령 묘역

작성자광나루|작성시간10.02.01|조회수1,517 목록 댓글 0

윤보선 전대통령 묘역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윤보선 전대통령 묘역 전경

윤보선의 호는 해위(海葦).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로 옮겼지만,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20세 되던 해에 독립운동을 위해 여운형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 윤대통령 묘역 입구 전경

▲ 비각

▲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해오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최연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21년 6월 영국 유학길에 올라 1930년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8·15해방이 될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 윤대통령 막내 동생 묘

▲ 윤대통령 부모 묘

▲ 윤대통령 증조부 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과 미군정청 경기도지사 고문직을 맡았다. 1948년 5·10총선거 때 고향인 아산에서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으며, 1949~50년 상공부장관,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을 맡았다.

▲ 윤대통령 고조부 묘

▲ 윤대통령 고조부 묘 봉분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같은 해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정위원, 대한적십자사 총재, 1951년 상이군인신생회 회장,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야당의 대열에 들어서 1954년 제3대 민의원(종로갑, 민주국민당), 같은 해 민주당 중앙위원,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8~60년 제4·5대 민의원(종로갑, 민주당),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거치면서 야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 윤대통령 고조부 묘를 지나면 좌로 계단이 있으며, 우측은 왕릉과 같은 넓은 사초지가 있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붕괴된 후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거절했다.

▲ 계단을 다 오르면 윤보선 전대통령 묘역이 나타납니다.

윤대통령 묘역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5·16군사정변 이후 민주당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1963년 범야(汎野)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주체세력이 결성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을 결성한 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윤보선 전대통령 묘와 묘비

같은 해 11월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5년 5월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위해 민주당과의 통합을 이룩하고,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을 적극 전개했으며, 한일협정이 끝내 체결되자 즉시 무기한 단식투쟁을 감행하고 이후 국회의원직을 사임했다. 1966년 3월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총재에 취임하여 원외(院外) 활동을 계속했다.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한 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윤대통령이 생전에 준비해 둔 자리로 조상들의 묘소보다 위에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등 태우는 형국으로 생각했다는...

1971년 국민당(國民黨) 총재를 지냈고, 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선 후 반체제운동과 민주화투쟁에 앞장서 1976년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9년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인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을 지냈고, 같은 해 경희대학교와 미국 국제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90년 노환으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죽었다. 인촌문화상을 받았으며, 저서로 〈구국의 가시밭길〉이라는 자서전이 있다.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내용 발췌 -

윤보선 전대통령 묘역 위치도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2리                                                           화살표 윗 부분에 윤보선 전대통령 묘역이 있음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23>해위 윤보선 묘와 생가

 

여의주를 문 용이 승천하는 형세
국립묘지 마다한 채 선영서 영면

 ◇해평윤씨 발복의 근원이 된 협판공 윤득실 묘. 스님이 점지한 명당 혈처로 좌청룡 득수를 보호하기 위해 사성을 낮췄다.

아산시에는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제4대 대통령 묘소와 생가가 있다. 그의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들은 한 문중이 어떻게 몇 대에 걸쳐 그토록 번성할 수 있는지 부러워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인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도 연구 대상이다. 구한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해위 친·인척처럼 출세를 많이 한 가문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인명사전에만 50여명이 올라 있다.

 

어찌하면 한 사람의 후손이 이렇게까지 고루 발복해서 잘살 수 있을까. 그 해답을 구하는 풍수가들에게 관심을 끄는 묘 자리가 바로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록에 있다. 해평(海平)윤씨 문중 묘역 내 해위 고조할아버지 윤득실의 묘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득실(협판공)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껴 아산으로 낙향해 살게 되었다. 그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을 당부하며 죽었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취동공(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속에서도 항상 죽을 쑤어 집 앞에 놓고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했다.

 

어느 날 취동공이 둔포 장을 다녀오다가 노상에 쓰러져 기진맥진해 있는 스님을 발견했다. 오가는 길손 모두 그냥 지나쳤지만 집에 업고 와 극진히 보살폈다. 기력을 회복한 스님이 은공을 갚겠다면서 묘 자리를 하나 점지해 주었다. 곧바로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이장했다. 이후 뒤늦게 아들까지 낳고 아산의 해평윤씨 집안은 용광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큰 복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는 일마다 성사되어 재물도 크게 모았고 자손들이 객지에 나가기만 하면 관직에 올랐다. 이 얘기는 설화가 아니고 충남의 내포지역(서해안을 낀 장항선 일대) 옛 어른들 사이엔 널리 알려진 얘기다.

◇해위 윤보선 대통령 묘. 비룡상천의 용맥으로 국립묘지를 마다한 채 이곳 선영에 와 영면에 들었다.

이런 자리다 보니 풍수학인들의 발길은 연중 끊일 날이 없다. 수원에 살고 있는 거봉 김혁규(한국풍수지리중앙회장) 선생을 만나 현장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이다. 동짓날 팥죽 끓듯 변덕 심한 봄 날씨가 겨울보다 더 춥다. 평생을 지관으로 살아 왔다는 그에게 한담(閑談)을 청했다.

 

“사회적으로는 묘지난이 심각하고 국토를 잠식한다 하여 화장을 권하고 있는데 명당 찾아 묘 쓴다는 건 시대에 역행하는 것 아닐까요.”

 

“저 역시 매장을 권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설풍수’한테 걸려 묘 잘못 쓰고 산화(山禍)를 당하느니 차라리 화장을 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입니다. 국토 면적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무연고 묘나 풍수적으로 살격(殺格)인 분묘도 후손들을 위해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옛날 명지관들이 좋은 자리 다 잡아 써서 ‘요즘 명당이 어디 있느냐’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옛 분들이라고 모두 땅속까지 들여다 본 건 아닙니다. 놓친 자리들도 얼마든지 많아요. 천장지비(天藏地秘)의 숨겨진 혈처를 찾아 보자고 간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기자는 유명 지관들과 전국을 누비고 있어 더 잘 아는 일일 텐데….”

 

◇해위 묘에서 바라본 여의주 봉. 용이 승천하려면 반드시 여의주를 무는 법인데 청룡 자락 건너편에 있다.

 

동구 안에 들어 서더니 “산은 멀리서부터 보고 가야 한다”며 지팡이를 들어 먼 산을 가리킨다. 말로만 들어오던 비룡상천(飛龍上天)형의 해위 묘 주봉 능선이다. 때마침 아침 안개가 산 중턱을 가로지르고 있어 상서로운 기운마저 감돈다. 후손들의 정성이 지극해 묘역을 정갈하게 가꿔 놓았다.

 

가장 궁금해 하던 협판공 묘를 찾았다. 일행 모두가 예의를 표하고 혈처를 살피니 뜻밖에도 좌측 사성(묘 양 옆을 감싸는 활개)이 아주 미약하다. 문중 발복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묘역을 왜 이리 조영했을까 싶어 물었다.

 

“이 묘의 좌측 사성을 거의 안 쌓은 건 수국(水局)사대법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간룡(艮龍) 입수에 계좌정향으로 거의 정남향이고, 수구는 갑득수(甲得水)에 미파구(未破口)로 완벽에 가까운 혈처입니다. 이 자리에서 좌측 사성을 높이면 갑득수 좌청룡(동쪽)이 막혀 버립니다. 재혈에 관통한 큰 스님이 수국법을 활용한 것입니다.”

 

조선 개국 초 한양 궁궐터를 잡은 무학대사는 계좌(정북에서 동으로 15도)정향(정남에서 서로 15도)이 아니면 묘를 쓰지 않았을 정도로 큰 자리를 쓸 때 주로 찾는 좌향임을 내 비친다. 마치 비법을 듣는다는 생각에 득파(得破)까지 명시해 달라하니 “계룡(癸龍) 입수에 갑득수 곤파(坤破)면 나머지 국세는 물어볼 것도 없이 묘를 쓰라”한다.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야 우이독경일지 모르겠으나 동업 학인들에게는 비장의 한 수다.

 

◇동사택 구조로 화장실까지 완벽하게 배치된 생가. 이 부근은 근·현대사에 걸쳐 여러 인재를 배출해 낸 문중 집성촌이다.

 

앞의 안산 쪽을 보니 좌청룡과 이어진 바로 뒤에 ‘여의주 봉’이 있다. 용이 승천하려면 여의주를 무는 법이어서 반드시 여의주 봉이 받쳐 줘야만 비룡상천혈이 될 수 있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협판공 묘 바로 위에는 해위가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안식에 든 혈처가 있다.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생전에 명풍수를 불러 잡은 자리라고 한다.

 

고조부묘보다 훨씬 넓은 묘역이나 인공으로 채워진 부토가 많다. 만두로 뭉친 결인목과 혈처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아쉬움으로 용맥을 타고 오르니 우측 멀리에 희끗한 저수지 물이 보인다. 물길이 당판을 감싸 돌지 않고 설핏 넘겨다 본다하여 월견수(越見水)라 하는데 저 물을 좋게 보는 풍수는 없다. 나중에 생긴 저수지나 낚시터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비보로라도 막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일행 중에서 “할아버지 묘 위에 손자 묘가 있으면 역장(逆葬)이라서 못쓰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이를 의식했음인지 후손들이 세워 놓은 안내판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동 태우고 계신 모습이어서 보기에도 좋다 하며 생전에 준비해둔 자리”라고 기록돼 있다.

 

이 같은 장법은 문중 묘역을 조성하면서 자칫하면 친척간 불화로까지 번지는 일인데 그에 대한 예법은 이렇다. 순서가 바뀌었다 해서 도장(倒葬)이라고도 하는데, 수십 수백 년을 두고 조성된 문중 묘역에서는 얼마든지 실례를 찾을 수 있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왕손 묘역에도 도장 사례는 흔하며 흠잡을 일도 아니다. 후일에라도 ‘군왕지지’가 있다 하여 손자 묘 쓰고 후손들이 잘될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생가 대문 옆의 해위 별장. 한때는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하려는 정객들이 밤낮없이 드나들던 곳이다.

 

해위는 어떤 집에서 태어났기에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하고 초대 서울시장, 상공부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국회의원을 지낸 뒤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는가. 그의 생가(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3)에 들어 가면서 거봉이 “곤(坤)득수 을진(乙辰)파구에 수국이 되어 생왕(生旺)이니 좌향은 임좌병향이어야 맞는다”고 한다. 실제로 좌향을 재보니 임좌병향이다. 수국 방향만으로 좌향을 예측해낸 것이다. 양택·음택 가릴 것 없이 길지 구성 요건에는 공통적인 자연이치가 적용된다는 설명이다.

 

생가는 1907년 해위 아버지(윤치소)가 지은 집으로 1984년 12월24일 중요민속자료 제196호로 지정됐다. 후손들이 살면서 자랑스럽게 지켜낼 줄 알았는데 문이 잠겨 있다. 이 마을 박종대(73) 경로당 회장의 안내로 안에 들어가 보니 파(巴)자형 구조로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 구성 가옥이다.

 

동사택으로 남쪽 대문, 동남쪽 부엌, 진방에 화장실이 있으니 좋은 방위 조건을 모두 갖춘 양택지다. 여기에 우물은 포태법상 욕(浴) 방향에 자리하고 있어 가뭄에도 마를 일이 없는 융취수다. 해위는 이곳에서 10세까지 살다가 서울 종로구 안국동 8번지의 100칸짜리 저택으로 옮겨 성장하게 된다.

 

구중궁궐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허가 되는 법―. 풍우에 창문이 찢기고 부서져 있다. 인간의 부귀영화와 가문의 영고성쇠가 무엇이던가.

 

그 바로 옆은 제6대 서울대 총장과 학술원 회장을 지낸 윤일선 박사의 생가다. 해위와 사촌간이다. 해위 친·인척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아오면서 ‘외국 유학 안 간 사람 없고 벼슬 안 한 사람 없다’할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1533∼1601)가 해위 10대조며 큰할아버지가 구한말 군부·법무대신이었고 할아버지는 안성군수·육군참모장을 지냈다.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전해지는 윤치호가 당숙이며 아버지는 중추원 의관을 역임했다. 이렇게 일제 치하에서 고루 누리며 잘살다보니 친일파 사슬과 무관할 수 없어 이들 중 일부가 친일행위자 명단에 들어 있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한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는 삼촌이다.

 

해위는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대통령 선거에 두 번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구속됐을 당시는 숙질 간에 갈 길이 달랐던 때이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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