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퍼온] 게시판

파지리크[Pazyryk](카자흐스탄 묘지)

작성자최두환|작성시간11.02.02|조회수448 목록 댓글 2

파지리크[Pazyryk](카자흐스탄에 있는 스키타이인의 묘지 묘지)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으며, 볼쇼이울라간 강 유역과 이어져 있다. 5개의 큰 둔덕과 이보다 좀더 작은 9개의 둔덕으로 이루어진 이 묘지는 BC 5~3세기의 유적으로, 1929, 1947~49년에 발굴되었다. 오늘날 스키타이인이 서아시아와 유럽으로 이주하기 전에 어떤 관습과 기술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가장 풍부한 자료로 꼽힌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3p1033a]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28)동토의 파지리크 고분군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ㆍ무덤 26기… 찬란했던 고대문명 생생히 증언

역사의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끝 모를 수장고(收藏庫)인 알타이의 품에 안기니 알타이에 관한 사색이 주마등처럼 꼬리를 문다. 19세기 초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 200년 동안 연구가 면면히 이어져 왔지만, 그 비밀을 캐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멀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연구결과만 놓고 봐도 알타이는 비록 심산유곡의 험지(險地)이지만 한 번도 폐쇄되거나 격리된 적이 없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알타이는 문명발달의 정상 궤도를 따라 전진을 이어왔을 뿐만 아니라, 동서남북의 각이한 문명요소들을 두루 수용하고 융합하며 응축시켜 왔다. 이것이 바로 알타이가 갖는 문명사적 특징이다.

‘얼음공주’가 출토된 파지리크 고분군 2호분의 외경

 
고르노(러시아) 알타이 지역의 울라링카 유적에서는 100만년 전의 돌 긁개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전기구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인류가 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중기구석기 시대나 후기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많은 유적과 동굴에서는 여러 가지 용도에 쓰인 찍개·돌날·몸돌·뚜르개·찌르개 같은 석기가 나왔고, 사람의 이빨(중기)과 맘모스의 뼈, 여신상과 동물 조각상(이상 후기) 등도 발견되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약 8000년 전부터 시작한 신석기 시대의 흔적으로는 무덤을 비롯한 매장유물이 다수 출토되는데, 그 가운데는 옷 장식·목걸이·낚시·돌창 같은 진일보한 유물이 들어있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 선을 보인 청동기 시대는 초기와 발전기, 후기로 구분될 정도로 시대상이 급변해 풍부한 유물을 남겨놓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위그림이다. 그밖에 청동제 칼과 도끼·창·자귀 및 뼈송곳·절구 등 생활 용기와 이기(利器), 그리고 각종 토기가 다량 출토되고 있다.

알타이가 선사시대에 남긴 풍부한 문화유산은 중단 없이 기원전 700년경에 시작된 역사시대로 계승되었다. 이 시대부터는 광활한 북방 초원지대를 무대로 한 유목기마민족들의 활동에 의해 알타이는 새로운 역사 면모를 갖춰 나간다. 그 첫 주역은 북방 초원지대의 최초 유목기마민족인 스키타이다. 스키타이의 기원이라든가 사회상, 특히 미술공예 등에 관해서는 앞으로 쓰게 될 다른 글에서 얘기하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주로 험준한 알타이를 넘나들면서 스키타이가 동·서 문명교류사에 남긴 족적을 살펴볼 것이다.

‘얼음공주’의 복원 모습.

스키타이는 페르시아 문화를 비롯한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그리스 고전 문화를 흡수하고 융합해 고유의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창출하고 그것을 동·서방에 전함으로써 고대 문명교류의 한 장을 빛나게 수놓았다. 좁은 의미에서의 스키타이 문화는 흑해와 코카서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활동한 스키타이에 의해 개화된 문화를 말한다. 이에 비해 넓은 의미에서의 스키타이 문화는 서쪽의 그리스 접경지대에서 동쪽의 알타이 지방까지 이르는 드넓은 지대에서 스키타이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 있었거나 그 영향 하에서 있었던 여러 유목기마민족이 창출한 복합문화를 통칭한다. 유명한 ‘황금인간’을 만들어낸 사카문화(기원전 5~4세기)를 그 일례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이해에서 출발할 때만이 문헌 기록과 출토 유물을 근거로 한 스키타이의 활동상과 그 문화의 전파, 특히 동방으로의 전파를 제대로 구명할 수 있다.

스키타이 문화의 전파에 관한 첫 기록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의 명저 <역사> 속에서 발견된다. 그는 저서에서 스키타이의 동방 교역과 그 루트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자신들이 직접 생산하거나 아니면 페르시아나 그리스에서 수입한 공예품과 장신구들을 동방에 수출하고 대신 알타이 지방에서 채취되는 황금과 중국이나 몽골에서 생산되는 직물류를 서방으로 운반하는 일종의 중계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 교역 루트를 보면 흑해(아조프 해)~돈 강~(동북향)볼가 강 중류~(동북향)우랄 산맥~(동남향)이르티쉬 강~(동남향)알타이 산맥 남쪽 기슭까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이 바로 스키타이의 ‘동방무역로’이다.

스키타이가 경영한 동·서방 무역의 흔적은 초기 철기시대를 상징하는 파지리크 고분군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초기 철기시대를 파지리크 시대라고도 부른다. 알타이자치공화국의 울라간 시 북동 16㎞ 지점에 있는 파지리크 강 계곡의 동토층에 거대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 일명 쿠르간)이 몰려 있다. 이것이 바로 ‘파지리크 고분군’이다. 이곳은 해발 1650m의 궁벽한 고산 동토 지대라서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는데다 일 년 내내 동결상태가 유지됨으로써 유물의 보존에 유리하다. 이러한 곳에 문명의 한 보고가 마련되었다는 것부터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호분에서 출토된 벽걸이 모전에 새겨진 기사도(騎士圖).

이 고분군은 러시아 고고학자들인 그라즈노프와 루덴코에 의해 각각 1929년과 1947~49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부장품을 소장하고 있는 큰 무덤은 모두 6기로 알려지고 있다. 큰 무덤 말고도 규모가 작은 무덤 20기가 더 있다. 그래서 파지리크 고분군은 모두 26기의 고분(쿠르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6기의 큰 무덤은 남쪽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지름 47m에 높이 2.2m로, 그 축조에는 1800㎥의 돌이 소요되었다. 이 고분군이 그토록 유명하게 된 것은 북방 초원로를 통해 이루어진 동서문명교류를 입증하는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우리 문화와의 상관성을 예시하는 유물도 포함되어 있어서 특별한 관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이 고분군은 기원전 5~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파지리크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파지리크 문화는 예니쎄이 강 유역에서 번성한 다카르 문화와 알타이 산지에서 흥기한 마이에르 문화를 계승한 다원 문화로서 그 주역은 월지인(月氏人)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분묘의 규모라든가 그것들이 일렬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점, 그리고 호화로운 부장품 등으로 미뤄 볼 때 이 고분군의 피장자는 한 부족의 수장이 아니고, 혈연 같은 어떤 인연으로 관계가 맺어진 대부족 연합의 군장(君長)들로 추측된다. 따라서 그들을 정점으로 하고 파지리크 문화에 바탕을 둔 모종의 왕조가 이곳에 존재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출토된 유물이라든가 쿠르간의 구조 등으로 미뤄 볼 때 파지리크 고분군이야말로 스키타이에 의한 동·서문명의 교류와 접합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유물 가운데는 스키타이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거나, 혹은 그와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유물이 가장 많다. 쿠르간의 축조법과 매장법이 흑해 연안에 산재한 스키타이 쿠르간과 같은 유형이다. 즉 무덤구덩이를 깊게 파서 큰 널방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돌이나 흙을 높이 쌓는 축조법과 말을 배장(陪葬·함께 묻는 것)하는 것은 꼭 같다. 얼어붙은 2호분에서는 스키타이식 미라 처리를 한 남녀의 유해가 발견되었는데, 여자의 미라를 복원하고 보니 하도 귀여워 ‘얼음공주’라고 부른다. 5호분에서는 길이가 70㎝쯤 되는 바퀴통에 바퀴마다 34개의 바퀴살이 달린 높이 1.5m의 스키타이식 목제 4륜 차가 나왔다.

6호분에서 출토된 ‘산자문(山字紋)’의 청동제 ‘진식경(秦 式鏡)’(진나라 거울) 유물.

유물 중에서 스키타이 문화와의 친연성이나 영향관계를 가장 뚜렷이 나타내는 것은 동물문양이다. 동물로는 순록과 산양·야생토끼·호랑이·사자·돼지·백조·거위·수탉·펠리컨(사다새, 일종의 물새) 등 등장한다. 그밖에 그리핀(그리스 신화 속 날개 달린 괴수)을 비롯한 환상적인 동물들의 투쟁 모습도 보인다. 2호분에서 출토된 남녀 유체의 좌우 팔과 정강이에는 이러한 환상적인 동물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5호분에서 출토된 벽걸이 모전에 그려진 스핑크스는 몸통과 두 손은 인간이나 후반신은 사자 상을 하고 있다. 이러한 동물양식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에 속하는 것이다.

한편, 파지리크 고분군에서는 중국과의 교류를 시사하는 중국제 유품과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물도 출토되어 일찍부터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말안장 깔개 용 비단 천을 비롯해 5호분에서 출토된 중국산 자수가 있는 견직물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문양 중에 초목 위에 앉아 있는 수컷 불사조의 문양도 중국의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6호분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 전국 시대의 산자문(山字紋)이 네 개가 새겨진 청동제 거울, 이른바 진식경(秦式鏡)이 발견되었다. 5호분에서 나온 지름 15㎝의 은제 거울도 좀 독특하기는 하지만 진식경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유물의 발굴자인 루덴코는 당시 산지 알타이 주민과 중국 간에는 교역이 진행되어 중국으로부터는 견직물이나 거울 같은 일용품을 수입했으며, 두 지역 귀족 간에는 혼인관계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단도 내렸다.

물론, 두 지역 간에는 직접적인 교역도 있었겠지만, 주로 몽골의 흉노족을 매개로 하여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군의 유물에서 보다시피, 파지리크 일원에 파급된 스키타이 문화는 이곳에만 머물지 않고 멀리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까지도 직·간접적으로 그 여파를 던졌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파지리크 고분군을 비롯한 스키타이 문화 유산과 동형동류(同型同類)의 유물을 여러 점 발견하게 된다. 경주 일원에서 발견된 고신라 왕족들의 묘제는 신통히도 앞에 언급한 스키타이의 적석목곽묘를 닮았다. 신라 고분이나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등자를 비롯한 각종 마구와 장식품들, 수렵도와 동물투쟁도, 여러 가지 동물문양도 스키타이식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와 관련된 유물들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파지리크 고분군에서 발견된 곡옥(曲玉·굽은 옥)이다. 지금까지 신라의 왕관이나 허리띠에 장식품으로 달려 있는 곡옥을 두고 한국 특유의 것이라면서 태아 형태의 그 상징성에 관해 ‘생명’이니 ‘다산(多産)’이니 하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을 가해 왔다. 그런데 그러한 곡옥이 고분군의 5호분 벽걸이 모전에 그려진 기사도(騎士圖)에 나타난다. 관을 쓰고 앉아 있는 대머리 샤먼(혹은 여신) 앞으로 다가가는 기사는 튜닉형의 짧은 두루마기를 입고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르고 큰 코를 가진 용모로 보아 분명히 알타이 현지인이나 동양인은 아니고 아리안계통의 인종이다. 이 대머리 샤먼은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말한 유목 스키타이(일명 왕령 스키타이)보다 더 동쪽, 높은 산맥 너머에 사는 ‘아르기 파이오이’, 즉 ‘대머리 인종’(알타이 인종)이다.

우리의 관심은 말의 콧잔등과 가슴에 각각 하나씩 달려있는 푸른색 곡옥이다. 이 그림의 도안은 신좌(神座)에 앉아 있는 샤먼으로부터 신적 권위를 하사받는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말의 장식품으로 쓰인 이 곡옥은 신으로부터의 생명 보호를 갈구하는 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한 고고학자의 견해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네 곡옥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촉구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러한 기사도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궁전 페르세폴리스의 조각도나 안장에서도 발견된다.

시·공간적으로 숱한 격차를 두고 두 지역 간에 이러한 문화적 공유성(보편성)이 있었다는 것은 서로의 영향관계나, 아니면 주인공들이 유사한 사유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이른바 ‘심리적 공통성’ 이론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스키타이와 우리 겨레 간의 문화적 상관성을 시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init (); /*폰트*/
[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바로가기 ]
(27)바위그림의 보고 알타이
(26)흐미의 고향 홉드에서
(25)몽골은 어떻게 갈라졌는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8181732405&code=900306]

 

파지리크 문화

 찾아가기 : http://blog.naver.com/bcpty/90097687155

 

고르노 알타이 공화국 :

드넓은 초원을 품에 안은 유목민의 후예들

 

중앙 아시아의 깊숙한 오지에 솟아오른 알타이 산맥은 러시아와 몽골, 카자흐스탄, 중국 등 네 나라의 국경이 마주치는 곳에 걸쳐 있다. 때문에 이 나라들은 모두 자기 영토에 알타이라는 이름이 붙은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지명을 4개 국가에서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접근하기 어렵고 외부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은 러시아쪽의 고르노알타이 (Gorno-Altai) 자치구. 산을 뜻하는 ‘고르노(Gorno)’ 라는 접두사가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3~4천m급 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지는 험준한 산악지방이다.

시베리아 남부에 위치한 고르노알타이에는 잊혀진 종족, 사라져 가는 민족인 알타이족이 살고 있다. 러시아 쪽 통계에 따르면 고르노알타이의 알타이어계 주민은 대략 5만 명. 하지만 이중에서 진짜 알타이족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알타이인은 이곳이 본향인 투르크족, 즉 오늘날 터키 사람들의 직계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알타이에서 발흥한 기마 유목민족인 투르크는 1천여 년 동안 서쪽으로의 이동을 거쳐 아시아의 초원 지대가 끝나는 유럽과의 경계에 큰 나라를 건설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돌궐족으로 기록된 그들의 선조는 고향인 알타이를 지키고 있다가 한없이 축소되어, 이제는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소수민족 중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현재 남아 있는 알타이족도 러시아인들과의 혼혈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10여 년 전, 고르노알타이 자치구 중에서도 몽골에 가까운 동남부 지방이 알타이 공화국으로 독립하기는 했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민족의 정체성을 돌이키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이제 순수한 혈통을 지닌 알타이족 5백여 명만이 알타이 산록의 오지에서 아직도 조상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방식 그대로 유목 이동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유목민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오브강의 최상류인 아르굿천이 급류를 만들며 흘러내리는 알타이 산맥 북쪽 기슭. 산악지대라면 평지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산과 산 사이에 고원분지가 펼쳐져 드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지형적으로는 산악이면서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와 풍습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 모습 그대로이다.

전형적인 알타이족인 아다로프 씨의 농장에는 6가구가 한데 모여 가축을 기르며 살고 있다. 이들은 여름이면 높은 산지로 올라가 가축을 방목하다가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저지대의 마을로 내려와 겨울을 보낸다. 주거지를 옮길 때 사용하는 박트리아 쌍봉 낙타는 알타이의 험난한 지형에서 요긴한 교통수단이 된다.

이런 생활방식에 따라 거주지도 겨울철에는 통나무나 판자를 엮어 만든 집에 살지만 다른 계절엔 전통적 이동식 천막인 유르트에서 생활한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알타이산을 배경으로 푸른 초원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유르트와 양떼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물론 이들의 생활은 겉보기처럼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름철에 적당한 비가 내리고 풀들이 알맞게 자라면 기르는 가축들도 살이 찌고 생활이 편하지만 반대로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기도 한다. 겨울철에는 내륙 아시아의 거친 기후에 그대로 노출되어 가축들이 동사하는 경우도 생긴다. 아다로프 씨는 이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고 산다고 한다.

“사람이나 가축이나 땅의 일부지요.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가축들이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산과 물의 영(靈)에 대한 각별한 믿음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알타이인들의 정신세계는 아직도 자연숭배와 민간신앙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산을 넘는 고갯마루에는 반드시 돌무더기가 쌓인 ‘오보’ 가 자리잡고 있는데, 산에 사는 정령을 경배하는 곳인 오보는 우리네 성황당과 같은 역할을 한다. 또 알타이인들은 물에 대한 신앙이 각별해서 마을의 주민들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뒷산의 계곡을 찾아 치성을 드린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아르잔’ 이라 부르며 성스러운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걱정이 생기면 달이 뜨는 밤에 혼자 와서 아르잔에 몸을 씻는다”는 레냐 할머니는 샘물 근처에서 장난치는 손자들에게 신성한 곳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야단을 치며 나뭇가지에 정성스레 흰 천을 매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래온 듯 나무에는 수 천 개의 하얀헝겊들이 매달려 있었다.

고원지대의 초원에는 가는 곳마다 고대 투르크족들의 돌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규모가 큰 것은 지름이 50m 이상씩 되는 것도 있다.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이 돌무덤은 별다른 건축 기술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초원의 유목민이 남겨놓은 유일한 문화 유산이다. 알타이 산맥 일원에 남아있는 이 같은 유목민 문화를 파지리크라고 하는데 파지리크 문화는 중앙아시아 서부 초원지대에서 알타이로 건너온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인이 이곳 원주민과 융합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

'알타이의 얼음 공주’로 불리는 젊은 공주의 미이라는 바로 알타이공화국의 파지리크 쿠르간에서 출토된 세계적 유물이다. 이처럼 미이라가 얼음 속에 꽁꽁 얼어붙은 채로 발굴되는 것을 고고학계에서는 알타이적 현상이라고 부른다. 알타이 산맥 고원지대는 여름철이 매우 짧아 겨울 동안 얼어붙은 땅이 완전히 녹지 않는다. 이런 기후에서 돌로 덮인 쿠르간의 틈새로 빗물이 흘러 들어가 묘실 내부가 얼음으로 가득 차면서 미이라와 부장품을 냉동고처럼 보관하게 된 것이다.

알타이는 투르크어로 '황금'이라는 뜻이다. 스키타이인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황금 유물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캐낸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알타이는 금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물론 현재의 알타이인들은 황금과는 거리가 멀다. 황금은 커녕 일반적인 생활 필수품까지도 이곳에선 쉽게 소유할 수가 없다. 가장 가까운 대도시라는 러시아의 노보시비리스크조차 자동차로 며칠을 내처 달려야 하는 곳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드넓은 초원과 수량이 풍부한 강, 침엽수가 우거진 삼림 등 이들을 넉넉히 품에 안고 있는 알타이의 대자연은 황금보다 더 귀한 재산이 아닐까?

[http://cafe.daum.net/gumioutdoorclub/P7vk/14?docid=1FB61|P7vk|14|20081225015655&q=%C6%C4%C1%F6%B8%AE%C5%A9&srchid=CCB1FB61|P7vk|14|20081225015655]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이호근 | 작성시간 11.02.05 아스타나의 전 이름인 아크몰라(Akmola),거대한 왕릉인 피라미드, 파지리크..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묘지가 빠지지를 않는군요. 여담입니다만, 제가 살고있는 서울 상도동 바로 옆에 흑석동이 있는데 이곳에 국립현충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집에서 차로 5분정도로 가면 나오는데 이곳에 박정희,이승만 등 역대 대통령과 6.25 참전용사등 호국영령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 작성자이호근 | 작성시간 11.02.05 또한 현충원 바로 옆에 중앙대와 숭실대등 대학교가 두개나 근접해 있고 현충원 바로 앞으로는 국내 최고의 식수원인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곳의 분위기는 조용함과 국립묘지에 풍겨나오는 엄숙함 그리고 대학교에서 물씬 느껴지는 젊의의 패기와 학구열등이 복합적으로 가미된 독특한 분위기의 도시라고 해야할까요? 그리고 한강을 건너가면 국방부가 있는 용산이 바로 나오는데 새로 이전한 용산국립박물관에서 현재 '실크로드와 둔황' 이라는 주제하에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아스타나-알마티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는 때에 시기적절하게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움을 느끼게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