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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4.06.08|조회수363 목록 댓글 0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자리한 석주 이상룡의 묘이다.

"선생님, 광복사업은 누구에게 맡기시고 가십니까? 통화현, 환인현, 영길현 높은 재를 넘으실 때,

기력이 강건하셔서 독립사업 성공하는 걸 보실 줄 믿었습니다. 나라 일이 암담하니 한 말씀 주십시오!”

그가 임종할 때 임시정부 국민대표 이진산이 요청을 들였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 외람 되게 여러 동지들의 추천으로 중책을 맡아 조그마한 공로도 없이 죽을병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 같아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원컨대 여러 동지들은 외세 때문에 스스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힘써서 이 늙은이의 소망을 져버리지 말게나.
우리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실뿐이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어떤 목적이라도 달성하지 못함을 근심하겠는가?”

석주 이상룡은 국민대표 이진산에게 답을 내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 효도로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평시에 중국 복장을 한 것은 중국에 동정을 얻기 위해 입은 것이지 좋아서 입은 것은 아니었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되니,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때를 기다리도록 하라. 조국이 광복되거든 내 유해를 유지에나마 싸서 선산발치에 묻어라.”

 

 

석주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어릴 때 이름은 상희, 호는 석주이며,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상룡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망설임 없이 의병자금 지원, 대한협회 안동지부 조직, 협동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지자 이번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1911년 1월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너희들도 이제 독립군이다”라며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오십여 명의 가솔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갔다. 그는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의 단체를 설립하거나 이끌었고,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기도 했다.

일찍이 서산 김흥락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히다가 일제가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왜란을 일으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책을 덮고 구국 의병활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군자금을 마련하여 가야산으로 들어가 의병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구식 무기로 일제의 신식 무기를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 신돌석, 김상태 등 의병장이 일본군에 참패하자
 “이는 시세에 어둡기 때문이다”라고 하고서 동서양의 새로 나온 책을 구하여 열심히 읽었다.
신학문으로 서양의 민주제도에 눈을 뜬 후, 먼저 당신의 노비 문서부터 불살라 버리고 종들도 모두 해방시켰다.
 이상룡은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나머지 유인식, 김동삼과 함께 안동에다 협동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민족 자강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8월, 마침내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를 당하자 이상룡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매국 역적들의 목을 처라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빈 하늘에 쏜 화살이었다.

그 해 11월 신민회에서 밀사를 보내와 서간도에 조국 광복운동 국외 기지 건설에 참여를 타진해 왔다.

 

 

임청각 군자정에 걸려 있는 석주 이상룡이 서간도로 떠나기 전 남긴 시 거국음(去國吟)이다.

去國吟 조국을 떠나며

山河寶藏三千里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冠帶儒風五百秋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何物文明媒老敵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렀나.
無端魂夢擲全甌  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已看大地張羅網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焉有英男愛髑髏  어찌 남자가 제 일신을 아끼랴.
好佳鄕園休悵惘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昇平他日復歸留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이상룡에게 만주는 이역의 땅이 아니었다.

"하물며 만주는 우리 단군 성조의 옛 터이며, 항도천(횡도촌)은 고구려의 국내성에서 가까운 땅임에랴.

요동은 또한 기씨(기자)가 봉해진 땅으로서 한사군과 이부의 역사가 분명하다.

(중략) 어찌 이역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그는 1911년 2월 만주로 망명하면서 쓴 기행문 ‘서사록(西徙錄)’에서 이렇게 적었다.

만주는 단군과 고구려의 조상들의 피와 혼이 서려있는 고토였다.

이상룡은 수서(隋書)를 인용해 ‘한사군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수서 양제(煬帝) 본기에는 수(隋) 양제가 113만 대군을 24군으로 나누어 현 북경 지역인 탁군에서 평양까지

오가면서 각 군의 진군로를 명령하였다. 그 진군로에 낙랑·현도·조선·요동 등의 지명이 있다.

이 지역들이 모두 만주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상룡뿐만 아니라 조선의 성호(星湖) 이익(李瀷)도 ‘조선사군(朝鮮四郡)’에서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석주 이상룡은 선뜻 찬동하여 뜻을 굳히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였다.
가까운 일족과 동지에게 은밀히 동행을 권유하자 50여 가구가 따라 나섰다.
1911년 정초, 이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영춘원에 잠시 머물렀다.
먼저 도착한 이동녕, 이시영 선생이 20리 떨어진 추가가에 살면서 이상룡을 찾아와 앞일을 의논하였다.
망명객 이상룡은 토착민과 이질감을 없애고자 당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청국 옷차림으로 고쳐 입고 이름마저 상룡으로 바꿨다.

우선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는 게 급한 일이라, 중국어강습소를 차려서 먼저 배운 사람들을 우리 동포들이 사는 여러 곳으로

보내어 그들을 가르치면서 토착민과 친선을 꾀하였다. 그 무렵 손문이 무한에서 혁명군을 일으키자, 이상룡은 조선족 동포로

정예군 1개 소대를 편성하여 그들을 돕자 혁명정부에서 훈장을 내렸다.

이에 이상룡은 손문을 만나 우리 동포를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손문이 크게 호응하여 이때부터 중국관리와 토착민이

우리 동포를 믿고 우대하게 되었다.경학사 창설대회를 일제 앞잡이가 정탐할까 염려하여 대고산 속에서 가졌다.

이때 이상룡이 경학사 취지서를 낭독하자 거기 모인 동포들은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 국경을 넘어온 동포들이 대부분 값싼 황무지를 빌어 화전 농사로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을 보고, 이상룡이 나서서

삼원포 일대의 넓고 기름진 땅을 빌어 억새풀을 베어내고 벼농사를 짓게 하여 비로소 동포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주의 벼농사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상룡이 경학사 창설이래 가장 심혈을 이룬 사업은 남만주 일대에 소학교를 세워 동포의 자질 향상을 꾀하였다.

아울러 조국광복에 이바지할 인재 양성을 위하여 합니하에 신흥학교를 세워서 국내외 청년을 모아 문무를 겸한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신흥학교가 그 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여기서 배출된 인재가 뒷날 항일 전선에 앞장섰다.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으로, 한족회로 개편 발전하였다.

1919년 4월, 만주의 한인 대표들이 모여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총재에 이상룡, 부총재 여준, 정무청 청장에 이탁, 군정청 청장에 양규열, 참모부 참모장에 김동삼, 독립군 사령관에 이청천을

임명하였다. 망명 초기에 함께 일하였던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등이 안창호, 이승만 등과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여운형을 보내와 대동 통합을 요청하였다. 군정부에서는 반대 여론이 높았다.

이상룡은 “나 또한 임시정부를 세우기에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정부를 세웠으니 광복 대도에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대의로써 동지들을 설득하였다. 그 후 정부라는 호칭을 상해임시정부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총재를 독판, 독립군을 의용대로 고쳐 부르면서 본래의 사업을 지속하였다.

1925년 3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에서는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령 중심제로 고쳤다.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국무령을 선출한 결과,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으로 피선되었다.

그 해 9월, 이상룡은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 후, 그 동안 남만주와 중국대륙에서 항일 투쟁에 크게 활약한 김동삼,

오동진,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이유필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했으나,
이들 중에는 동포가 절대 다수인 만주를 떠나서는 국권회복을 할 수 없다고 거듭 사양하여 처음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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