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세상사람들은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라 하며
국은(國恩)과 세덕(世德)이 이 시대의 으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는 나라와 더물어 안락과 근심을 같이할 위치에 있다.
지금 한일합방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하여 이른바 '합방'이 이루어졌다.
우당 이회영이 6형제가 모인 자리에서 중국으로의 망명 결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당 이회영이 6형제를 설득하고 있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6형제가 함께 한 자리다.
네째 이회영이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울 것을 형제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하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세.”
“형님, 그렇게 하십시다.”
“그럼 각자 재산을 처분하는 대로 떠나기로 합시다.”
6형제는 곧바로 재산정리에 들어갔다.
적지 않은 가산이라 부랴부랴 헐값에 처분하는 데도 근 한 달이나 걸렸다.
전답을 포함하여 심지어 조상들에게 제사지내기 위한 용도의 위토(位土)까지 처분하였다.
서울 명동의 YWCA 자리에 있던 집도 부랴부랴 처분하였다.
이 집을 산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었다.이회영은 평소 육당을 아꼈다.
그래서 집도 헐값에 넘기고 집안에 내려오던 수많은 고서들도 육당에게 모두 주고 갔다고 한다.
이들 6형제가 처분한 가산은 당시 화폐로 총 40만원의 거금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했다고 한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 정도라고 한다.
당시 서울역 역사를 짓는 데 180만냥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재산이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이 간다.
1910년 12월 한겨울의 혹한 속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40여명의 대가족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이회영 일가였다. 그때 이회영의 나이 이미 44세였다.
이회영 일가는 을사늑약이 이뤄지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가산을 모두 정리해 일가족 전체가 만주로 향했다.
조선의 경반(서울에 거주하는 양반)과 향반(시골에 거주하는 양반)을 통틀어 최고 명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집안이다.
백사 이항복 이래로 열명의 재상을 배출했다. 아홉명의 영의정과 한명의 좌의정이 바로 그들이다.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했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동안 가세는 기울었다. 식구들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대부분 만주에서 고생고생하다 죽었다.
우당 이회영이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이었다.
일제는 대련에서 우당 이회영을 체포하여 여순 감옥으로 이송한다.
그는 이곳에서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순국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이는 6형제 중 다섯째인 이시영뿐이었다. 귀국한 이시영은 공항에서 회환의 눈물을 쏟았다.
그는 이승만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냈다. 6형제의 손으로는 이종육 전 외무부 영사 이종환 예비역 대령
이종국 전 한국교원대 교수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종걸 국회의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