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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배경 만들기 2 / 윤석산

작성자Jaybe|작성시간05.08.25|조회수121 목록 댓글 0
 

시적 배경 만들기 2 / 윤석산



○배경의 유형과 배경소의 기능


기능적인 배경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경의 유형과 배경소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우선, 배경의 유형을 살펴보면 <신화적>·<사실적>·<심리적>·<창조적> 배경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화적 배경은 이 세상을 <천상>·<지상>·<지하계>로 나누고 서로 이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을 대변합니다. 그로 인해 사물도 사람처럼 말을 걸고 작중 인물을 돕거나 방해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동화나 신비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적합합니다. 그러나 물활론(物活論)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에게는 자칫하면 유치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성인들을 독자로 삼는 작품에서 의인법을 자주 쓰는 작품이 어쩐지 유치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실적 배경은 현실의 세계를 모방적으로 그린 걸 말합니다. 그러나 대상이 존재했던 순간의 무대를 그대로 그리는 게 아닙니다. 실제 세계를 기초로 하되, 화자의 정서나 화제를 부각시키는 데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은 제거하거나 변형시킵니다. 그러므로 사실적인 배경이냐 여부는 모방의 원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도록 그렸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방패연 하나

늙은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다


"아버지"하고 부르면

메아리 대신 솟아오르는 달


고향 하늘 물이 넘쳐

팔월 보름달이 잠긴다.

- 이무원(李茂原), [수몰지구(水沒地區)]에서


이 작품에서 화자는 고향의 댐 속에 잠긴 "늙은 소나무"와 "방패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부르면 메아리 대신 "보름달"이 떠오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소나무에 걸려 댐 속에 잠긴 방패연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화자가 부른다고 달이 떠오를 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배경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심정을 강조하기 위해 어릴 적의 체험을 부분적으로 재조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실적 배경을 택하면 작중 상황을 쉽게 짐작하고,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기가 용이합니다. 하지만 기억의 고집 때문에 불필요한 것들이 끼어들기 쉬우며, 자칫하면 중성적(中性的)이거나 장식적(裝飾的)인 배경(decorative setting)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화자와 화제에 맞추어 재조정하면서, 시적 대상이 존재하던 시공 가운데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모습"이었던 것만 골라 그려줘야 합니다.


심리적 배경은 우리의 의식 속에 드려진 심리적 풍경을 모방적으로 그리는 걸 말합니다. 그로 인해 이 유형은 은유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배경 그 자체가 시적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다음 작품의 배경은 심리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서, 배경 그 자체를 시적 대상으로 삼은 예에 해당합니다.


녹색 페어그라스 저편에서

드뷔시가 가을 나무 그늘에 쉬고 있다

떠오르다 머물러 있는

시간은

흐를수록 희미해지고


오래 바라본다.

베일에 싸인 종소리들의 흔적이

그대 목덜미께를 쓰다듬는 것을

누가 융단 솔로 유리를 닦아낸다

- 조창환, [연가풍으로.2] 전문


이 시인이 직접 현실에서 드뷔시를 만났을 리는 없습니다. 아마 드뷔시의 음악을 듣는 동안에 떠오른 무의식적 환상을 그린 것일 겝니다.


이와 같이 심리적 배경을 설정하면 그를 중심으로 텍스트의 각 요소들이 연결되어 유기성이 강화됩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모습과 달라지기 때문에 시적 긴장이 높아지고 기능적 배경이 됩니다. 반면에, 난해시(難解詩)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입니다.


창조적 배경은 모방의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게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처럼 언어에 남아 있는 사물성(事物性)을 이용하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이런 유형으로는 김춘수(金春洙)의 "무의미시(無意味詩)"나, 이승훈(李昇薰)의 "비대상시(非對象詩)"의 배경을 꼽을 수 있습니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回廊)의 벽에 걸린 청동 시계(靑銅時計)가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 [처용단장] 제1부 3


이 작품에서 "벽"과 "홰나무"가 걸어오는 것만 주목하면 신화적 배경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적 배경은 배경소끼리 인과관계를 맺으면서 인격화되는 반면에, 창조적 배경은 인과관계를 맺지 않으며 현실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와 같이 창조적 배경을 채택하면 시 속의 풍경이 전혀 새로워집니다. 그러나 의미를 중시하는 독자에게는 말장난처럼 보이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풍경소끼리 인과관계를 설정해주면 심리적이거나 사실적인 배경으로 바뀌면서 새로움이 사라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배경소 가운데 우선 시간소들을 의미를 살펴보면, 봄과 가을은 여성성(anima)을, 여름과 겨울은 남성성(animus)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좀더 세분하면, 여성성을 강화하는 봄은 순진·화려·화사함을, 가을은 성숙·고뇌·우울을, 남성성을 강화하는 여름은 성장·기쁨·정열을, 겨울은 정지·좌절·절망·엄숙함을 강화합니다. 그리고 일생과 연관지으면 봄은 유년에서 사춘기까지, 여름은 청·장년기, 가을은 노년기, 겨울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진달래꽃]에서 시간적 배경을 봄으로 잡은 것은 아주 잘 설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화사한 봄날에 이별이라는 테마를 연결시켰기 때문에 더욱 애처롭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 봄이 화자를 어린 처녀라는 쪽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에 말없이 고이 보내는 게 정당화된 것입니다.


하루의 주기 가운데 <빛의 시간>인 낮은 남성성이 강화하고, <어둠의 시간>인 밤은 여성성이 강화합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황혼녘은 여성화의 기점 노릇을 하고, 새벽녘은 남성화의 기점 노릇을 합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 배경은 현실의 것만은 채택되는 게 아닙니다. <진리>·<도>·<윤리> 같은 공적이면서도 도덕적인 화제는 어떤 조건이 이뤄지는 <가정의 시공>을 택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의 시공을 택하면 아무리 격정적인 화제라고 해도 화자는 균형과 절제의 태도를 잃지 않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진달래꽃]에서 그토록 사랑하는 님이 떠나겠다는 데도 꽃을 뿌리겠다고 하는 것은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공간의 유형은 <닫힌 공간>, <열린 공간>, <경계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열린 공간은 남성화, 닫힌 공간은 여성화를 강화시킵니다. 다음 작품은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남성적이라는 이육사(李陸史)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공간의 유형에 따라 성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중략)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맘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황혼]에서


ⓐ의 화자는 자기 노래를 묻어두었다가 "천고" 뒤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에게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성 중에 가장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적 배경은 겨울로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지간한 시련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광야로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인적이면서도 활달한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반면에, ⓑ의 화자는 아주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화된 남성 화자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여성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려야합니다. 우리는 흔히 남자가 외로워할 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서히 감상적 정서가 발동하기 시작하는 황혼의 시간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화자의 위치를 "황혼"녘의 "골방"으로 설정한 겁니다.


이와 같은 배경소들이 화자의 성격이나 행동에 미치는 정도를 따져보면, 공간소보다는 시간소가 더 영향력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소 끼리는 계절보다 하루의 시간대가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공간보다는 시간이 바꾸기 어렵고, 같은 시간도 계절은 선택의 여지가 큰 반면에 하루의 주기는 여지가 적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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