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배경 만들기 3 / 윤석산
○화자와 화제에 맞춰 시간소와 공간소를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작품을 쓸 때 화자나 화제에 딱 들어맞는 배경을 마련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다음의 서정주(徐廷柱)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화제는 벌건 대낮의 성적 욕망입니다. 하지만 대낮으로 설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부담이 뒤따릅니다. 우선 남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이기 어렵다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칫하면 너무 외설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밤으로 설정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밤으로 설정할 경우, 사랑하는 사람과 쫓고 쫓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서, 시인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약화됩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배경은 그대로 유지하되 부분적으로 조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달어…
- 서정주, [대낮]에서
이 작품 대낮으로 설정할 경우 우선 보완해야 할 것은 정서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당은 "밤처럼 고요한"을 비롯하여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라든가, "취해 나자빠진" 같은 구절을 통해 어둠과 잠의 이미지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밤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보완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당은 공간적 배경을 "꽃밭 새이 길"로 정하고,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요한"이라는 이미지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미당의 치밀함은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개연성을 부여해도 화자에게 외설스럽다는 비난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자를 보호하기 위해 아예 의식 상태가 정상이 아니며, 그런 걸 따질 신분도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핫슈를 먹어 취해 나자빠진"이라든가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이 바로 그를 암시하기 위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배경을 조절하는 방법으로는 <첨가>·<왜곡>·<전위(轉位)>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확대>와 <축소>를 추가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대>와 <축소>는 시각 예술에서 유효한 방법일 뿐, 문학이나 청각예술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의 방법을 쓸 경우에는 좀더 자세히 묘사했거나 과장한 것처럼 보이고, 후자의 방법을 쓸 경우에는 독자들이 주목을 하지 않아 원하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첨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거나 부적절할 때 다른 요소들을 보태는 방법으로서, 앞에서 인용한 미당의 작품은 이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곡은 일상적인 풍경을 비틀어 화자의 심리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음 작품이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시계는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을 치더라.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애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더욱 시린 밤은 참을 수는 없는 강가에서 배를 부르며 나는 일어나야 한다. 누우런 아침 해 몰려오는 집에서 나는 포복한다. 진득진득한 목소리로 이름 부른다. 펄럭이는 잿빛,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경련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가 펄럭이게 한다.
-이승훈(李昇薰), [이름 부른다] 전문
일반적으로 벽시계는 열두 번 이상 울리지 않게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열세 점, 열네 점"까지 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과 "이름"이 종잇장처럼 휘날리는가 하면, "밤"이 경련하면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배경은 화자의 의식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리기 위한 일상적 풍경을 왜곡한 것으로서, 화자의 등장 무대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심리 상태를 은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위는 시간이나 공간 또는 어느 카테고리에서 다른 카테고리 쪽으로 옮겨 변형시키는 방법을 말합니다. 다음 작품은 이런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①나는 늑대라는 말을 좋아한다.
"늑대"가 아니라 "느으윽대애"라는 말을 좋아한다.
②느으윽대애라는 말 속에는 눈을 하이얗게 흘기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 가슴 속에는 은빛 갈기를 세운 사내 하나가 살고 있다.
③나는 늑대란 말을 아주 좋아한다. 어두운 지하철 입구
또는 그늘진 빌딩 사이를 걷다가 문득 그 말을 떠올릴 때면
④"느으윽"하고 둥글게 휘어지는 혀 끝과 입천장 사이
아스라한 수묵빛 산등성이가 떠오르고
나는 한 마리 늑대가 되어 은빛 갈기를 세우며 화르르 떤다.
⑤나는 늑대란 말을 아주 좋아한다. "느으윽" 하고 잠시 멈추는 순간
⑥벼랑 끝, 달을 향한 내 울음은 계수나무 가지를 흔들고
이파리마다 가득 고인 달빛이 쏟아져 지상의 모든 것들을 달빛 투성이로 만든다.
-필자, [나는 "늑으윽대애"란 말을 좋아한다]에서
이 작품에서 ②부터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공간이 아니라 언어 안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③에서 다시 현실적인 공간으로 이동하고, ④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결합시키고, ⑤에서는 또 현실로 빠져 나오고, ⑥에서는 다시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위치를 바꾸면 정상적인 관점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드러내는 구실을 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감정을 싣지 않은 "늑대"와 여성들이 자기 애인이나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하는 말인 "느으윽대애"가 다르며, 여자들의 가슴 속에는 늑대 한 마리씩 살고, 거대한 도시 문명에 찌든 남자들은 누구나 그런 여인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늑대가 되고 싶어한다는 거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와 "사내", "늑대"와 "느으윽대애"의 두 세계를 그리기 위해 양쪽을 왔다 갔다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이번 호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번 호에서 배경의 유형과 배경소들의 의미를 이야기한 부분과 세 번째 연재했던 [말하는 시 쓰기의 절차와 방법]에서 두 번 째 항목인 "화자와 화제에 어울리는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라"와 일부 내용이 같다는 점입니다. 이론적인 글을 연재하다 보면 자꾸 이렇게 중복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찝찝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