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하는 사람들은 시에는 어떤 갈래가 있으며, 그에 따른 장단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자기 마음속에 들끓는 시적 정서를 표현할 수 있으면 그만이며, 유형의 차이가 곧 우열의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형의 차이가 우열의 차이는 아니지만, 유형의 차이는 시적 특질에 따라 나누기 때문에 어떤 작품으로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에 속하며, 이미 지나간 유형을 택할 경우에는 아무래도 낡은 작품으로 비쳐질 뿐만 아니라, 문학사적 평가의 기준 가운데 하나가 얼마나 독특한 양식으로 표현했느냐를 꼽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문학적 담화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대중가요나 패션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노래도 다음 시대 젊은이들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노래가 열등한 노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귀에 익어 참신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는 사람은 주제를 선택한 다음에는 그를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종래의 시적 담화의 갈래를 살펴보면, 내면적 형식에 따라 <서정시(lyric)>・<서사시(epic)>・<극시(dramatic poetry)>로 나누지만, 창작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학의 발달에 따라 <서사시>는 소설에, <극시>는 희곡에 기능을 넘겨주고 <서정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서정시의 하위 유형을 외면적 형식에 따라 <정형시(rhymed verse)>・<자유시(free verse)>・<산문시(prose verse)>로 나눌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형시는 이미 죽어 버린 유형이고, 산문시 역시 ‘시적인 내용을 산문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파운드(E. Pound)의 정의에 대해, 엘리어트(T. S. Eliot)가 그와 같이 표현한 게 산문시라면 형식과 내용 사이에 필연성이 없다고 비판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아직도 논의 중인 장르로서, 자유시와 뚜렷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상이 떠올랐을 때,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둘 것은 그 시상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춰 쓸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시상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① 대상에 대해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쓰려는 유형 - 관념형(觀念形)
② 대상의 모습을 그리려는 유형 - 즉물형(卽物形)
③ 대상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적 반응을 쓰려는 유형 - 무의식형(無意識形)
④ 대상의 의미나 모습을 재편성하여 추상적인 논리를 쓰려는 유형 - 기호적(記號的) 상징형(象徵形)
이와 같은 분류가 타당하다는 것은 문학사의 흐름이나 문예이론가들이 시적 담화에 대한 세부 분류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낭만주의 시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쓰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공격하고 나선 이미지즘(Imagism)의 시인들은 대상에 대한 자기 정서나 의미를 말하는 것을 자제하고 모습을 그리려고 하고, 초현실주의시인들은 무의식적 반응을 자동기술(自動記述)하려고 하고, 큐비즘(cubism), 미래파(futurism), 다다(Dada)로 이어지는 전기 모더니즘의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기호 도형 등을 이용하여 자기의 생각을 또 다른 그 무엇으로 재편성하려고 한다.
문예 이론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이다. 신비평 그룹의 지도자였던 랜섬(J. C. Ransom)이나 그의 선배 격인 리차즈(I. A. Richards)와 제자인 워렌(R. P. Warren) 등도 화제의 초점에 따라 분류한다. 랜섬은 의미나 정서 부여는 <감성>이 중심이 되었다면서, ‘관념시(platonic poetry)’로 분류하고, 시적 대상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이성>이 중심이 되었다면서 ‘즉물시(physical poetry)’로 분류하고,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시는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분류한다. 그리고 신비평 그룹에서는 제외했지만, 초현실주의자나 전기 모더니스트들의 경우를 염두에 둘 경우 앞에서 분류한 4가지 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화제의 초점에 따라 시적 특질이 어떻게 달라지고, 장단점이 무엇인가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①관념형
관념형은 담화의 초점을 대상에 대한 의미 부여나 정서적 반응 쪽에 맞춘 유형을 말한다. 이처럼 화제의 초점이 관념 쪽에 맞추어지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정서가 강화되고 명상의 흔적이 뚜렷이 부각된다. 그로 인해 시인들은 시를 쓰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시인이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이야기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적 대상의 모습과 그 대상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비롯한 상황이 추상화되거나 생략된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
- 김소월, 「산유화」 전문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산’, ‘꽃’, ‘새’는 특정감(特定感)을 상실하고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사물로 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한라산’인지 ‘지리산’인지, ‘벚꽃’인지 ‘산나리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사계절 계속 꽃이 피고 지며, 산에 사는 새는 꽃이 좋아 살고 있다는 사실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산의 모습을 자율적으로 떠올릴 수 없으며 정서의 과잉에 빠져 독특한 이미지도 리듬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가 보다 완벽한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①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모습이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바뀌어야 하며, ②시인의 말로 꽃이 핀다는 사실을 아는 게 아니라 독자 스스로 생각하여 깨닫도록 유도해야 하며, ③그를 위해서는 시인의 들뜬 정서를 차분하게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추상화된 사상이나 정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으로서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이와 같이 된 것은 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시 말해 ‘산-꽃’으로 이어지는 자연은 항구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며, ‘새’로 상징되는 자연 속의 삶은 행복한 반면에, 시 속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세속-인간’으로 이어지는 현실계는 덧없고, 그 속에 사는 나 역시 불행하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가 흄(T. E. Hulme)을 비롯한 이미지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난 것도 이런 구조적 허약성 때문이다.
②즉물형
즉물형은 관념형과 반대로서 이성(理性)을 바탕으로 시적 대상의 물질적 외관(外觀)에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한다. 이와 같은 유형은 우선 시인이 들뜬 정서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시적 대상의 모습을 꼼꼼하게 그릴 수 있어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각기 다른 모습을 띄면서 선명하게 부각된다는 장점을 지닌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작품 속의 풍경과 그것들을 형상화해낸 솜씨를 즐기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고뇌와 명상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지고 ‘의미 없는 텅 빈 그림(meaningless picture)’으로 떨어진다는 약점을 지닌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다.
건반 위를 달리는 손가락
울리는 상아(象牙) 해안의 해소(海嘯)
때로는 꽃밭에 든 향내 나는 말굽이다가
알프스 산정(山頂)의 눈사태
- 김광림, 「음악」
이 작품에서 ‘음악’은 앞 작품의 「절망」과 달리 멀리 아프리카 ‘상아 해안’의 만조 시각에 잘게 부서지는 파도나 꽃밭을 짓달리는 ‘말발굽’ 또는 알프스 산정에서 부서져 내리는 ‘눈사태’와 같이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바뀌고 있다.
이와 같이 화제의 대상에 대한 정서와 관념을 배제하고 물질적 감각에 초점을 맞추면 시 속의 사물들은 특정성을 띠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면에 시인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지 짐작할 수가 없다. 흄의 지도를 받아 이미지즘 운동에 앞장섰던 파운드(E. Pound)가 이미지즘 시인들의 그룹에서 벗어나 ‘은유하는 그림(picture of metaphor)’을 추구한 것이나 엘리어트(T. S. Eliot)가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의 이론을 내세우면서 사상과 감정을 융합한 ‘형이상시’를 추구한 것도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③무의식형
관념형이나 즉물형은 모두 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한 것을 표현하려는 유형이다. 이에 비하여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이성적 통제를 풀면 의식의 표면으로 무의식적 심상들이 떠오르고 이들을 받아쓰기 하듯이 자동기술(automatism)하면 시 속의 사물들은 일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초점을 처음 택한 사람들은 1930년대의 이상을 비롯하여 <삼사 문학(三四文學)> 동인들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후반기(後半期)> 동인들도 이런 초점을 취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부분적으로 이런 초점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는 너무 낯설어 시인이 무엇을 의미하려하는 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무의식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본능과 욕망을 노래하게 되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이제까지 가꾸어온 도덕을 훼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다음은 <후반기(後半期) 동인> 중 한 사람인 조향(趙鄕)의 작품이다.
열 오른 눈초리, 한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이얗게 화석(化石)이 되어 갔다.
- 조향, 「EPISODE」 전문
이 작품은 일상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3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되어 있다. 첫째로는 소녀가 손으로 총구를 가렸는데도 쏘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자기 손바닥이 총알로 뚫렸는데 그 구멍을 통해 저편을 바라보면서,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라고 묻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로는 놀란 갈매기들이 산비탈 황토바기에 머리를 처박으며 ‘하이얀 화석’이 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풍경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시인의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풍경을 몽타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면 화자의 행위나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일상적이되 앞 뒤 논리가 맞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은 고정관념으로 가려진 인간의 본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무의식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개성을 확보하기가 용이해진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가 갖는 모호성 때문에 난해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무의식의 이론을 원용하여 ‘총’은 남성 성기, ‘구멍’은 여성 성기, ‘바다’는 ‘모성’으로 해석한다 해도 텍스트 자체가 그런 의미를 지녔다고 확신할 수 없으며 기존 도덕과 이성 세계에 대해 반발하는 심상들을 즐겨 선택하기 때문에 예술의 사회적․윤리적 기능을 외면하기 쉽다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동기술법은 의사가 최면을 건 상태에서 시인의 이야기를 받아쓴다면 몰라도 시인 스스로가 수행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융의 설명대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 <집단 무의식(集團無意識)>이 있고, 그 바깥쪽에 <개인적(個人的) 무의식>이 있고, 그 다음에 <전의식(前意識)>․<의식(意識)>․<가면(persona)>이 둘러싸고 있다면 그 깊은 곳의 무의식을 자동 표출시켜 구어(口語)도 아닌 문자 언어로 기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르똥(A. Breton)이 우연히 ‘한 사내가 창문에 의하여 두 쪽으로 나뉘었다’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한 초현실주의 이론은 일상생활에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무의식적 심상들을 몽타쥬한 것이거나 세속적 논리와 가치관을 배제하고 자유연상(自由聯想)한 결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연상까지 포함시키기로 한다면 시인이 의도적으로 수행한 낯설게 만들기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녹색 페어그라스 저편에서
드뷔시가 가을 나무 그늘에 쉬고 있다
떠오르다 머물러 있는
시간은
흐를수록 희미해지고
오래 바라본다
베일에 싸인 종소리들의 흔적이
그대 목덜미께를 쓰다듬는 것을
누가 융단 솔로 유리를 닦아낸다
- 조창환, 「연가풍으로·2」 전문
이 작품은 무의식 상태에서 쓴 것이라기보다 드뷔시의 음악을 듣는 동안에 떠오른 환상을 기억했다가 논리에 어긋나는 부분들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했거나 아니면 자동화를 막기 위해 이성의 통제하에서 의도적으로 낯설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누가 융단 솔로 유리를 닦아낸다’라는 구절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누군가 융단솔로 유리창을 닦아낸다는 것은 환상을 지우고 현실로 되돌아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의식적 심상은 논리적․인과적 통제를 가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의식의 흐름을 몽타쥬하거나, 자유 연상 또는 낯설게 만들기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④기호적 상징형
전통적인 시학에서 기호적 상징(signal symbol)은 문학 작품에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기호적 상징은 그 체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암호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각 장르의 예술 작품들은 전통적인 매재(material)에서 자주 벗어나고 있다.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언어 대신 기호와 도형을 사용하고, 무의미한 철자들을 나열하기도 한다. 예컨대 입체주의(Cubism)․미래주의(Futurism)․다다이즘(Dadaism) 시인들이 실험적으로 쓴 ‘구체시(concrete poem)’, ‘음향시(poem so-nora)’, ‘꼴라주(collage)와 몽타쥬(montage)의 시’, ‘추상시(abstract poem)’, ‘침묵시(dumb poem)’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따라서 기호적 상징형은 현대의 실험적인 작품들 속에서 발견되는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이상 작품도 그런 예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 작품을 무의식의 반영으로 해석해 왔다. 나열된 숫자들은 개성을 상실한 현대인, 그런 숫자들을 뒤집어 쓴 것은 가치관의 전도(顚倒) 현상, 진단 결과를 나타내는 ‘0 : 1’은 여성 상징(0)과 남성 상징(1)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모두 개성을 상실하고 가치관이 전도된 상태에서 오직 성적(性的)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게 이 작품의 종래 해석이다.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1234567890․123456789․012345678․901234567․890(중략)123․456789012․345678901․234567890․1234567890
진단 0:1
26·10·1931
이상 책임의사(責任醫師) 이 상(李箱)
- 이상, 「오감도 시 제4호」 전문
그러나 이 작품이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보기 어렵다. ‘들끓는 가마솥’과 같은 리비도(libido)에 의해 지배되는 무의식의 세계가 이처럼 규칙성을 띨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숫자들은 이성의 힘을 빌려 대상의 의미나 외관을 제거하고 기호화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는 실험적인 작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유사성(similarity) 속에서 차이성(difference)’을 발견하도록 요구하는 은유적 어법도 추론의 고리를 제거하면 기호화되고 만다. 오르테가(Y. G. Ortega)가 은유란 <A>라는 사물을 <B>라는 사물로 바꿔 보려는 지적(知的) 행위로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본능에서 출발하며, 현대시는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은유를 기본 수단으로 삼는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와 같이 기호적 상징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은 무의식적 심상에 초점을 맞춘 작품과 아주 비슷하게 보인다. 하지만 무의식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은 그 화제를 이루는 작은 단위들이 의식의 검열을 거치는 과정에서 <압축(壓縮)>․<전위(轉位)>․<생략(省略)>․<치환(置換)> 등이 이루어져 인과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일상적 경험의 축적으로서 각 부분은 일상의 모습과 유사해진다. 반면에 기호적 상징에 초점을 맞춘 작품은 그 논리 체계에 접근하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무의식에 초점을 맞춘 것인가 기호화한 것인가 하는 구분은 화제의 작은 단위들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기호적 상징을 구사하면 전통적인 시에서 얻을 수 없었던 새로움과 시적 긴장을 획득할 수 있다. 반면에 논리적 전환 과정이 생략되어 전달이 차단된다. 전통적인 시인들이 기호적 상징을 기피해 온 것은 이런 전달의 차단 때문이다.
파생형과 시적 특질
담화는 하나의 초점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담화가 진행됨에 따라 초점이 이동하고 동일한 대상에 대한 순간적 감각도 <복합 초점 (complexed focus)>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이든 인간의 인식 행위는 단일한 초점에 의하여 이뤄지는 게 아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그 순간 대상에 대한 의미와 정서가 촉발된다. 따라서 순전히 물질적 감각의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도 복합 초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김광균, 「외인촌」)
ⓑ 꽃처럼 붉은 울음(서정주, 「문둥이」)
ⓒ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박남수, 「아침 이미지」)
ⓐ의 주된 초점은 청각적 영상에, 부차적인 초점은 종소리가 지니는 뉘앙스의 시각화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종소리를 공감각화한 것은 물질적 감각에만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원하다는 느낌(관념)까지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와 ⓒ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복합 초점의 유형을 추출하기 위해 <관념형(conceptional pattern)>을 <C>, <즉물형(physical pattern)>을 <P>, <무의식형(unconscious pattern)>을 <U>, <기호적 상징형(signal symbolic pattern)>을 <S>라 하고, 이들을 결합시키면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5개의 복합 초점을 얻을 수 있다.
① 기 본 형 : C・P・U・S (4)
② 1차 결합형 : CP・CS・CU・PS・PU・SU (6)
③ 2차 결합형 : CPS・CPU・CSU・PSU (4)
④ 3차 결합형 : CPSU (1)
그러나 화제의 유형은 좀 더 세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복합 초점은 결국 거리(distance) 이동으로서, 양(量)과 위치(位置)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같은 <CPUS>라고 해도 <Cpus>, <CPus>, <CPUs>, <CpUs>, <CpuS>, <cPus>, <cPUs>, <cPUS>, <cpUs> 등으로 계속 분절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다시 지향성과 결합시키면 보다 많은 유형을 설정할 수 있다.
다음 작품들은 각기 다른 유형의 화제를 택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차이로 인하여 각기 다른 시적 특질을 보이고 있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김현승(金顯承), 「눈물」에서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 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觸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죽음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 그리우리.
- 박두진(朴斗鎭), 「묘지송(墓地頌)」에서
ⓒ새벽 세시 반
몰래 샤갈의 방문을 연다
그때
벽에 걸린 램프를 잡는
바람의 흰 손이
반쯤 내 눈을 가리고
반쯤 내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고양이의
한쪽 눈 속에 기울어지는 수평선
일렁이는 등대의 불빛
기울어지는 술병 속에
떨어져 내리는 암보라의 꽃잎
- 김여정(金汝貞), 「레몬·1」에서
ⓐ의 초점은 관념 쪽에 가 있고, ⓑ는 관념과 물질 양 쪽에 가 있다. 그리고 ⓒ는 관념과 물질을 비롯하여 무의식적 환상 쪽에 가 있다. 초점화 정도를 정하기 위해 주된 것을 대문자로 부차적인 것은 소문자로 표시하면 이들은 각각 <C>, <Cp>, <cPu>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초점을 달리 선택함에 따라 시적 특질이 달라지고 있다. ⓐ는 시인의 말을 빌리면,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을 기독교적 신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신’으로 표상 되는 신이 무엇인가 요구하면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깨끗한 눈물을 드리겠다는 시인의 의지 이외는 어떠한 상황도 짐작할 수 없다. 이처럼 시인의 의지와 형이상학적 고뇌가 잘 드러나면서도 구체적인 상황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이 작품이 화자의 내면에 넘쳐흐르는 관념과 정서에만 초점을 맞추고, 여타의 요소들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는 좀 다르다. ⓐ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나’의 정서를 다루면서도 물질적 외관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작품 속의 사물들은 어느 정도 관념의 껍질을 벗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금잔디 기름진 데 동그만 무덤들’이라던가, ‘어둠 속 무덤에 하이얀 촉루’가 그런 예이다. 하지만 엘리어트가 말하는 형이상시라고는 보기 어렵다. 초점 분류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관념과 물질적 감각이 ‘통합(fusion)’된 상태가 아니라, 관념을 보조하는 차원(Cp)에 머물고 있으며, ‘기상(conceit)’과 ‘절연(dépaysement)’의 이질적 결합이 아니라 유사성(similarity)에 의한 동질적 결합이기 때문이다.
ⓒ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시인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아주 환상적이고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물질적 감각(P)을 강화하고, 고르게 초점화한 것은 아니지만 관념적 요소(c)와 무의식적 요소(u)를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시를 살펴보면 이 네 가지 초점을 취하는 작품들이 드물다. 서정주의 초기시가 가장 많은 초점을 포괄하고 있으나, <CPU>로서 <S>를 배제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 스스로가 ‘생명파(生命派)’라고 일컬었듯이, 생명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것으로 보이는 <S>를 배제한 데 원인이 있다.
다음은 필자가 모든 초점을 포괄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써 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신문을 집어 들었다. 조르주 무스타키가 카운터 뒤편 흔들이 문을 밀고 들어선다. 지워버리고 싶어라, 지워버리고 싶어라. 고향도 추억도 지워버리고 싶어라. 뭐 드시겠어요? 어두운 강물 저 편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온 마녀같이 클로즈업된 레지의 얼굴. 광고속의 나타샤 킨스키는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웃고. 이제쯤 그녀는 샤워를 끝내고 콤팩트를 꺼내들 꺼야. 지워버리고 싶어라, 지워버리고 싶어라. 사랑도 추억도 지워버리고 싶어라. 두 뺨을 두들기는 은어같이 하이얀 손. 자주 한눈을 파는 목관악기 주자는 반음씩 이탈하고. 지워버리고 싶어라, 지워버리고 싶어라. 사랑도 미움도 지워버리고 싶어라. 팽창하는 거시기와 유방. 인간에겐 정말 사랑이란 게 존재하는 걸까? 지금쯤 장마가 끝난 고향집 뒷산 굴참나무 숲은 수묵 빛으로 한결 투명해졌을 꺼야. 증시는 연일 폭락. 치안부재, 어제도 어린 여고생이 부모 앞에서 집단 폭행당해. 暴行? 暴行? 暴行! 점점 커지는 신문지의 활자. 지워버리고 싶어라, 지워버리고 싶어라. 고향도 추억도 지워버리고 싶어라. 그녀는 지금쯤 골목길을 빠져 나와 버스를 기다리겠지. 바람이 불 때마다 간당간당 뒤집히는 포프라 이파리, 우두둑 우두둑 떨어지는 햇살 소리에 놀라 양산을 비껴들고 바라보는 하늘. 앞자리 스타킹을 내리는 킨스키를 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무스타키. 무스타키? 킨스키? 스키? 키스? ‘Kiss’의 ‘K'음은 킬리만자로의 눈처럼 날카롭고도 불같은 욕망을,‘S'는 입술 스치는 소리이거나 그 다음에 밀려오는 허망을 돋보이게 만드는 음상징(音象徵)? 그렇다면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빠는 것도 키스가 아닐까? 키스? 스키? 눈부신 입술의 활강. 허공 가득 날리는 눈가루. 키스하고 싶어라, 키스하고 싶어라. 사랑도 추억도 고향집 산그늘처럼 비워두고 키스하고 싶어라. 어머, 오래 기다리셨어요? 음? 음. 인생은 기다리며 사는 것. 사랑을 기다리고, 죽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싶어라, 기다리고 싶어라. 고향집 산그늘처럼 기다리고 싶어라.
- 필자, 「그녀를 기다리며 : 사랑찾기․5」 전문
이 작품의 화자는 조르주 무스타키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다방에 앉아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자기 연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화자는 엉뚱하게도 레지의 얼굴에서 마녀의 얼굴을 떠올리는가 하면, 신문 광고에 등장하는 여배우가 전축 가락 속의 가수와 만나 수작을 거는 환상에 빠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무스타키→킨스키→스키→키스>로 넘어가는 언어유희(pun)를 떠올린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시각적・청각적 인식(P)과, 그에 대한 주관적 의미부여(C), 그런 정서의 고조로 인하여 발생하는 무의식적 환상(U), 논리를 무시하고 작위적으로 추론하는 기호적 상징(S)이 뒤섞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초점이 이동함에 따라 동일 화자가 넷으로 분리되어 각기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첫 번째 화자는 다방 안의 풍경을 살피면서 연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일상적이면서도 이성적인 화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화자는 무더운 여름날 연인을 기다리기가 번거롭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따라서 일상적이되, 감성적인 화자라고 할 수 있다.
또 세 번째 화자는 레지의 얼굴을 마녀의 얼굴로 바꿔 보는가 하면, 음악 속의 무스타키가 신문 광고 속의 킨스키와 만나 수작을 거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신문 기사에서 읽은 성폭행 사건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목욕하는 연인의 나신(裸身)을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화자는 비일상적이며,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무의식적이고도 본능적인 화자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네 번째 화자는 지적이고 작위적인 화자이다. 그는 ‘무스타키’와 ‘킨스키’의 이름에서 ‘키스’라는 단어를 연상하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K’음을 ‘킬리만자로의 눈’같이 날카롭고도 불같은 욕망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S’음은 입술 스치는 소리거나 키스 다음에 밀려오는 허망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음상징이라고 해석하고, 키스는 두 입술이 미끄러지는 ‘활강’이며, 활강이 스키 용어라는 점을 착안하여 허공 가득 눈가루가 날리는 풍경을 추론해 낸다.
시적 충동(poetic impulse) 속에는 아주 이질적이고도 상반된 생각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작품화하면 단순한 것으로 바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언어가 지니고 있는 기호성(記號性)과 순차성(順次性)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시작(詩作) 과정에서 그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초점을 단순화시키는 방법을 채택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시적 충동을 느끼던 순간의 긴장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순간에 끊임없이 이동하던 초점을 하나로 고정시키지 말고 모두 포괄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