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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법문 022-2/퇴옹 성철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16.04.21|조회수50 목록 댓글 0

백일 법문 022-2/퇴옹 성철

2) [대지도론(大智度論)]2


지금까지
여러가지로 설명해 왔지만

일체 모든 견해가
항상한다 거나 단멸한다는
단상(斷常)의 두 견해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과
대논사와 대보살들이
늘상 말해 오는 것입니다.

있다는 생각이 상견이며
없다는 생각이 단견으로

유와 무, 단과 상의 견해만
완전히 여의면
중도 정견(正見)으로
안 들어갈래야 안 들어갈 수 없고
이것이 곧 불법입니다.

만약
유견과 무견,
상견과 단견의 변견에 집착하게 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이란
정법(正法)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반드시
단견과 상견의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일체만법을 총괄하여
우선 근본골자를 드러내 말했고,
이 다음에는
이를 세부적으로 설하였습니다.


“또 다시
상. 무상, 고. 락,
공. 실, 아. 무아 등도 이와같다.

색법(色法)이 한 변이며
무색법(無色法)이 한 변이다
가견법. 불가견법, 유대. 무대,
유위. 무위, 유루. 무루,
세간. 출세간 등이
모든 두 법도 이와 같느니라.”

又復常無常苦樂과
空實我無我等도 亦復如是하여
色法이 是一邊이며
無色法이 是一邊이며
可見法不可見法과
有對無對와 有爲無爲와
有漏無漏와 世間出世間等
諸二法도 亦如是니라.


상(常)과 무상(無常)
내지 세간과 출세간 등의
모든 상대적인 두 법은 다 변견이며,
이 양 변견을 여읜
중도가 반야바라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양변을 말씀하실 때
괴로움(苦)
즐거움(樂)을 거론하셨는데,

그때 “고와 낙을 여읜 것이
중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학자들 가운데는
이때에 고와 낙을 말하고,
중도를 말한 것은
평범한 이야기이지
저 심오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행동을 잘 하라는 말이지
그렇게 고와 낙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불교는 본래
대승불교나
일승교(一乘敎)에서 말하는
저 심오한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보통 고락이라 하든지
선악이라 하든지
이런 행동적인 면에서
말하는 것이지
심오한 철학적 의의를
가진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고와 낙을 실제로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구든지 고락의 문제를
끝까지 추구하면
참으로 진여를 깨치기 전에는
그리고
유무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기 전까지는 ,
고락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설사 어느 정도의 법을 깨달아
삼계(三界)의 분단생사(分段生死)를
완전히 해탈하여
자재한 몸을 얻었다 해도
실제로 대열반을 증득한
부처님의 경지에서 볼 때는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분단생사에서 볼 때는
그것이 즐거움(樂)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열반에서 볼 때는
변역생사라는 이것도
실제로는 괴로움(苦)입니다.

즉 아뢰야고(阿賴耶苦)라는 것은
보통 중생이 볼 때는
무심(無心)의 경계가 되어서
자재한 것 같지만

부처님의
대열반, 대자재에서 볼 때는
참으로 큰 고(苦)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이 고락이라는 것을
끝까지 밀고 밀어 추구해 나가 보면
결국 대열반 진여열반을
증득하기 전에는
고락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피상적으로 '고락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 뜻이 깊은 것이 아니다'
라고 평범하게 해석하려는 사람은
실지 고락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유(有)니 무(無)니
하는 이런 것도
어느 정도 심오한
철학적인 색채를 띤 말이지만,
이것은 부처님이
초전법륜 때 말씀한 것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 고와 낙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유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또한
'유위법(有爲法)을 버리고
무위법(無爲法)을 성취하는 것이
근본이 아니냐'
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위(有爲)가 병이라면
무위(無爲)에 국집하는 것도 병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를 여의어서 해탈하고
그 해탈에 집착한다면
그것도 똑같이 병이라는 뜻입니다.

집착하면
무엇이나 다 병입니다.

그래서
유위와 무위, 유루와 무루,
세간법과 출세간법,
불법과 비법을 다 잊어버린 데서
참다운 반야바라밀을 알 수 있고
중도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반야바라밀이란 이름도
원래 설 수 없지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어서
부득이 이름 붙이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명(無明)이 한 변이요.
무명이 다하는 것이 한 변이며,

내지 노사가 한 변이요
늙고 죽음이 다하는 것이 한 변이며,

모든 법이 있음이 한 변이요
모든 법이 없음이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보살이 한 변이요
육바라밀이 한 변이며,
부처가 한 변이요
보리가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復次無明이 是一邊이요
無明盡이 是一邊이며

乃至 老死가 卽一邊이요
老死盡이 是一邊이며

諸法有가 是一邊이요
諸法無가 是一邊이니
離是二邊하여
行中道是爲般若波羅蜜이니라.

菩薩是一邊이요
六波羅蜜是一邊이며
佛是一邊이요
菩提是一邊이니
離是二邊하여
行中道是爲般若波羅蜜이니라.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무엇이든 간에
한쪽으로 집착하면
설사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하여도
열반에 집착하면 병이므로
그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명과 내지 노사가 한 변이고,
이들이 다함도 한 변이며,
제법이 있음도 한 변이고,
없음도 한 변입니다.

보살도 한 변이고
육바라밀도 한 변이며,
부처와 보리도 각각 한 변이니
이것들에 집착하면
마침내는 모두 변견이 되고 맙니다.

무엇이고 간에
집착하면 병이 되므로
부처고 마구니고 할 것 없이
똑같이 버리는데서
실제의 불법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마구니를 버리고
부처를 집착하면
그 병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것까지도
완전히 이탈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참으로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완전히 융화하는
쌍차쌍조한
중도를 행하는 것이
실지의 반야바라밀이고
불교의 정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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