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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신라)

칠지도(七支刀)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10.04.27|조회수151 목록 댓글 3

 

칠지도(七支刀)


일본의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백제왕이 왜왕(倭王)에게 보낸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명문(銘文) 중 일부가 손상되어 있으며, 명문 해독과 해석에 이견(異見)이 있다.


表 :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鐵) 七支刀(綱) 辟百兵 宜(供)供侯王 ■■■■作

裏 :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 聖音故爲倭王(旨) 造傳(示)後世

[註 ( ) 안의 한자는 학자들이 보충한 것이며 이견(異見)이 있다.]

태화(泰和, 太和라고도 봄) 4년(A.D.369) 5월 16일(丙午) 정양(正陽, 양기가 가장 성한 시간, 혹은 丙午正陽을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 氣가 가장 왕성할 때를 나타내는 길상구라고도 함.)에 백번을 두들겨 단련한 쇠로 칠지도(七支刀)를 벼리었으니, 백병(百兵, 온갖 병침과 전란)을 물러나게 하니, 후왕(侯王)에게 이바지함이 마땅하도다. ■■■■ 만들었다.

선세(先世)로부터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진기하게 만든 것이니, 성음(聖音)을 고(故, 반드시, 까닭에)로 왜왕의 어지로 삼아 후세에 전하여 보이게 하라.


≪비교≫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 9월 기사

五十二年 秋九月 丁卯朔 丙子 久氐等從千熊長彦詣之 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 仍啓 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飮是水 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 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 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雖死何恨” 自是後 每年相續朝貢焉

52년(A.D.252) 가을 9월 정묘삭(丁卯朔, 초하루가 정묘) 병자(丙子, 간지로는 10일)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支刀) 1구, 칠자경(七子鏡) 1면 등 종종(種種, 여러 가지 물건) 중보(重寶, 귀중한 보배)를 바쳤다. 이에 깨우쳐 말하기를 “신(臣)의 나라 서쪽에 강이 있는데, 곡나(谷那)의 철산(鐵山)에서 발원하며,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이곳의 물을 마심을 당하여 갑자기 이 산의 철(鐵)을 얻게 되었으니, 이로써 오래도록 성조(聖朝, 어진임금이 다스리는 조정)를 받들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손자 침류(枕流)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우리와 해동의 귀국(貴國, 백제, 혹은 倭라는 견해도 있다)이 통하게 된 것은 하늘이 열어주신 바이다. 이것은 천은(天恩, 하느님의 은혜)이 드리움이요, 해서(海西, 황해도를 이르는 말)를 나누어 우리에게 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의 기틀이 오래도록 굳건하게 되었다. 너희와 마땅히 길이 화호(和好, 화평하여 사이가 좋음)하고, 토물(土物, 토산물)을 거두어 모아 조공하기를 끊이지 말자.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어찌 회한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매년 서로 계속하여 조공(朝貢)하였다.


≪견해≫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은 A.D.252년이며, 칠지도(七支刀)의 泰和4년은 A.D.230년이나, 신공황후기에는 백제왕(근초고왕)의 손자 침류가 칠지도를 전하였으므로 칠지도의 泰和4년은 太和4년으로 고쳐 보아야 하므로 A.D.369년의 일이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침류왕의 당시 나이는 19세이며, 백제와 왜(倭)가 신라와 교혼(交婚)을 통해 화호(和好)하던 시기로 백제와 왜(倭)가 교통함에 장애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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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4.28 근초고왕이 손자인 침류왕에게 전달하라고 한 말을 침류왕이 신공황후에게 전하였다면, 傳言 曰 혹은 言 혹은 云이라고 표현해야 함이 합당할 까 합니다.
    제가 아직 한문문장 해석에 능한 바가 아니어서 잘못이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며, 제가 깨닫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밝은눈님의 고견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검토해보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4.28 문장 일부만을 해석하는 것과, 사서 전부를 해석할 때에는 해석이 달라질 수 있으며, 제가 일본서기 전부를 고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장 일부를 해석함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은 칠지도의 태화4년이 서기 몇년인가를 살펴보고자 함이고, 당시 백제와 왜가 통하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였는데, 남당유고를 살펴보니 당시 백제와 왜가 신라와 교혼을 통해 화호하던 시기이므로 서기369년임이 유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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