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펜을 잡기가 두렵고 책상에 다가서기가 넌더리나는 경우가 있다. 모니터 앞에 앉기도 겁나며, 책장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일 때가 있어, 알 수 없는 파괴의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아니 그곳으로의 접근을 한사코 외면한다. 괜한 증오와 환멸에 휩싸여 냉혹한 저항으로 태도가 바뀌지만, 지나고 보면 어느새 자라난 망상의 종양이 기를 쓰고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주제넘게 완벽한 문장을 갈구해, 터무니없이 음산했던 과욕의 그림자를.
많이 읽고, 쓰고, 보고, 생각하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차분히 읽으며 생각하고, 진정으로 쓰다 보면서(떠올리면서) 적절히 그려가는 것이다. 그 과정이 기계적일 필요는 없으나 습관이 되면 좋다. 먼저 뜻을 불러들이고 문심(文心)의 정체를 올곧게 세워 작풍(作風)을 일으켜야한다. 정신이 맑고 몸이 지치지 않은 상태의 습작은 의외로 많은 과실을 주기도 한다. 그런 날은 철야를 해도 가뿐하다. 이런 과정이 순간순간 쌓이면 어느새 정치한 필력으로 다듬어져 스스로가 글 숲을 태연히 거닌다.
따갑게 짧고 날카로워 숨 막히며, 번뜩여 놀랄 특정한 구(句)나 절(節)들과 마주칠 때, 독자는 물론 작가 자신마저도 시간 앞에 멈춰서거나 빠져들어 곧장 사로잡히고 만다. 울고 웃으며 전율하고 열광하는 문장, 특히 오랫동안 뇌리와 가슴속에 떠나지 않고 지워지지 않을 명문장으로 일군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거저 이뤄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흔희 문재(文才)가 있다든지, 뛰어나다든지 하여 문필가로서 재능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우선 타고난 천부적인 자질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모와 하늘로부터 내려 받은 그 축복이라는 것은 일차적이며 기본적인 요인일 것이다. 다음은 후천적인 능력이다. 이는 인간화가 진행되는 전반기(前半期)에서- 청소년기까지- 사람들과 환경에 의한 직간접적인 소통과 체험의 과정을 필요로 하며 축적될 것이다. 부모와 가족과 그가 속한 집단과 사회, 자연환경 속에서 결정력이 다분히 형성될 것이다. 지적 사고와 인식, 감성적 관찰과 흡인뿐만 아니라 이성에 따른 의도적일 책읽기와 글쓰기의 노력이 결부되어야한다. 특히 이것은 청소년기에 적어도 상당부분 이루어졌다면 더할 나위없는 조건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말과 글이란 것은 분명 그 한계가 있다. 사람들의 말과 글에는 그 사람의 철학과 신념 혹은 의도가 깃들어있는데, 대개 완전무결하지 못하다. 즉 말과 글을 통해 어떤 것의 지향을 호소하고 그 무엇의 주장을 피력하지만, 그 자체가 그 사람의 확고한 사상과 이념을 절대적으로 담보하지 못한다. 결국 현상과 본질, 형식과 내용이라는 개연성과 인과관계, 명분과 실리라는 적합성에 따른 부분적인 전달이나, 한정적인 제시로 밖에 되지 못한다.
말과 글을 통한 쌍방 혹은 다중간의 소통과 이해라는 효용성의 면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이렇듯 말과 글을 수단으로 삼는 화자와 필자로서, 그 당사자들이 처한 상황논리가 더 지배적으로 작용 할 것이다. 예컨대 청년시절 때의 말과 글에는 압도적일 만큼의 확신과 정열이 있다면, 장년의 그것에는 평상수치 이하의 가능과 유보, 또는 그 다른 무엇이 배어있다. 대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