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 왕의 마음을 아시고
다시 몸을 나타내셨다.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법도 버려야 할 것인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 하셨습니다.
어째서 법과 비법(非法)을 버려야 하며,
또 법과 비법은 무엇을 가리킨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병은 깨어지는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는 것이오.
그런데 사람들은 병의 실체가 있는 줄로 압니다.
이와 같이 보는 법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오.
안으로 자기 마음의 본성을 보면 밖으로 집착할 것이 없소.
이와 같은 바른 견해로 법을 보는 것이 곧 법을 버리는 것이오.
비법이라고 하는 것은 토끼 뿔이라든지 석녀(石女)의 자식처럼
사실은 없는 것을 가리키오.
이처럼 집착할 것이 못되기 때문에 버려야 합니다.
여래의 법은 모든 분별과 쓸데없는 논란을 떠나서 있소.
진실한 지혜만이 이것을 증득합니다.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고
차별을 떠난 지혜를 여래라고 합니다.
여래는 진실한 지혜와 하나이기 때문에
분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소.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은
그 대상에 따라 빛깔과 형상을 인식하지만,
여래는 분별을 떠났기 때문에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오.
벽에 걸린 그림 속 사람에게는 감각이 없듯이,
중생들도 꼭두각시와 같아
업(業)도 없고 과보(果報)도 없는 것이오.
이와 같이 보는 것을 바른 견해라 하고,
이와 같이 달리 보는 것을 분별의 소견이라 합니다.
분별에 의하기 때문에 법과 비법에 집착하는 것이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물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고
혹은 등불이나 달빛에 비치는 자기 그림자를 보고
분별을 일으켜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법이라든가 비법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분별에 지나지 않소.
분별에 의지하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허망한 것에 팔려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오.
열반이란 여래의 장(藏)이오,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 깨달음의 선정(禪定)을 얻어야 합니다.”
『楞伽經 羅婆那 勸請品』
“如來常說,法尚應舍,何況非法!云何得舍此二種法?
何者是法?何者非法?
“여래께서는 항상 설하기를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 두 가지 법을 버리옵니까?
무엇이 법이며, 무엇이 법이 아니옵니까?
法若應舍,云何有二?有二即墮分別相中。
有體無體,是實非實,如是一切皆是分別,
不能了知阿賴耶識無差別相,如毛輪住,非淨智境。
法性如是,云何可舍?”
만약 법을 버린다면 어떻게 둘이 있습니까?
둘이 있으면 곧 분별상(分別相)에 떨어지며,
유체(有體)ㆍ무체(無體)ㆍ시실(是實)ㆍ비실(非實)과 같이
일체가 모두 분별이므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무차별 상(相)임을 알지 못하니,
마치 털바퀴[毛輪]가 머묾과 같아 청정한 지혜의 경계는 아닙니다.
법성(法性)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버릴 수 있습니까?”
爾時,佛告楞伽王言:
“楞伽王,汝豈不見瓶等無常敗壞之法,凡夫於中妄生分別。
汝今何故不如是知法與非法差別之相?此是凡夫之所分別,非證智見。
凡夫墮在種種相中,非諸證者。
그때 부처님께서 능가왕에게 말씀하셨다.
“능가왕이여, 그대는 어찌 병(甁:보물이 나오는 병) 등이 무상하게 파괴되는 법을 보지 못하였는가?
범부는 그 가운데서 망령되게 분별하는 마음을 낸다.
그대는 지금 어찌하여 이와 같이 법과 법 아닌 차별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가? 이것이 범부가 분별하는 것이요, 깨달은 지혜로 보는 것이 아니다.
범부는 갖가지 모양 가운데 떨어지지만 모든 깨달은 이는 그렇지 않다.
楞伽王,如燒宮殿、園林見種種焰,火性是一,所出光焰由薪力故,長短大小各各差別。汝今云何不如是知法與非法差別之相?
능가왕이여, 궁전과 동산ㆍ숲이 탈 때 갖가지 불꽃을 보지만 불의 성품은 하나이다. 그러나 나오는 불꽃은 땔나무의 힘을 따라 불꽃이 길고 짧고 크고 작고 각각 차별이 있듯이 그대는 지금 어찌하여 이와 같이 법과 법 아닌 차별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가?
楞伽王,如一種子生芽、莖、枝、葉及以華果無量差別,外法如是,內法亦然;謂無明為緣,生蘊界處一切諸法,於三界中受諸趣生,有苦樂、好醜、語默行止各各差別。
능가왕이여, 한 개의 종자에서 싹과 줄기,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생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밖의 법이 이와 같으니 안의 법도 또한 그와 같다.
말하자면 무명(無明)이 연이 되어 온(蘊)ㆍ계(界)ㆍ처(處)의
모든 법이 생기며, 삼계에서 모든 세계[趣]에 생을 받아 괴로움ㆍ즐거움ㆍ좋고 추함ㆍ말하거나 잠잠하거나 가거나 멈추며 각각
차별이 있다.
又如諸識相雖是一,隨於境界有上中下、染淨、善惡種種差別。楞伽王,非但如上法有差別,諸修行者修觀行時,自智所行亦復見有差別之相,況法與非法而無種種差別分別?
楞伽王,法與非法差別相者,當知悉是相分別故。
또 모든 식(識)의 상(相)은 비록 이것이 하나이나 경계를 따라
상ㆍ중ㆍ하, 염(染)ㆍ정(淨), 선(善)ㆍ악(惡)의 갖가지 차별이
있다.
능가왕이여, 다만 위와 같은 법에만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행자가 관행(觀行)을 닦을 때 스스로 지혜로 행하는 것에서도 또한 차별의 모습을 보는데 하물며 법과 법 아닌 것에 갖가지
차별과 분별이 없겠느냐?
능가왕이여, 법과 법이 아닌 차별상은 모두 상(相)을 분별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楞伽王,何者是法?所謂二乘及諸外道虛妄分別,說有實等為諸法因。如是等法應舍應離,不應於中分別取相;見自心法性則無執著。瓶等諸物,凡愚所取,本無有體。諸觀行人以毗缽舍那如實觀察,名舍諸法。
능가왕이여, 무엇이 법인가?
말하자면 2승(乘)과 모든 외도는 허망하게 분별하여 실체가 있어 제법의 인이 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법은 마땅히 버리고 떠나서 그 가운데서 분별하여 상을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의 법의 성품[自心法性]을 보면 곧 집착할 것이 없다.
병 등의 모든 물건은 범부가 어리석게 취하는 것으로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모든 관행(觀行)하는 사람이 비발사나(毘鉢舍那:觀)로써 여실히 관찰하는 것을 이름하여 모든 법을 버린다고 한다.
楞伽王,何者是非法?所謂諸法無性無相,永離分別。如實見者,若有若無如是境界彼皆不起,是名舍非法。復有非法,所謂兔角、石女兒等,皆無性相不可分別,但隨世俗說有名字,非如瓶等而可取著;以彼非是識之所取,如是分別亦應舍離。是名舍法及舍非法。楞伽王,汝先所問,我已說竟。
능가왕이여, 무엇이 법이 아닌가?
말하자면 모든 법은 성품도 없고 모양도 없다.
영원히 분별을 떠났으므로 실답게 보는 이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경계가 모두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법 아닌 것을 버린다고 한다.
다시 법 아닌 것이 있다. 말하자면 토끼 뿔과 석녀의 아이 등은
모두 성품이나 모양이 없어 분별하지도 못하는데 다만 세속을 따라 이름만 있을 뿐이다. 병 등과 같아서 취하여 집착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식(識)이 취할 바가 아니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것도
반드시 버리고 떠나야 하는데 이를 법을 버림[捨法]과 법 아닌 것을 버림[捨非法]이라 한다.
능가왕이여, 그대가 앞에서 물은 것을 내가 이미 설하여 마쳤다.
“楞伽王,汝言:‘我於過去諸如來所已問是義,彼諸如來已為我說。’
능가왕이여, 그대가 말하기를 ‘나는 과거 모든 여래께 이미 이 뜻을 여쭈었고 모든 여래께서는 이미 저를 위하여 설하셨다’라고 하였다.
楞伽王,汝言:‘過去但是分別,未來亦然,我亦同彼。
능가왕이여, 그대가 말한 과거는 단지 분별일 뿐이요,
미래도 또한 그러하며 나도 또한 그와 같다.
’楞伽王,彼諸佛法皆離分別,已出一切分別戲論,非如色相,唯智慧型證,為令眾生得安樂故而演說法,以無相智說名如來。是故如來以智為體,智為身故不可分別,不可以所分別,不可以我、人、眾生相分別。何故不能分別?以意識因境界起取色形相,是故離能分別,亦離所分別。
능가왕이여, 모든 부처님 법은 분별을 떠났고 이미 일체 분별의
희론에서 벗어나 색상(色相)과 같지 아니하며, 오직 지혜로 깨달을 뿐이며, 중생에게 안락을 얻게 하기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다.
무상지(無相智)로써 설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하고,
여래는 지혜로써 체(體)를 삼고 지혜가 몸[身]이 됨으로 분별할 수 없고 분별의 대상도 될 수가 없다.
아상ㆍ인상ㆍ중생상으로도 분별할 수 없다.
무슨 까닭으로 분별하지 못하는가?
의식은 경계를 인(因) 하여 일어나 색(色)과 형상을 취하기 때문에 분별을 떠났고 또한 분별할 대상도 떠났다.
“楞伽王,譬如壁上彩畫眾生,無有覺知;世間眾生悉亦如是無業無報,諸法亦然無聞無說。
능가왕이여, 비유하면 벽 위에 채색으로 그려진 그림 속의 중생은 알지[覺知] 못하듯이 세간의 중생도 또한 이와 같아 업도 없고
보(報)도 없다.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여 들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楞伽王,世間眾生猶如變化,凡夫外道不能了達。
능가왕이여, 세간의 중생과 범부와 외도는 능히 알지 못한다.
楞伽王,能如是見,名為正見;若他見者,名分別見;
由分別故,取著於二。
능가왕이여, 한 개의 종자에서 싹과 줄기,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생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밖의 법이 이와 같으니 안의 법도 또한 그와 같다.
말하자면 무명(無明)이 연이 되어 온(蘊)ㆍ계(界)ㆍ처(處)의
모든 법이 생기며, 삼계에서 모든 세계[趣]에 생을 받아 괴로움ㆍ즐거움ㆍ좋고 추함ㆍ말하거나 잠잠하거나 가거나 멈추며 각각
차별이 있다.
楞伽王,譬如有人於水鏡中自見其像,於燈月中自見其影,于山谷中自聞其響,便生分別而起取著。
능가왕이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물과 거울 속에서 스스로 그 모습을 보고,
등불과 달빛 속에서 스스로 그 그림자를 보며,
산골짜기에서 스스로 그 메아리를 듣고 분별하는 마음을 내어
집착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此亦如是,法與非法唯是分別;由分別故不能舍離,
但更增長一切虛妄,不得寂滅。
이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법과 법이 아닌 것은 오직 분별일 뿐이다. 분별하기 때문에 능히 버리지도 여의지도 못하고
오직 일체의 허망함만 증장할 뿐 적멸을 얻지 못한다.
寂滅者所謂一緣,一緣者是最勝三昧,從此能生自證聖智,以如來藏而為境界。”
적멸이란 말하자면 한 가지 인연[一緣]이다.
한 가지 인연이란 가장 훌륭한 삼매다.
이것으로부터 능히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自證聖智]가 생기니 여래장(如來藏)으로 경계를 삼는다.”
楞伽經·卷一·羅婆那王勸請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