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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사구死句 와 활구活句

작성자山木|작성시간20.03.02|조회수177 목록 댓글 0

사구死句 와 활구活句


사량분별을 끊어서 바르게 판단하면 活句요,

사량분별로서 파악하면 死句가 된다.


의미가 따라붙고 사량 추리의 여지가 있으면

선법에 있어서 이것은 죽음의 길이라 하여 死句라 하고,

이 같은 뜻과 이치의 길이 통하지 않는 선법을

사는 길이라 하여 活句라 한다.


大抵學者(대저학자)는

須參活句(수참활구)요 莫參死句(막참사구)어다.



『禪家龜鑑』


서산 선사는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 것이오,

사구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이 점은 대혜 선사나 모든 선사가 강조하던 것이다.

간화선의 핵심은 화두를 들어 활구를 참구하는 데 있다.

활구는 산 말이오 참말이며 생생한 말이다.

알음알이가 붙지 않은 말이기에 그렇다.

반면 사구는 빈 말이요 죽은 말이다.

분별이 붙은 말이기에 그렇다.

죽은 말로써는 결코 깨침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巖頭道,

암두(巖頭)스님은 말하였다.


若論戰也, 箇箇立在轉處,

“전쟁으로 논해보면,

각자는 (몸을) 돌릴 수 있는 곳(轉處)에 서 있다.”


又道他參活句, 不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또한 말하였다.


“활구를 참구해야 한다.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활구에서 얻으면

영겁불망(永劫不忘: 영겁토록 잊지 않다)이지만,

사구에서 얻으면 자기 구제도 마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구와 활구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활구란 모든 망상과 분별의식을 초월한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간명하고 바로 질러가는 기연機緣이나 언구를 말한다.


곧 활구는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져

기대거나 더듬어볼 만한 구석이 어디에도 없는 말과 생각의 당처이다.

그것은 당처이되 맛도 냄새도 모양도 없는 텅 빈 당처이다.



원오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莫是卽心卽佛是活句麽 沒交涉

막시즉심즉불시활구마 몰교섭

마음이 부처라는 말이 활구인가? 어림없는 말이다.


莫是非心非佛是活句麽 沒交涉

막시비심비불시활구마 몰교섭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는 말이 활구인가? 어림없는 말이다.


不是心不是佛不是物是活句麽 沒交涉

불시심불시불불시물시활구마 몰교섭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는 말이

활구인가? 어림없는 말이다.


莫是入門便棒是活句麽 沒交涉

막시입문편봉시활구마 몰교섭

상대가 문에 들어오자마자 방을 내리치는 것이 활구인가?

어림없는 말이다.


入門便喝是活句麽 沒交涉

입문편갈시활구마 몰교섭

상대가 문에 들어오자마자 할을 하는 것이 활구인가?

어림없는 말이다.


但有一切言語盡是死句

단유일절언어진시사구

단지 어떤 말이건 있기만 하면 모두 사구이다.


作麽生是活句 還會麽

작마생시활구 환회마

그렇다면 무엇이 활구인가? 알겠는가?


萬刃峰頭獨足立 四方八面黑漫漫

만인봉두독족립 사방팔면흑만만

만길의 봉우리에 외발로 서면

사방 팔면이 온통 암흑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며,

왼쪽으로 가도 옳지 않고 오른쪽으로 가도 옳지 않고

그렇다고 침묵으로도 통할 수 없다.


마음의 길이 끊어진 활구는 팔만대장경의 교리로도

어떤 사상이나 철학적 모색으로도 미칠 수 없다.


활구는 지금 이 자리에서 펄펄 살아 움직이는

본래면목의 언어적 존재방식이다.

말의 그림자가 담겨 있고 분별의 기미가 스며 있으면 사구이다.

말을 따라가면 사구, 즉 죽은 말이다.


자취가 남아 분별거리를 주거나 남의 견해에 휘둘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길이 살아 있는 말을 쫓아 깨닫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유 형태로 이해하는 깨달음이기에 결단코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삶의 당처는 언어나 사유적 성찰로는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사구에서 깨달으면 제 한 몸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화두가 활구가 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이론과 관념의 틀에

예속되면 곧 사구로 전락하고 만다.


세상에는 훌륭한 말씀과 글들이 수없이 많긴 하지만

그것들이 이론에 떨어지고 분별작용에 걸리는 한

모두 사구가 된다.


모든 이론과 관념의 틀은 근원적인 의심을 방해하는 알음알이다.



그래서 원오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他參活句不參死句

-본분종사는 활구를 참구했었지 사구를 참구하진 않았다.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활구로 깨치면 영겁토록 잃지 않지만

사구로 깨치면 제 몸 하나도 건지지 못한다.


若要與佛祖爲師 須明取活句

만약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되고자 할진대 반드시 활구로 깨달아야 한다.


韶陽出一句 如利刀剪卻

소양(韶陽: 운문) 선사는 한 마디 꺼냈다 하면

그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로 자르는 것과도 같았다.


臨濟亦云 吹毛用了急須磨 此豈陰界中事

또 임제 선사도 “취모검吹毛劍을 쓰고 나서 얼른 갈아 두어라.”

하였으니, 어찌 이것이 오음 십팔계五陰十八界 가운데 일이랴,


亦非世智辯聰所及

세상의 지혜와 총명함으로는 결코 미칠 수가 없다.


直是深徹淵源 打落從前依他作解明昧逆順 以金剛正印印定麾金剛王寶劍 用本分手段.

밑바닥까지 깊이 사무쳐 이제껏 남에게 의지해 일으켰던 밝고,

어둡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알음알이를 모두 떨쳐버리고 금강정인金剛正印으로 도장을 찍고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을 휘두름을 본분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所爾殺人須是殺人刀 活人須是活人劍. 旣殺得人須活得人

旣活得人須殺得人.

따라서 사람을 죽이는 데는 반드시 살인 도라야 하며

사람을 살리는 데는 반드시 활인검이라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어야 하며,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圓悟心要』上卷「示華藏明首座」

활구를 참구하여 바로 깨치면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금길인 경절문(徑截門)으로 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간화선의 핵심이다. 그래서 서산 선사는 “참구란 지름길, 빠른 길을 가르치는 활구(參究者 徑截門活句也)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句)'이란 언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비롯한 모든 행위 전체를 가리킨다.

주의해야 할 점은 비록 활구의 공안이라도 참구하는 사람에 따라서 사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화두를 들되 분별심으로 헤아리거나 의심이 없이 들면 그렇게 된다. 결국 의심이 없는 화두나 의심이

제대로 걸리지 않은 화두는 사구일 수밖에 없다.


활구(活句)는 禪이요

사구(死句)는 敎이다.

활구(活句)는 오늘로 내일을 만들지만,

사구(死句)는 어제로 오늘을 부순다.

활구는 오늘을 살게 하지만, 사구는 오늘을 죽일 뿐이다.

활구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적지 않지만,

사구로 어둠의 늪에 빠진 이들은 셀 수조차 없다

활구 참구는 부처가 되는 지름길이고,

사구 참구는 중생으로 남는 길이다.

如蚊子上鐵牛/ 여문자상철우

마치 모기가 무쇠 소에 기어 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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