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 제 친구가 얼마 전에 자살을 했는데, 그 일 때문에 여러 가지로 착잡합니다. 그는 산야신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그대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다. 그대는 삶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그대는 내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들이 전적으로 살고 전적으로 죽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나에게 죽음은 삶만큼 아름답다. 그대는 내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사람들을 거스르는 일이 된다.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며, 거기에 잘못된 것은 없다.
사실, 가끔 삶이 잘못될 수는 있지만 죽음은 잘못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휴식이고 내려놓음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대 친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의 죽음은 그대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것은 그대 의식 속에 그대 또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켰지만, 그대는 그 사실을 수용할 수 없다.
지금 그대는 나에게 어떤 결론을 바란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론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진실만을 줄 뿐이다.
죽음도 삶만큼 진실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은 해로운 것이니 피해야 한다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는 식의 관념을 가지고 산다.
인간은 어쨌든 살아야 하고, 질질 끌려 다니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혹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고통받을 수도 있고 무기력해질 수도 있고 미칠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될 수도 있고, 자기 스스로에게 짐이 될 수도 있으며,
매 순간이 구차스런 고통일 수도 있으나, 삶에 본질적인 의의가 있는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이다. 죽음은 금기다.
그러나 나에겐 그렇지 않다. 나에겐 삶과 죽음이 모두 아름답다. 그들은 같은 에너지의 양면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가 살도록 돕고 그대가 죽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내가 그대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자. 안 그러면 그대는 늘 혼돈스러을 것이다.
누군가가 아프면, 산야신이 병이 들면, 그는 병든 처지에서 나를 신뢰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대를 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대가 병을 이해해서 그것을 관조하고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상태로 조용히 그것을 통찰하도록 돕기 위해 여기 있다. 병도 삶의 일부다.
내가 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가 죽어 가고 있다면 나는 그가 죽도록 도울 것이다.
죽음은 위대한 영광이다 그것은 위대한 절정이 될 수 있다.
죽음이 사람을 괴롭히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에 반대한다.
그대는 죽기를 바라지 않고 영원히 머무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첫번째 문제다.
두번째 문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살이었기 때문에
그대는 내가 그 산야신을 보호했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살을 막아야 하고, 단 한 사람의 산야신도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무엇 때문에?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다
만일 어떤 산야신이 게임이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정했다면, 그를 막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그냥 말할 것이다
"행복하게 춤추며 가라. 슬퍼하며 가지 말라.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행복한 여행이 되도록 하라."
그러나 그 산야신은 결코 내게 묻지 않았다. 설사 그가 물었더라도 나는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자유다. 나는 그대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겠다.
그것은 그대의 삶이고 그대의 죽음이다 내가 뭔데 간섭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모든 걸 아름답게 처리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자살도 아름다울 수 있다.
인도에는 자살을 허용하는 자이나교라는 종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자살을 종교적 행위로서 허용한다! 그들은 산야신들이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면 그것을 허용한다
나는 그것이 가장 위대한 자유의 인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타 종교들은 감히 그럴 용기가 없다.
조만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자살을 기본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기를 원하는데 그를 방해하는 그대, 그대의 법원, 그대와 경찰과 그대의 법은 무엇인가? 그대는 무엇인가?
누가 그대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왜 그 사람이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가? 왜 그가 범죄자의 심정이 되어야 하는가?
왜 그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을 수 없는가? 왜 그 일을 범죄처럼 저질러야 했는가?
자살은 범죄가 아니건만, 그대의 법이 그것을 범죄로 만든다.
자유가 더욱 존중되는 더욱 나은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이 죽기를 원하면 그의 친구들을 초청할 것이다.
그는 며칠 동안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춤추고 노래하며 좋은 음악을 듣고 시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인사하러 다닐 것이다.
어느 날 모두가 함께 모였을 때 그는 간단히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잘 배웅할 것이다. 좋은 세상에서는 자살은 죄가 아닐 것이다.
그대의 자세를 바꾸기만 하면 된다. 나에 대한 것도 명확히 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을 위안하는 일반적인 선생이 아니다. 나의 당부는 진리를 위한 것이지 위안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진리가 불편하다 하더라도 나의 당부는 진리를 향해 있다. 이것이 나에게는 성스런 현상이고 자유다.
그 사람이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대는 그에게 자살할 자유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대는 버티고 있다. 그는 이미 자살을 했는데 그대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대의 문제이지 그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문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는 그대 안에 늘상 있어 왔던 문제를 건드린 것뿐이다. 그를 가게 하라.
작별인사를 하라. 마음을 풀고 그것을 이해하라,
이 슬픔의 순간은 위대한 이해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무언가가 그대 가슴 속 깊은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 일에 대해 명상하라. 여러 측면으로, 여러 각도로 보라. 화만 내고 있지 말라.
슬퍼하고만 있지 말라. 그것이 위대한 명상의 순간이 되도록 하라.
그렇다. 마치 그가 그대를 속이기라도 한 듯이 그대에겐 슬픔이 있고 분노가 있다.
그는 그대의 친구였는데, 그대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는 그대를 속였다! 그런 이유로 그대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나에게도 화를 내고 있다. 내가 어째서 그것을 허용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는 내게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물었더라도 나는 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묻지 않았다.
사실 물을 필요가 없다 그가 가기를 원한다면 가는 것이다.
다 좋다. 자살도 좋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의 첫번째 터부는 섹스였지만, 차차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제 자살은 프로이트를 필요로 한다.
두번째 터부를 부숴 줄 프로이트 같은 이를..... 섹스와 죽음, 이 두 가지가 터부다.
이제 죽음을 즐겁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자살은 잘못된 것이라는, 겁쟁이들이나 자살을 한다는 신화를 깨뜨려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자살이 잘못됐다?실상은 그 반대이다. 겁쟁이들이야말로 삶에 집착한다.
그러나 가끔 사람은 살아야 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시점에 이른다.
그는 신에게 입장권을 되돌려주면서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지켜라. 나는 간다. 나는 이 영화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
조지 버나드 쇼가 연극 관람에 초대되었다. 연극을 보다가 갑자기 그가 일어났다.
작가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반을 보았소,"
작가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 반이 남았잖습니까?"
버나드 쇼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똑같은 사람이 쓴 거요. 그러니 난 다 본 거나 마찬가지요! "
인생의 반을 보고 나서 그 뒤의 절반이 똑같은 인물에 의해 씌어진 것을 알았다면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뭔가?
집에 가서 쉬라!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그것은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대는 슬프고 화가 나 있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그러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산야신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봉사를 하고 갔다.
화내고 슬퍼함으로써 그 순간을 헛되이 만들지 말라. 그것을 명상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라.
왜 그렇게 느끼는가? 그것을 그대의 문제로 만들라.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그것은 초점이 틀렸다. 우리는 그가 왜 자살했는지 자문한다.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그 일로 그대가 상처 받는 것이 문제다.
왜 그가 자살하려고 마음먹었을까? 왜 그가 그대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을까? 그것 역시 그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누구라서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유를 알겠는가?
왜 하필이면 그날 자살하기로 했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는 아주 평화롭게 죽은 듯하다. 공동체의 의사 한 사람이 그가 죽은 다음 가 보았다.
그는 길 위에 아주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마치 잠을 자듯이 한 손을 베고, 마치 소동이 지나간 듯, 폭풍우가 그친 듯.
왜 그가 자살했을까? 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왜 오쇼가 그걸 막지 않았을까? 왜 돌보지 않았을까?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에게 있다. 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어디서 상처를 받았는가? 그대는 상처를 찾아내서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나와의 관계 역시 신뢰의 관계가 아니라
위안과 욕망의 관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관념들을 위해 사용하려 한다.
내가 그대를 보호해야 하며 그대에게 일종의 안전 장치라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어떤 것을 위한 담보물도 아니다. 나는 아주 무책임한 사람이다.
나와 손을 잡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윤리를 따르지 않고 원칙이라는 것을 모르며, 소위 가치라 일컫는 것을 지니지 않고
전적으로 혼돈스러우며 삶과 그것의 혼돈을 완전히 신뢰하는 무책임한 사람에게 왔음을 전적으로 자각해야 한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나와 그대의 관계가 그의 죽음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왜 그대의 신뢰가 흔들리는지,
그대가 뭘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보라.
그 뒤엔 뭔가 깊은 동기가 있는 게 틀림없으며, 그 동기가 그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명상을 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 일을 아주 신선하고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아울러, 그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 그는 벌써 태어났다
엄마를 찾았다. 세상에는 바보 같은 엄마가 수없이 많아서 그대는 그가 다시 태어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3년 내에 그가 아이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가 오는 날 나는 "이 아이가 그 사람이다!" 하고 선언할 것이다. 기다리라!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