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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산책

박세당 신주도덕경 16.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밝은 바를 텅 비울 수 있으면

작성자바랑|작성시간25.01.26|조회수9 목록 댓글 1

제16장

 

 

致虛極, 守靜篤, 萬物並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歸其根. 歸根曰靜, 靜曰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대해 밝은 바를) 텅 비울 수 있으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조용한 바에 대해 편안해지게 되는데,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일어나는 지금, 나는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을) 되돌이켜야 함을 살핀다. 만물은 생겨나서 움직이다, 각자 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사람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조용해지게 해야 한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조용해지게 해야 하는데, 이른바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명命을 되돌이켜야 한다.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명命을 되돌이켜야 하는데,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늘 그러한 이치가 오래 보여지게 해야 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이치를 알아차려야 하는데,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밝은 바에 충족되어야 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오래 보여지는 바가) 늘 그러한 바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망령되게 일부러 일삼게 되고, 흉한 바에 이르게 되지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오래 보여지는 바가) 늘 그러한 바를 알아차리면, 세상 사람들을 품어 안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세상 사람들을 품어 안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면, 크게 사사로운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크게 사사로운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면,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하늘과 더불어 하게 되고, (하늘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된다. (그런데) 하늘과 더불어 하는 바와 하늘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는 도道이다.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바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이치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게 된다.

 

能虛明, 安靜. 於萬物並作之時, 而黙以觀其復. 此, 亦常有欲以觀其徼之意.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밝은 바(明; 有爲)를 텅 비울 수 있으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조용한 바(靜; 無爲)에 대해 편안해지게 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일부러 일삼아) 일어났던 시대, (노자는) 그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되돌이켜야 함을 묵묵히 살폈다. (요컨대, 치허극致虛極~오이관기복吾以觀其復) 이 문장은 (제1장이 일컬은) 상유욕이관기요(常有欲以觀其徼; 언제 어디서나 체體와 용用이 어우러지고, 언제 어디서나 체體와 용用이 어우러지는 바가 변하지 않는 본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명名·德과 저절로 그러한 명名·德을 가지는 바가 있는 바는 그 천지만물이 하나로 찾아들고 되돌아가는 바를 살피고 일삼고자) 한다는 뜻이다.

 

萬物芸芸, 以生以動. 動極, 而靜. 生久, 而敝. 譬猶草木之, 落其葉, 而歸根. 故云歸根曰靜, 靜曰復命.

만물운운萬物芸芸은 (만물이) 생겨나고 움직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물의) 움직임은 (그것이) 끝점에 이르게 되면, 조용해지게 된다. (만물의) 생겨남은 (그것이) 오래 보여지게 되면, 해지게 된다. 비유컨대, 풀과 나무는 그 잎을 떨어뜨리고, (그 잎은) 근원(根; 自然)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근원(根; 自然)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이른바 (유위有爲가) 조용해지게 해야 한다(靜; 無爲). (유위有爲가) 조용해지게 해야 하는데(靜; 無爲), 이른바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自然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명(命; 無爲)을 되돌이켜야 한다.”

 

復命云者, 物之, 生其初本無, 由受命於天, 各得其形, 及動極生久, 而復其初, 如人, 受命, 而復命也.

(요컨대) “복명復命”이 뜻하는 것은 만물은 그 처음(初; 自然·道·體)의 본래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無爲·德·用)에서 생겨나, 하늘(과 땅으)로부터 (그 성性·自然과) 명(命; 無爲)을 받고, 말미암아, 각자 그 모양과 모습을 얻었다가, 이내 (그) 움직임이 (그) 끝점에 이르게 되고, (그) 생겨남이 (그 끝점까지) 오래 보여지게 되면, 그 처음을 되돌이키게 되는데, 따라서 사람은 (그 성性과) 명命을 받은 바로서, (이내 그 성性과) 명命을 되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박세당은 노자가 만물의 복명復性·命의 자연성을 근거로, 인간의 복명復性·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常, 謂常久之理. 言陰陽開闔, 一動一靜, 此, 乃常久之理也.

(복명왈상復命曰常에서) 상常은 (무위無爲가)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이치(理; 道·德·自然·無爲·性·命)를 뜻한다. 음陰과 양陽이 (한결같이) 열리게 되고 닫히게 되는 것, (만물이) 한결같이 움직여지게 되고, 한결같이 조용해지게 되는 것, 그것은 (무위無爲가)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이치 때문이다.

 

能知常久之理者, 足以爲明, 故云知常曰明. 卽所謂觀其復也. 不知此理者, 不能虛明, 安靜, 而忘, 有所動作, 必致凶咎. 知此理者, 知動之有靜, 生之有敝. 付物, 廳其自然. 而我, 無爲焉. 是以於物無所不容.

(무위無爲가)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이치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무위無爲가) 밝은 바(明; 自然·性·命)에 충족되게 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은 것이다. “지상왈명知常曰明.”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노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그 (무위無爲를) 되돌이켜야 함을 (묵묵히) 살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무위無爲가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이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유위有爲에 대해) 밝은 바를 텅 비우거나, (유위有爲가) 조용한 바에 대해 편안해질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망령되게 (일부러 일삼아) 움직이거나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게 있게 되며, (따라서 그는) 반드시 흉한 바와 허물된 바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그 (무위無爲가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이치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움직임이 (일부러 일삼아 그 끝점에) 나아가게 되면, (그것이 일부러 일삼아) 조용해지게 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고, 생겨남이 (일부러 일삼아 그 오래 보여지는 바에) 나아가게 되면, (그것이 일부러 일삼아) 해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을 말미암게 되고,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 性·命)를 따르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그들에 대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 품어 안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是, 爲大公. 大公, 則能王天下. 以公而王天下, 則能與天合, 合天, 則是, 道. 道, 本常久. 如此者, 能沒身而不殆.

(세상 사람들에 대해 품어 안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 이것은 크게 사사로운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일삼는다. 크게 사사로운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크게) 사사로운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따라서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하늘과 더불어 하게 되고, (하늘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되는데, 하늘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 이것이 도道이다. 도道는 본래 (무위無爲가)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바이다. 따라서 (무위無爲가 늘 그러하게 오래 보여지는 이치를 알아차리는 사람) 그는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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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바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01.26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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