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에게 철학의 첫 번째 주제는 오늘 자살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아침에 깨어날 때마다 오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건 노예의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돌덩어리를 꼭대기까지 올리지만, 다시 돌덩이가 떨어지고, 또 다시 돌덩이를 꼭대기까지 올려야 하는 형벌을 사는 시지프스 같은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우리 사는 게 이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영생’의 비결을 묻습니다.(마19:16) ‘어떤 사람’은 오늘 자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날마다 꼭대기로 올려야 할 돌덩이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에게 ‘영생’의 비결을 물었던 겁니다.
가난한 자는 오늘 자살하지 않을 이유를 찾고, 부자는 영생의 비결을 찾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 양극화가 극심하건만, 생명은 모두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은 하나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생명도 하나, 부자도 생명도 하나입니다.
하나밖에 안 되는 생명으로는 모아놓은 재물을 다 쓸 수 없는 부자들이 영생을 꿈꿉니다. 영생의 꿈은 부자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영생을 꿈꾸지 않습니다.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불로장생은 진시황제처럼, 더 이상 오를 게 없고 더 이상 쌓을 게 없는 부자들의 꿈입니다.
부자가 예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19:16) 하나뿐인 생명으로는 쌓아놓은 재산을 다 쓸 수 없어 고민인 부자에게 예수님께서 시원한 답을 주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19:21) 부자의 고민, 즉 더 이상 곡식을 쌓아둘 창고가 없으며, 쌓아둔 재산을 사용할 만큼 생명이 충분하지 않아 야기되는 고민을 예수께서 일거에 해결해 주십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 곡식을 쌓아두기 위해 창고를 짓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 영생하지 않아도 살아생전에 가진 재산을 다 쓸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영생에 관하여 묻는 부자를 만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하여 말씀하십니다.(마19:23,24) 뱀을 구하는 부자에게, 예수께서는 생선을 주신 것입니다.(눅11:11) 영생에 관한 물음에 천국에 관하여 대답하십니다. 부자의 우문(愚問)에 대한 예수의 현답(賢答)입니다. 영생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천국은, 땅을 가진 부자가 이윤 창출이 아니라 고용 창출을 목적으로 경영하는 세상입니다. 천국은 오전 9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5시부터 일한 사람 누구나 “한 데나리온”씩 급여를 받는 세상입니다.(마20:2~8) 한 데나리온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아침부터 일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했어도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보장받는 곳이 천국입니다.
똑똑한 재정 관료들은 이렇게 국가를 운영하면 부도가 날 것이라고 계산할 겁니다. 계산기로는 천국 재정에 관한 답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도 계산기처럼 셈을 잘했겠지만, 자기 재산을 쌓아놓을 만한 창고도 지을 수 없고, 자기 재산을 다 소비해야 하는 생명의 시간도 계수하지 못 합니다.(시90:10~12)
영생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한 데나리온을 받는 천국의 하루를 말씀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자기 한 사람을 위한 영생을 묻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일상을 살피라 하십니다.
똑똑한 부자 청년은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에 관심을 두었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고용을 줄이고, 인건비를 낮춰 이윤의 극대화를 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은 재물은 평생 써도 부족한 것이라, 영생 얻을 방법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9시간 가득 일할 수 있는 ‘사람’과 겨우 1시간 일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부자 청년은 ‘일하는 시간’을 계산하지만, 예수님은 ‘일하는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천국은 전문가도 한 데나리온을 받고 비전문가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박사도 한 데나리온을 받고 무지렁이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국회의장도 한 데나리온을 받고 국회 미화원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나라입니다. 천국에선 ‘사람의 일’보다, ‘일하는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보다 ‘일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천국의 공정입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들, 일하는 효율이 낮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애가 있거나 몸이 아프면 빠른 속도로 많은 성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여덟 시간 일해도 거뜬한 몸이 있는가 하면, 한 시간만 일해도 아픈 몸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의 여덟 시간 노동과 아픈 사람의 한 시간 노동은 그 효율이 다르지만, 그 가치는 같습니다. 부자는 노동의 시간을 계산하지만, 하나님은 노동하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천국에선 ‘사람의 일’보다 ‘일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지 못해 효율이 낮은 차원이 아니라 전혀 생산성 없는 사람에게도 밥을 주십니다. 광야에 길을 내는 사람들은 전혀 생산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광야는 씨앗을 뿌릴 수 없는 땅이라 노동의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또한 광야에 길을 내며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씨앗 뿌린 자리에 머눌지 않기에 열매가 맺는다해도 수확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 씨앗을 뿌리며 길을 내는 사람들이야말로 생산성 없고 비효율적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광야로 길을 내는 사람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의 뜻은 ‘이것이 무엇’입니다.(출16:15)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은 생산성 제로의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모르는 게 있습니다. 모르지만 존재하는 게 있습니다. 똑똑한 재정 관료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는 까닭에,
아파도 미안하지 않겠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당당하겠습니다. 내일을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하늘에선 만나가 내려오고,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 자살하지 않고, 다시 하루하루 일상을 살겠습니다. 굴려 올린 돌덩이가 다시 떨어지는 세상, 돌덩이에 깔려있는 사람을 살피며 살겠습니다. 날마다 가쁜 숨 뱉으면, 천국에 오르는 계단 가뿐하게 오를 것입니다. 이 땅에 임한 천국에 닿은 순간이 영원이며, 살아가며 영원에 닿는 순간들이 영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