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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과천 사냥하러가는 길에 설치한 동작진배다리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4.10|조회수144 목록 댓글 0

창덕궁에서 청계산 자락에 있는 왕실 사냥터로 가는 길에 동작강이 있다.

그때 동작강을 건너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였다. 연산군은 사냥을 좋아하였다.

과천 서울대공원 일대 청계산에는 유명한 왕실사냥터가 있었다.
연산군은 동작나루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강건너 사냥을 다녔다고 전한다.
연산군은 정승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군사들을 모아 사냥을 다녔다.
그때 수많은 물자를 동원하였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기에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연산군 6년 10월 1일의 기록을 보면 영의정 한치형이 아뢰기를,
"청계산에서 사냥하실 때에는 아직 그곳의 벼농사를 대부분 수확하지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사람과 말이 밟아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라고
말하며 사냥 중지를 요청하니 "봄에는 수하고, 여름에는 묘하고, 가을에는 선하고
겨울에는 수하는 것이니, 10월은 바로 사냥할 시기이다. 백성들이 밭을 수확하지
않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과실이니, 이 때문에 사냥을 폐할 수는 없다."라고 억지를 부린다.
여기서 수,묘,선,수라는 것은 각각 봄사냥, 여름사냥, 가을사냥, 겨울사냥을 뜻하는 것으로
일년내내 사냥을 하겠다는 뜻이다.
이 청계산으로 막상 사냥을 떠나면 동원되는 군사의 수가5만명에 달했다.
징집한 군사 3만명에다가 양반들로부터 그 집 노비와 머슴들까지 모두 동원받아 2만명을
마저 채웠다. 이 많은 인원에다가 말을 타고 가야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니 한강을 배 타고
지나간다는 것은 어불성설,그래서 한강에 배다리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동원된 배가 무려 8백척. 임금의 사냥을 위해 엄청난 배가 동원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임금 행차때만 설치한 것 아니라 일년 내내 배다리를 띄워놓고 수시로 사냥을 다녔으니,
8백척의 배는 오로지 다리의 용도로만 쓰였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배다리내용을 자세하게 살피려 한다.
 <연산군일기>에는 부교에 관련된 기사가 부쩍 늘어난다.

연산군이 한강 남쪽의 청계산(淸溪山)으로 왕래하며 사냥하기를 낙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왕이 백성들의 배 800척을 취해서 큰 다리를 엮어 한강에 가로질러 놓고 항상 내관 수십기와

더불어 청계산을 왕래하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王取民船八百艘結爲大橋橫跨漢江每與內官數十騎往來淸溪山射獵爲樂)” -실록 연산군 일기에서-
연산군일기는 또 이렇게 어명을 기록하고 있다. 

“한강 부교의 배는 비록 해빙이 되더라도 철거해서는 아니 되니 선박을 많이 준비하여
훼손되는 대로 보완하여 견고하게 하라(漢江浮橋船雖解氷不可撤去多備舟船隨毁毁隨補使之牢緻)”

우리나라의 큰 강에는 다리를 가설하지 않았다. 나루터를 두고 나룻배로 건넜던 것이다.

강에 다리를 가설한다는 것은 적이 공격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우려가 있어 다리를 놓지않았다.

꼭 다리를 건너야 할 때는 가설했다가 곧 철거할 수 있는 ‘뜬다리’, 즉 부교(浮橋)가 활용되었다.

이러한 부교 중 배나 뗏목을 여러 개 잇대어 엮고 그 위에 널판을 깔아 강을 건널 수 있게 만든 다리가 주교(舟橋)이다.

우리나라에서 주교는 비교적 일찍부터 활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에 이 나루에는 배다리가 없어 행인들이다투어 건너다가 물에 빠지게 되는 일이 많으므로
유사에 명하여 부교를 만든 이후로부터 사람과 말이 평지처럼 밟게 되었다

(先是津無船橋行人爭渡多致陷溺命有司作浮梁自此人馬如履平地)”-고려사에서-

여기서의 나루는 임진강을 일컫는다. 이 기사가 우리나라에서 배다리를 가설하였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사재감 정 김우생을 파직시켰다(罷司宰監正金祐生職). 마전포의 배다리를 감독하여 만들게 하였는데

견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以監造麻田浦舟梁而不堅實也)”-태종실록에서-

지금의 서울 송파에 배다리를 가설케 하였는데, 그 다리가부실하여 감독 책임자를 파직했다는 것이다.
것이다. 이는한 강에 배다리를 가설했다는 실록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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