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妙淸)은 서경의 중인데 뒤에 이름을 정심(淨心)으로 고쳤다. 인종 6년에 일관(日官)인 백수한(白壽翰)이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서 서경을 분사(分司)하자 묘청에게 말하여 스승으로 삼고 두 사람이 음양비술(陰陽秘術)을 칭탁함으로써 뭇사람을 미혹케 하였다.
정지상도 역시 서경 사람으로 깊이 그 말을 믿고 말하기를, " 상경(上京)은 기업(基業)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王氣)가 있으니 주장께서 옮기시어 상경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 하고, 근신(近臣) 내시랑중(內侍郞中) 김안과 더불어 꾀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주상을 모시고 서경에 옮기어 상경을 삼으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홀로 일신의 부귀뿐이 아니라 자손의 무궁한 복도 될 것이다."라 하여 드디어 입에 올려 서로 기렸다.
근신(近臣) 홍이서 이중부 및 대신(大臣) 문공인·임경청도 따라서 화동(和同)하여 마침내 왕께 아뢰기를, "묘청은 성인이요 백수한도 그 다음가는 사람입니다. 국가의 일을 일일이 자문하여 행하고 그 진청(陳請)하는 바를 들어주지 아니함이 없으면 정사가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어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두루 제관(諸官)에게 서명하기를 청하자, 평장사(平章事) 김부식, 참지성사(參知政事) 임원개, 승지(承旨) 이지저만이 서명하지 않고 글을 올려 아뢰니 왕이 비록 의심은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역설하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묘청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신 등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땅을 보니 이는 음양가가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만약 궁궐을 세워 이에 이어(移御)하시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을 것이요,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신첩(臣妾)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드디어 서경에 행차하여 따라온 재추에게 명하여 묘청, 백수한과 함께 임원역 땅을 상보고, 김안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해서 독역(督役)이 매우 급하니, 때는 바야흐로 차고 얼어서 백성들이 심히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서경의 부로(父老)인 검교태사치사(檢校太師致仕) 이제정 등 50인이 묘청 정지상의 뜻에 맞추어 표를 올려 존호(尊號)를 칭할 것과 건원(建元)할 것을 청하였다. 정지상 등이 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으니 이는 신용(神龍)이 침을 토해 내는 것으로서 천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청컨대 위로는 천심(天心)에 응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바람(望)에 따르시어 금나라를 타도하소서."라 하였다. 왕이 어찌하면 좋은가 물으니 이지저가 대답하기를, "금나라는 강적이니 가벼이 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 하니 왕이 그만두었다.
임원개가 상서하여 말히가를, "묘청 백수한 등은 그 간사한 꾀를 부려 괴탄한 말로써 민중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있아오며, 한 두 대신과 근시하는 사람들도 그 말을 깊이 믿어 위로는 임금의 귀를 어지럽히고 있아오니 신은 장차 불칙한 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묘청 등을 잡아와서 저자 거리에서 목을 베어 재앙의 싹을 끊어버리소서."라 하였으나 왕은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우정언(右正言) 황주첨이 묘청 정지상의 뜻에 아부하여 또 친제건원(稱帝建元)할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13년(1135) 묘청이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 병부상서(兵部尙書) 유감, 사재소경(司宰少卿) 조창언·안중영 등과 서경을 거점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부유수(副留守) 최재, 감군사(監軍事) 이총림, 어사(御史) 안지종 등을 잡아 가두고, 가짜 승선(承宣) 김신을 보내어 서북면병마사 이중과 그의 막료 및 여러 성의 수령을 체포해서 서경의 창고에 가두었으며, 무릇 개경인으로서 서경에 있던 자들은 귀천과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두 구속하였다. 그리고 병사를 보내어 절령( 嶺)길을 끊고,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의 군병을 욱박질러 징발하였으며, 근도(近道)에서 기르는 말도 약탈하여 모두 서경으로 들여 갔다. 이들은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건원하여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군대의 칭호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고려사 권127, 열전 40 묘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