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와 대통령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한 뒤 통치의 기반을 민(民)에게 두는 역성(易姓)혁명을 단행하려 했고, 실제에 있어서도 고려 말기와는 달리 대다수 농민이 일정 양의 토지를 소유하는 토지개혁을 완수했다. 물론 개국공신과 종친, 관료들에 대한 배려도 병행했다. 전근대 농경사회에서 부역과 공물 그리고 토지세는 국세의 주된 재정 수입원이었던 만큼, 농민들이 직접 경작할 수 있는 농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국가 경제의 건전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조선 전기 사회가 큰 동요없이 지탱해 갈 수 있었던 것도 개국 초기의 이와 같은 결실 덕분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제도는 시대의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보완작업을 필요로 하나, 제도 보완에 따른 이해득실로 인해 약자를 위한 전반적인 개선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역사적 상례였다. 따라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기는 것과 그러한 현상을 방치하는 것은 같은 이치였다. 후일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사회개혁을 위해 균전제·한전제·여전제·정전제 등을 외치게 되는 것도 결국은 특정 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규제하고, 실제 경작하는 농민들이 농토를 갖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계층들에 의해 제도가 개선되어져야 했기 때문에 개혁을 수반해야 했던 실학자(實學者)의 방안은 소외되었던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국왕은 마치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후계자인 세자(世子)자리에 자연스레 거론이 되는 ‘장남’이라 하더라도 별탈없이 권력을 승계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왕자의 난, 반정, 세자책봉 철회, 왕손의 영입, 수렴청정 등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국왕이 되기까지 몇 번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고 그렇기 때문에 외척을 비롯한 다양한 정치세력들과 동반자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성군으로 지칭될 만한 군주가 몇 명쯤 되느냐는 질문은 평가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여하튼 그 수가 적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군주의 의도대로 정책이 시행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때로 국왕에 의해 주도된 ‘사회개혁’이라 하더라도 봉건왕조 자체가 ‘민생(民生)’을 위한 정책 보다는 왕실과 정치 기득권의 유지에 초점되었다. 이는 ‘이씨왕조’를 지탱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습왕조의 구조적인 모순이었던 것이다.대통령 권력의 집중에서 오는 폐단인가? 우리의 현대 역사에서 군사독재정권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개혁과 소통을 내세우면서 출범한 새 정권들은 출범 초기 국민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각기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매번 어김없이 모든 대통령의 친인척과 그 측근들이 벌이는 과욕과 비리로 인해 불행한 사태를 만들어냈다.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 이렇게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경험한 국가는 아마도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역사의 교훈으로 삼았길래 이러한 결과가 초래됐는지,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그저 주변인들의 단속을 철저히 하겠다는 구호 정도로 방치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규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리라 본다.
가뜩이나 권력형 비리가 난무하고 위장전입, 세금탈루, 논문표절, 병역기피, 부동산 투기 등의 의혹에 빠진 인사들을 고위 공직에 앉히려 하고, 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뻔한 변명으로 일삼는 인사들까지 정권에 참여하겠다는 비도덕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를 발본색원하지 않고서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없다. 가리고 숨기다가 들통이 나는 그런 인사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특단의’ 조치도 필요하다고 본다.
잠룡들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미래와 현재 보통사람들이 원하는 당면 과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헤아려야 한다. 과욕은 정책적 실패를 가져왔고, 논공행상은 부패를 낳았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인사문제에는 어떤 ‘특단의’ 복안을 가지고 있는지 우선적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