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수호통상조약
한미 FTA 협상의 여운이 진정되기도 전에 미국 측에서 재협상을 제기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미 행정부가 의회와 합의한 ‘신(新)통상정책’ 때문이라는데, 재협상이라는 것이 결국 뭔가 불만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면 왠지 다소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그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의 많은 단체들이 시위나 성명서, 공개토론 등을 통해 협상의 불가함과 그 협상이 한국사회에 가져올 여파에 대해 우려를 강력히 표명한 바가 있었고 현재도 논란이 불식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체로만 볼 때 문제의 제기는 오히려 우리 측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재협상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협상이라는 것이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으로 양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 협상이 필요악이라 한다면, 협상의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들을 면밀히 검토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또 그 이해득실에 따라 파생하는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을 좀 더 심도있게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 중의 하나일 수 있다. 1876년 한국은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물론 반강제적인 것으로 우리 정부가 세상물정에 어두웠고 무기력했던 시절이었다.
그 얼마 후 1882년 4월 6일(양력 5월 22일)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이것이 서구 열강과 맺게 되는 최초의 조약이었다. 이어 영국(6월 6일), 독일(6월 30일) 등과도 조약을 체결했는데, 한미수호통상조약의 내용과 큰 차이는 없었으나 이들 모두 불평등조약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국과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에는 중국의 역할이 지대했다. 한국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던 중국은 그동안 서구열강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입었던 피해를 제거해 보려는 의도에서 이른바 수정적 견해를 미국 측에 제시해 그나마 상당부분을 한미간 조약문에 반영시키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동안 동양제국과 구미제국간에 체결된 조약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조문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조약은 다음해 1883년 5월 미국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일정부에게도 종용해 비준을 거부하게 했다. 아편의 수입금지와 최고 3할에 이르는 고율의 관세부과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재협상에 의해 발의된 ‘신(新)한영조약’은 중국을 배제한 채 한국과 독자적으로 체결되었고, 그 결과는 영국이 원하는 모든 이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 중 관세율에 있어서는 일반상품과 영국 수출품목의 대종을 이루는 면직물의 세율을 저율로 적용시킴으로써 자국상품의 대부분을 혜택받게 했다. 이렇게 적용된 관세율은 미국에 비해 거의 반밖에 안 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이 세율은 영국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독일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같은 날 ‘한독신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비롯한 유럽 열강과의 조약체결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미국에 있어서도 ‘최혜국대우’ 조건에 따라 이 세율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영신조약’은 이후 한국의 관세수입에 계산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엄청난 손실을 안겨준 계기가 되고 말았다.
100년도 넘는 근대 초기에 맺어진 수호통상조약을 가지고 현재에 대비하고자 함은 아니나, 인간의 역사에서 매번 간과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까지 동서양을 통틀어 수없이 많은 왕조의 멸망과 정권의 교체가 있어 왔지만, 그들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야 했던 원인은 대동소이하다고 역사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해법을 역사속에서 찾는 지혜를 상실하면 모든 일이 안개 속을 헤매듯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근대 초기에 서구 열강과 맺었던 조약의 실체를 오늘 ‘역사의 이름으로’ 되새겨본다면 반면교사일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