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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살인마]세계의 살인마 - 89. 존 웨인 게이시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1.03.14|조회수5,976 목록 댓글 1

 

존 웨인 게이시는 입버릇이 사나운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서 자주 ‘계집애’라는 비웃음을 듣고 자랐다. 그는 땅딸막한 심기증 환자였으며, 동성애 성향 때문에 심각한 자기혐오감에도 빠진 채 성장했다. 한편 그는 ‘정상인’처럼 보이려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오와 주 워털루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가게를 운영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겉으로 비춰진 존 웨인 게이시는 성실한 실업가였으며, 친근한 이웃이었고, 사회에 헌신하는 구성원으로, 매우 긍정적인 인간으로 인식이 되어 있었다. 감춰진 살인자로서의 그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자기 희생자로 자주 선택했고, 그들의 시체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자기 집 바닥 밑에 감추어둔다던지 하면서, 비교적 철두철미하게 자기의 범죄행위를 이어갔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존 웨인 게이시가 계속해서 벌인 살인 범죄는 다른 연쇄살인자들에 비해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범죄행위도 종착역을 향해가고 있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웃는 얼굴과 기분 좋은 말들을 내뱉으며 살인자로서의 모습을 철저하게 감추었다고는 하나..


게이시의 집 이웃에 살던 사람들은 그의 집을 들락날락하던 젊은 남자들의 행방에 관해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살려두게 된 제프리 린갈은 그를 성폭행으로 고소하며 물고 늘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로버트 피에스트 사건이었다. 자기 이름이 거론된 걸 모르는 상태에서, 게이시는 그 어린 소년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마침내 그는 경찰에게까지 강력히 의심받는 신세가 된다. 아마도 그 당시 게이시는 강한 심리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게이시는 경찰은 물론 자기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자기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부정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심리적으로 위안을 받고 싶어서였겠지만, 게이시는 자기와 절친했던 한 친구에게는 자기가 살인자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대략 30여명 정도를 죽였다고 비교적 솔직하게 자기의 비밀을 털어 놓았지만, 게이시는 자기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자기에게 공갈을 쳐 돈을 갈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변명을 했다.


증거물들이 발견되고 경찰의 수사가 본격화 되면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존 웨인 게이시는 1978년 12월 22일 금요일, 마침내 자기가 저지른 살인범죄를 경찰에게 자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게이시는 경찰에게 자기방어 차원에서 살인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합리화하려 했다.


게이시의 집에서 본격적인 시체발굴을 하기에 앞서, 경찰은 검시관인 'Robert Stein'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게이시의 집에 도착한 스테인은 부패된 시체를 흠이 없게 발굴해 내기 위해, 작업을 체계화 하고, 마치 고고학 발굴 장소에 있는 것처럼 최대한도로 주의를 기울이며 현장을 지휘했다.


시체발굴을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하고 얼마 후, 경찰은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 중의 하나는 존 부코비츠였고 그는 차고 밑에 묻혀 있었다. 다른 시체 하나는 게이시의 집 바닥 밑 좁은 공간 속에 묻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게이시의 집에서 발견된 사망자수는 급격하게 불어났다.


발굴된 희생자중 몇 명은 그때까지도 속옷이나 양말 등이 목구멍 깊숙이 쑤셔 넣어져 있었다. 어떤 희생자들은 아주 가까이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경찰들은 그들이 동시에 죽었거나,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이시는 공간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것에 대한 이유를 댔다.


12월 28일까지 경찰은 게이시의 집으로부터 모두 스물일곱 구의 시체를 옮겼다. 그렇지만 게이시의 희생자들은 그의 집 안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Des Plaines' 강에서 발가벗겨진 채 시체로 발견된 'Frank Wayne "Dale" Landingin' 역시 게이시의 희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의 시체는 이미 몇 주 전에 발견되었지만, 당시에 게이시의 끔찍한 범죄와 연관성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경찰은 계속해서 그에 대한 수사를 하던 중 게이시의 집 안에서 그의 운전 면허증을 발견했고, 그 젊은 남자를 게이시의 희생자 명단에 추가했다.


강가에서 발견된 게이시의 희생자는 랜딩인 혼자만이 아니었다. 역시 12월 28일, 경찰은 데스 플레인즈 강에서 'James "Mojo" Mazzara'의 시체를 옮겼다. 그의 목구멍 속에는 그의 속옷이 쑤셔 넣어져 있었고, 검시관은 그것이 마자라가 질식해 숨진 원인이 된 것이라고 밝혔다.


시체들을 강가에서 처리한 것에 대해, 게이시는 경찰에게 자기 집 바닥 밑에는 더 이상 희생자들을 묻을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마자라는 게이시에게 살해된 후, 시체로 발견된 희생자 중 스물아홉 번째였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그 다음 해 2월이 끝날 때쯤에도 경찰은 계속해서 게이시 소유로 되어있던 땅들을 파고 있었다. 그들은 게이시가 살던 집을 거의 다 파내었고, 좁은 공간 속에서도 더 이상의 시체들을 찾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좋지 않았던 겨울 날씨로 땅이 얼어붙었고, 가택수색영장을 발부 받는 과정상의 문제까지 겹쳐, 수사관들은 더욱 오래도록 게이시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좀 더 발견될 시체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게이시의 안뜰 콘크리트를 깨뜨리면서, 시체발굴팀은 또 다른 끔찍한 발견과 마주친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남자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발견된 그 남자는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게이시의 희생자들은 단지 어린 소년들이거나 동성연애자로 여겨졌지만, 이로써 게이시의 희생자 중에는 결혼한 남자도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 다음주 일리노이즈 강에서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었다. 서른한 번째로 게이시와 연관되어 발견된 그 젊은 남자 시체 팔뚝에는 "Tim Lee"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희생자 아버지 친구 중 하나가 그와 관련된 신문 기사를 읽다가 그 문신을 알아봤다. 희생자의 이름은 'Timothy O'Rourke'였다. 그는 'Bruce Lee'의 팬으로 그의 라스트 네임을 따 그것을 자기 이름으로 삼아 문신을 했다. 아마도 그는 게이시와 게이바 등지에서 알게 되었고 그 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오로케의 시체가 강에서 발견돼 끌어올려질 시간에 즈음해, 게이시의 집에서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된다. 그 시체는 게이시의 집 오락실 밑에 놓여져 있었고, 게이시의 사유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시체가 된다. 그 발견이 있은 후, 게이시의 집은 파괴된다. 그때까지 서른두 구의 시체들이 발견되었지만, 로버트 피에스트는 계속해서 실종상태였다.


1979년 4월, 피에스트의 시체 역시 일리노이스 강에서 발견된다. 아마도 강 어디엔가에 버려졌던 소년의 시체는 강풍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Dresden' 댐의 수문들 쪽으로 이동이 되었고 마침내 거기서 발견된 것으로 추측되었다. 피에스트에 관한 검시 보고서는, 그가 목에 쑤셔 넣어진 종이 타월로 인해 질식해 숨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발견된 희생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치아 기록을 대조한다던지 하면서, 계속해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서른세 명의 희생자 중에서 여덟 명은 끝내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존 웨인 게이시는 아이오와에서 남색행위를 저질러 10년형을 선고받았었다. 하지만 그는 불과 18개월 만에 풀려 나왔다. 만약 그가 감옥에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33 명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단순한 관점이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게이시의 마지막 희생자였던 로버트 피에스트의 가족이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들은 아이오와 가석방 위원회와 교정 당국 그리고 시카고 경찰 당국을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했다. 태만한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요구한 액수는 8천 5백만 달러였다.


존 웨인 게이시는 퍼스트 레이디였던 로잘린 카터와 악수를 하면서 사진을 찍은 적도 있었던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였다. 그런 그가 대량 학살자로 밝혀지면서, 인권을 강조하던 당시 미국 대통령 'Jimmy Carter'는 곤란한 지경에 빠지기도 했다.


존 웨인 게이시는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수사관들에게 자기 안에는 네 명의 자기가 있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실업가, 정치가, 자원봉사자 그리고 살인자였다. 그렇게 게이시가 다중인격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죽음에 대한 수색과 수사는 끝으로 달려갔고, 게이시의 대한 재판은 시작된다.


1980년 2월 6일 수요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있는 'Cook County' 형사 법원 건물에서 존 웨인 게이시의 재판이 시작됐다. 배심원 멤버는 다섯 명의 여성과 일곱 명의 남성으로 구성됐다. 재판이 시작됨과 동시에, 기소자 측의 'Bob Egan'은 희생자들의 살아있었을 때의 삶과, 이어서 서른세 명이나 되는 그들이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이야기 했다. 계속해서 게이시에 대한 수사상황을 거론하면서, 에간은 게이시의 범죄가 얼마나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고, 게이시가 얼마나 분별력이 있었던 인간이었는가를 강조했다.


에간의 뒤를 이어 등장한 게이시의 변호사 중 한 명인 'Robert Motta'는 에간의 진술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게이시는 범죄를 저지르면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자기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로버트 모타는 존 웨인 게이시를 비정상인으로 만들려했고, 그것은 게이시에게 최선이었다.


검찰 측이 법정으로 불러들인 첫 번째 인물은 존 웨인 게이시의 희생자 중 한 명인 존 부코비츠의 아버지 마코 부코비츠였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과의 마지막 작별 등의 슬픈 이야기를 자세히 이야기했고, 듣고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게이시 밑에서 일했던 직원들은 두드러지게 보였던 게이시의 기분의 변화, 그리고 그가 어떻게 수작을 걸어왔고, 어떻게 트릭을 써 수갑을 채웠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계속해서 게이시의 친구들과 이웃들, 게이시의 수사와 체포에 관련되었던 경찰관들, 그리고 게이시가 살인을 하는 동안 정상이라고 판정한 정신병 학자들이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서 증언했다.


2월 24일, 피고 측의 변론이 시작됐다. 그때 등장한 피고 측 증인은 법정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피고 측이 부른 첫 번째 증인은 제프리 린갈이었다.


게이시가 린갈에게 저지른 범죄행위는 그 당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 사실은 게이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변호인 측이 린갈을 자기들의 증인으로 부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린갈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게이시의 변호사 중 한 명인 'Amirante'는 린갈에게 "게이시가 그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린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린갈의 증언은 오랫동안 계속되지 않았다. 자기가 게이시에게 당한 강간을 상세하게 법정 안에서 이야기 하는 동안 린갈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린갈은 강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면서 구토를 했고, 히스테리칼하게 울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법정 밖으로 옮겨졌다. 그때 게이시는 아무런 동작이나 표정변화가 없었다.
고발당한 살인자를 비정상으로 증명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변호인 측은 법정 안으로 존 웨인 게이시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게이시의 어머니는 게이시가 어린 시절 자기 아버지에게 가죽 혁대 등으로 얻어맞은 것을, 여자 형제는 게이시가 욕설을 듣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하면서, 게이시의 가족들은 게이시가 자기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는 것들을 증언했다. 그것들에 대해, 게이시는 단호하게 어떤 육체적인 학대도 부정했다.


변호인 측에 의해 법정에 불려 나온 다른 증인들은 게이시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항상 웃고 다녔다는 것 등을 증언하면서, 그가 얼마나 착하고 후한 남자인지에 관해 말했다. 이런 말들은 다른 자리였더라면 당사자를 아주 기분 좋게 하는 말이 되겠지만, 재판정에 선 게이시에게는 그리 도움이 되는 증언이 아니었다.


변호인 측은 게이시가 자기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고 비정상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다. 그들이 증언대에 선 사람들에게 듣고 싶어 했던 말들은 게이시가 미친 인간이었다는 것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오랜 기간 게이시의 절친한 이웃이었던 'Lillie Grexa'는 게이시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어떤 말을 했는데, 증언대에 선 그녀는 게이시가 미쳤다고 말하기를 거부하면서, 그녀 역시 게이시가 얼마나 훌륭한 이웃인가를 말을 했고, 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던 게이시란 남자를 표현하는 데 있어 "very brilliant"와 같은 낱말들을 사용했다.


그 후 변호인 측은 심리학자 'Thomas Eliseo'를 불러 들였다. 재판 전 게이시와 인터뷰를 했던 그는 게이시를 극단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정했다. 게다가 경계선 정신분열증(Borderline schizophrenia)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피고 측 증인으로 나섰던 다른 의학전문가들의 견해도 비슷했다. 그들은 게이시가 다중인격장애를 경험했거나 반사회적 습성으로 인해 정신분열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게이시가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장애는 그가 자기 범죄 행위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손상시켰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결론으로서, 그들은 모두 게이시가 살인을 저지르는 그 순간 동안에는 비정상이었다는 판정을 내렸다.


배심원들은 5주가 넘는 기간 동안 백여 명이 넘는 증인들의 증언과 변호인 측과 검찰 측의 논쟁을 보고 들었다. 그런 그들은 존 웨인 게이시의 범죄를 숙고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용하지 않았다. 단지 두 시간 정도를 소비한 배심원들은 게이시를 정상으로 판정했고 그가 저지른 살인범죄에 대해 유죄로 평결했다. 1980년 3월 13일, 존 웨인 게이시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이 끝난 후, 존 웨인 게이시는 'Chester'에 위치한 'Menard' 교도소로 옮겨졌다. 그는 투옥되던 첫날 이후 일지를 통해, 자기가 만난 모든 방문객들에 대해 계속해서 정보를 적어 나갔다.


시간이 지나 게이시의 변호사가 쓴 어떤 글에서, 메나드 교도소의 간수는 게이시를 모범 재소자로 적고 있다고 쓰고 있다. 비록 게이시는 자기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없었으나, 감옥 안에 갇혀있던 많은 젊은 죄수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충고했다고도 한다. 다른 사람이 쓴 글에서, 교도소 공무원은 게이시를 극성스럽게 수다스러운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그곳 사형수 감방에 갇혀 있는 동안, 게이시는 글과 그림에 열심이었다. 그는 만 통 이상의 편지를 썼고 2천 점 이상의 유화를 완성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의 주제는 광대의 초상이었다. 이외에도 그는 일곱 난쟁이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인 찰스 맨슨, 데이빗 버코비츠, 제프리 다머 등의 초상을 그려댔다.


존 웨인 게이시는 사형수 감방에서 14년을 지냈다. 모든 항소가 거부되고 나서 마침내 그는 1994년 5월, 일리노이 주 시카고 바로 근교에 있는 'Joliet'에 있는 'Stateville' 교도소로 이송이 되었다.


1994년 5월 9일, 심하게 살이 찐 연쇄살인자는 후라이드 치킨, 감자튀김, 콜라, 딸기 쇼트케이크로 마지막 식사를 했다. 이후에 그는 전화를 통해 기자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그날 밤, 게이시는 바퀴가 달린 환자 수송용 들것에 누웠고, 가죽 끈으로 잡아 매여졌다. 그렇게 실려 사형집행실 안으로 옮겨진 그는 독극물이 든 주사를 맞았다. 1994년 5월 10일, 자정이 지나자마자, 사형집행을 당한 존 웨인 게이시 주니어는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존 웨인 게이시의 사형집행을 전후해서 마이너 언론매체들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도소 밖으로 몰려들었다. 여러 가지 소동을 벌이던 많은 사람들은 체포되기까지 했다. 행상인들은 T셔츠를 비롯한 게이시 관련 상품들을 팔았다. 존 웨인 게이시가 죽었다고 발표되던 순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사형집행 당시, 독극물 주사를 맞은 게이시는 죽기까지 27분가량이 걸렸다고 한다. 치사주사기에 사용됐던 약품들이 섞이는 가운데, 그것들이 응고가 되었던 까닭이라는데, 그것은 사형집행에 참여한 담당관들이 게이시가 더욱 오랜 시간 육체적인 고통을 겪게 하고 죽게 하려고 고의로 그렇게 처리했다는 설이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 관해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조사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일리노이 주는 치사주사의 다른 방법을 채택한다.


사형집행이 끝난 후, 사망한 게이시의 뇌는 제거돼 과학자들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현재 게이시를 비롯해 다른 연쇄살인자들을 인터뷰했던 'Helen Morrison' 박사가 보관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형집행이 끝나고 나서 게이시의 변호사에게 허가 받은 법정의 정신병 학자에 의해 조사된 게이시의 뇌에서는 특이한 점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형집행 이후, 게이시가 그린 그림들은 경매로 팔려 나갔다. 작가 'Stephen King'은 자기 소설 'It'에 등장하는 광대살인자의 모델로 게이시를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Sufjan Stevens', 'Macabre', 'Fear Factory', 'Dog Fashion Disco' 등과 같은 가수와 그룹들은 게이시에 관한 노래를 만들고 발표했다. 'Marilyn Manson'의 키보디스트 'Madonna Wayne Gacy'는 게이시의 라스트 네임을 자기의 예명으로 채택했다.


로버트 레슬러는 FBI 소속으로 있었을 때나, 그곳을 은퇴하고 범죄학자로 활동하면서 수없이 많은 연쇄살인자들과 만나 인터뷰했다. 존 웨인 게이시 역시 수차례에 걸쳐 그와 만나 인터뷰를 했다. 레슬러는 살인이 벌어지는 기간 동안, 게이시가 12개주를 여행했던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존 웨인 게이시의 희생자 숫자가 발견된 시체 숫자와 같은 33명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레슬러의 생각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존 웨인 게이시의 희생자 숫자는 알려진 그 이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존 웨인 게이시의 수사가 종료되고 나서도, 그가 죽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관련기관에서는 의심이 가는 지역을 첨단 장비 등을 동원해 수색하기도 했다.


존 웨인 게이시의 비정상적인 행동의 바탕으로, 어떤 사람들은 그를 학대했던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의 불행한 관계와 어린 시절 머리에 상처를 입고 그로 인해 블랙아웃(blackouts) 경험을 한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존 웨인 게이시를 연구했던 또 다른 누군가는 게이시의 이상행동은 결코 해석될 수 없을 것이라는 단정을 내리기도 했다.


어쨌든 존 웨인 게이시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미국 연쇄살인자 역사상, 그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인간으로는 게리 리언 리지웨이나 후앙 코로나 정도 밖에 없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분명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를 취재한 경험이 있던 기자들에 따르면, 존 웨인 게이시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존 웨인 게이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Kiss my ass''였다. 가죽혁대로 묶여 이동식 들것에 실려 사형집행실로 끌려가던 도중 가드에게 던진 이 말에는 자기를 죽여 봐야 지나간 일들이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취지가 담겨있었다고 해석하는 글이 있다.



광대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감옥에 갇혀서 수많은 광대들을 그려대기도 했던 존 웨인 게이시는 자기의 광대적인 행동은 자아개조로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어느 날 그는 냉소적으로 광대는 살인에서 자유롭다라는 듯한 말들을 내뱉기도 했다.


결국 존 웨인 게이시 주니어는 광대 살인자로서 자기의 인생을 마쳤다. 처음 그가 광대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서 친근함을 느꼈다. 똑같은 광대의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 친근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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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자우림 | 작성시간 11.03.15 이건 뭐..드라마 소재로 쓰일법한 인간이군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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