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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신라)

Re:혁거세 출생 및 신라건국 관련기사 - 혁거세의 출생(A.D.1)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10.08.15|조회수145 목록 댓글 0

혁거세 출생 및 신라건국 관련기사


남당 유고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 ~ 석탈해이사금까지의 기록을 살펴볼 수 없으므로 인하여 신라의 出自에 막연함이 있으며 부득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정사조선전, 남당유고 등에 전하는 기록을 비교하여 살폈다.


① 혁거세의 출생(A.D.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0년 기사≫

二十年 正月 太子都切卒

20년(A.D.1) 정월 태자 도절(都切)이 죽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8년 기사 발췌≫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 謂解明 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隣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28년(A.D.9)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解明)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방업(邦業, 나라의 사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결하게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결하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대왕의 맏아들(長子, 도절)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정당하게 후계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왕의 사자가 한 번 와서 자살한다면, 왕의 지시가 거짓이 없는지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견해≫

도절(都切)이 죽은 8년 후임에도 후계자가 된 해명(解明)이 불안함을 느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절이 동궁(東宮)이 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동부여에 볼모로 가기 이전인 14세 이전으로 볼 수 있고, 도절이 사망해로 기록되어 있는 A.D.1년에 해명의 나이 14세이지만 3년 후인 A.D.4년에 17세로 동궁이 되었으며, 무휼은 겨우 11세에 동궁이 되었다. 그렇다면 해명이 어리기 때문에 동궁으로 세우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해명이 후계자로 인정받는 아들이었다면, 아버지 유리명왕에게 반항함이 심할 수 있을까? 도절은 적자(嫡子)이고 해명이 비록 서자(庶子)의 신분이나, 적자가 없거나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서자라도 왕위계승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해명이 서자(庶子)라는 기록은 백제왕기 우대왕편에서 유추한 것이므로 본문을 참고 바랍니다.


그렇다면 해명이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명의 처 진(珍)공주는 도절의 포매(胞妹)인데 해명이 사랑하지 아니하고, 다른 후궁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하였다. 해명은 진(珍)공주의 남편으로써 동궁이 된 것은 아닐까?


삼국사기와 남당유고의 기록에 의하자면 유리명왕은 이미 장자인 도절의 죽음을 목격한바가 있다. 자식의 죽음을 본 아비라면 아들이 자신의 뜻에 반한다고 하여 아들에게 죽음을 명령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명 또한 자신의 후계자로써의 지위가 안정되었다면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려고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였을까? 해명의 죽음에도 이와 같이 석연치 않는 부분이 남아있다.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20년 기사 발췌≫

二十年 辛酉 正月 都切太子自柵城歸 未幾薨 帶素自愧其失而還都切 而留其女故都切悲傷不起

20년 신유(A.D.1) 정월 도절(都切)태자가 책성(柵城)에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대소(帶素)는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도절을 돌려보냈으나, 대소의 딸을 머무르게 한 연유로 도절이 슬퍼하며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五月 沸流薨 年三十七 上減食以慰皇后

5월 비류(沸流)가 37살에 죽었다. 왕이 감식하여 황후(소서노)를 위로하였다.


≪본기신편열전 도절태자 기사≫

都切太子母阿爾后 召西奴生優台女也 類利太子娶之 生都切及女五人 而十三年崩 十四年 扶餘請都切爲質 王以其無母不肯之 群臣力請遣之 中途得疾不發 扶余怒 發兵來侵而掠 都切去帶素 以其女妻之 生一子 于扶余 而歸 辛酉正月薨

도절(都切)태자의 모(母)는 아이(阿爾)후인데, (아이후는) 소서노(召西奴)가 낳은 우태(優台)의 딸이다. 유리(類利)태자가 장가들어 도절과 딸 다섯을 낳았으며, (유리왕) 13년(B.C.7)에 죽었다. (유리왕) 14년(B.C.6) (동)부여가 도절을 볼모로 주기를 청하였다. (유리)왕이 어머니가 없음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군신들이 힘써 청하여 보냈다. 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출발하지 못했다. (동)부여가 노하여 병사를 일으켜 침략하고 약탈하였다. 도절이 대소(帶素)에게 가서 대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동)부여에서 아들 한명을 낳고 돌아왔다. 신유(辛酉, A.D.1)년 1월 (도절태자가) 죽었다.


≪견해≫

1. 도절태자의 사망기사에 발상(發喪), 장례(葬禮), 애도(哀悼), 사당(廟), 무덤(陵)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도절의 처인 대소의 딸과 도절의 아들이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만약 도절이 당시에 죽었다면, 다음의 고구려 차기 왕위는 도절의 아들이고, 그 다음은 적자(嫡子)인 차자(次子), 그 다음은 서자(庶子)끼리 어머니의 순서로 순위를 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는 동부여에 도절의 아들을 돌려보내달라는 사신을 보냈을 것이다. 도절의 아들은 곧 동부여 대소(帶素)왕의 외손자이기도 하므로, 고구려에 보내지 않고 동부여에 남게 된다면 유리명왕의 다른 아들이 왕위를 승계하여 쓸모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고구려로 보낸다면 고구려왕의 외할아버지로써 제사 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민감한 사항이 모두 잘려지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2. 비류(沸流)의 사망시기에 대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백제왕기에 의하면 B.C.2년에 낙랑이 위례성에 침입하여 불을 질렀는데, 전쟁에서 패한 비류가 걱정하다가 죽었다고 하고, 고구려사초와 고구려사략에는 A.D.1년에 죽었다고 하였고, B.C.10년에 비류를 고구려의 태보로 삼았다고 하였다.


비류의 죽음을 A.D.1년으로 가정하고, 생년을 백제왕기의 B.C.47년을 취하더라도 48세에 죽은 것이므로 자신의 수명대로 죽은 것은 아니다. 비류를 분노하여 사망에 이른 원인이 전쟁에서 패하긴 하였으나 멸망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으며, 의탁할 곳이 없었던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구려사초와 고구려사략의 옳다고 여겨진다.


비류의 사망은 고구려의 국내성 천도와 연계되므로 관련 기록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 비류와 온조왕 당시의 백제가 고구려에서 독립한 별개의 나라인지를 살피기 위하여, 백제 초기에 나타나는 관직이름을 고구려와 비교해 보면 고구려의 재상의 이름은 태보(太輔), 좌보(左輔), 우보(右輔)인데, 백제의 재상의 이름으로는 우보만이 등장합니다. 만약 관제가 정비가 되지 않아, 고구려의 것을 차용했다면 백제에게도 태보라는 관직이 등장하여야 하는데, 서열3위인 우보의 벼슬이름만이 보이며,


고구려 4대 민중왕에 이르기까지 왕비의 계통이 백제 계열에서 나오고 있으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3대 대무신왕때까지 백제 계열의 소서노의 구신(舊臣)들이 고구려에 잔존하였음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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