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고구려의 천도(A.D.2~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1년 기사 발췌≫
二十一年 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 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拘 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 曰 “臣逐豕 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麋鹿魚鼈之産 王若移都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후략)
21년(A.D.2) 3월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왕이 희생물 담당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국내 사람의 집에서 기르게 하였다. (설지가) 돌아와 왕에게 견해를 말하기를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산수(山水)가 깊고 험하며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고라니(麋), 사슴(鹿), 물고기(魚), 자라(鼈)가 많으므로,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이로움이 무궁하기 때문만은 아니며, 또한 전쟁에 대한 우환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8월 지진이 있었다.
9월 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폈다.
≪견해≫
고구려가 졸본(卒本)에서 국내(國內)로 천도한 이유는 민심안정을 위함이다. 고구려본기의 해명태자의 사망기사와 협부가 파면된 기사에서 자세하다.
국내 위나암의 산수가 깊고 험하며, 오곡을 재배하기 마땅하며, 고라니와 사슴이 많다는 것은 사냥하기 적합하여 군사를 조련하기 좋은 조건은 도읍의 입지선택에 필요조건일 뿐이며, 고구려의 초도(初都)인 졸본에서의 천도의 불가피한 상황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1년 8월의 지진관련 기사는 고구려사초와 고구려사략에는 없는 내용이며, 고구려 조정에서 천도를 사전에 계획하고 모의한 것으로 보이며, 후대에 의한 국내성 천도 정당화를 위한 삽입기사로 보인다. 만약 대규모의 지진이 있었다면 가옥이 무너지고, 산이 무너지는 등 피해사실에 관한 기록이 부가(附加)되어야 한다.
졸본은 고구려의 시국처(始國處)이면서 본래 소서노(召西奴)의 땅이다. 졸본백성들은 백제계열(구. 졸본계열)에 의지함이 있었는데, B.C.7년 아이(阿爾, 유리명왕의 妃)의 사망, B.C.6년 소서노의 사망, A.D.1년 도절(都切)의 행방불명(사서에는 사망으로 되어 있음), 같은 해 5월(백제왕기에는 B.C.2년)에 비류(沸流)의 사망으로 구심점이 되는 지도자를 잃어 졸본의 민심이 크게 흔들리거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졸본백성들이 의지할 남은 사람은 온조(溫祚)일 것이다. 졸본백성들의 대규모 이탈이 예상됨에도 어찌하여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고구려사략 유류왕기를 보면 소서노가 국본(國本, 동궁, 태자)의 교체를 반대하여 떠나고자 하였을 때 온조가 그 어머니 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부인은 남편을 따르고, 자식은 부모를 따르고, 아우는 형을 따르고, 신하는 임금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정도의 올바른 따름이 있으니 따르지 않고 물러나며,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어찌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溫祚謂其母 曰 “妻當從夫 子當從父 弟當從兄 臣當從君 有此四可從之義 而不從而退 將安往吾不敢從母”)라고 하였다.
이는 유리와 온조가 매우 사이가 좋았음을 보여주는 정황의 일부로써 유리는 여동생 재사(再思)공주를 온조에게 시집보냈으며, 당시(A.D.2년 9월) 재사공주가 온조의 아들 다루(多婁, 훗날의 수로)를 낳았으니, 유리와 온조의 마음은 이미 하나로 묶였다고 볼 수 있다(一頭二身). 훗날 온조가 마한을 정벌(A.D.8~10년)할 때 유리가 군량과 병사를 지원하여 도왔다는 기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유리의 사후(死後)에 나이 어린 무휼(撫恤, 당시15세)을 대신하여 온조에게 나라를 전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위나암으로 천도의 의미를 살펴보면 국내(國內)는 비류국 송양의 땅으로 송후(松后)의 터전이다. 고구려 5부인 연노(涓奴)에 해당하고, 또는 고국원(故國原)이라고도 부른다. 국내(國內)로의 천도는 졸본(卒本)을 벗어나 송후(松后)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세력을 창출하기 위함이다. 유리명왕 19년(B.C.1)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을 때 관리가 쫓아가다가 결국 돼지를 상하게 한 후에야 잡아온 일이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관리를 땅에 묻으라고 한 일 이 있는데 겨우 2년 만에 또다시 희생용 돼지가 도망가는 일이 생기고 멀리 도망간 돼지를 사로잡는 일이 가능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