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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회의 실상

[체험] 평양 방문기

작성자초롱박|작성시간11.03.31|조회수1,932 목록 댓글 3

 

[체험] 평양 방문기


2011. 3. 31. 목요일

워크홀릭

 

 

 엊그제 마르크스를 읽던 대학생들이 이적단체 결성 혐의로 붙잡혀 갔다고 하니 옛 기억이 떠오르네요. 미 10년이 지난 일이라 옛기억이 더 이상 퇴색되기 전에 남겨보려고 합니다. 설마 여행기 한 편에 국가 보안법이 적용될 위험은 없겠죠?

 

10년 전 어느 날 저를 찾는다는 사장님의 전갈을 받고 냉큼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대뜸 '자네가 평양을 다녀왔으면 좋겠네.' 하시더군요. 군사부일체에서 '사'는 '사장님 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하는 게 월급쟁이의 숙명. 토하나 달지 않고 '옙!' 하고서 사장실을 나왔습니다.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 대통령께서 평양 방문을  후였고, 민간의 교류도 기지개를 켜면서 한국의 기업들이 슬스 대북사업에 눈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사장님은 이미 평양을 방문하셨었고요.  '쓸 만한 놈 하나 보내 줄 테니 기술 좀 배워봐라. 유용한 제품들도 좀 기증할께.' 뭐 이런 식의 사고(?)를 쳐놓고 오신 상태였습니다.


    

Hell March DPR.KOR 2010

 


북한 방문 준비


오랜만에 군대에서 썼던 신원진술서를 다시 한 번 쓰게 되었습니다. 이대해서 훈련소에서 썼고, 자대에 있을 때는 기밀취급 때문에 한번 더 썼던 거라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누런 갱지며 양식도 거의 비슷하더군요. 북
한을 다녀오려면 신원보증인을 2명을 세우라는데 '내가 못 돌아오면 이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에 잠깐 멈칫했씁니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땐데 하는 생각에 그냥 혼자 씨익 웃고 말지요. (요즘 생각하는 '지금이 어느 땐데.'와  반대의 느낌인거였죠.)

 

통일부에서 방북관련 교육을 받았습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에 여행객들에게 실시했던 소양 교육이 있었지요. 뭐 그 정도수준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북한 경험이 많은 현대직원들이 강사로 나와서 유의할 사항 등을 알려 주더군요.

 

그리고 준비했던 서류 중에 바세나르 조약에 의거해서 북한에 제공하는 기증품이 무기로 악용될 소지가 없음을 신고하는 서류를 작성 했습니다. 최근에도 이런 제약 등으로 북한은 물론 이란 등에 제품이 수출될 때 이러한 신고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인보이스, 패킹 리스트, 제품 점검 이런 것들이 끝날 때 쯤 국정원 직원을 만났습니다. 국민의 정부 들어 안기부의 어두운 이미지를 씻기 위해 노력하던 때라 강압적인 호출(?)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국정원 오픈데이(?) 같은 행사도 시작될 때 이었으니까요. ( 이름부터 여대생 기숙사 오픈데이에서 따온 게 분명한 행사) 횟집에서 식사하며 이야기 나누는 그런 분위기였지요. 국정원에서 요청하는 것은 '전문가의 눈으로 그들의 인프라 수준을 파악해 달라. 특히 확인 가능한 사진이나 자료가 있으면 좋겠다.' 이었습니다. 딱히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 최대한 협조하겠다 정도로 자리를 마감했습니다.

 

 



 

평양으로 가는 길


육로는 커녕 직항로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베이징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평양으로 환승 했습니다. 베이징에서 고려항공 여객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와중에 북한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모여 들더군요. '정말 북한을 가는구나. 북한 사람들 중에서 고위층들이겠지.' 반공웅변대회를 나가고 반공어린이상 상품이 우등상보다 더 좋던 시절을 살아온 제게 어떻게 모든 일이 덤덤하기만 했겠습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가 복잡해질 즈음에 사고가 터졌습니다. 북한에 기증하기로 한 제품들이 베이징 세관에 압류된 거였죠. 지금과 달리 중국에서도 압류가 흔한 시절이라서 대행사(북한 김정일의 친척과 얽혀있던 영세 업체로 대북사업하는 기업들과 북한의 중간다리 역할을 했던)가 좀 더 신중히 처리해야 했는데 대행사라고 부르기엔 워낙 급조된 회사이다 보니 일어난 사건이었죠. 해외 사업을 하다보면 이런 류(?)의 회사들이 참 많을 때였죠.

수차례 제품을 돌려받길 요청했으나 마이동풍, 결국 평양엔 빈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다른 사건으로 발전되는데, 어쨌든 일단은 그 때로 돌아갑니다.

 

심란한 마음에 올라 탄 비행기는 박물관에나 전시될 법한 작은 기체 였습니다.  낡은 시트에 협소한 좌석들, 거기에 더욱 놀라운 건 화물칸은 그냥 좌석 맨 뒷 줄에 커튼 쳐 놓은 곳이라는 거. 평양을 다녀오며 북한의 경제사정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수차례 느꼈지만 그 첫 충격은 비행기였습니다.


제트기류도 만나보고, 착륙을 못해서 LCD상에 비행경로가 골뱅이가 되는 것도 봤으니 비행기 좀 타봤다고 믿어왔던 제 경험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려주는 경험하게 됩니다. 갑자기 앉은자리가 쑥 꺼지는 느낌을 수차례 겪다 보니 어느 아주머니가 울음이 터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대신 울어주면 고맙죠.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승무원들을 유심히 봤는데, 예쁩니다.  우리나라에선 달덩이 같다고 하면 여자들이 싫어하지만, 동양화의 달덩이 같은 미인들 특히 목이 길고 우유빛깔 맑은 피부색은 고전적 미인상을 품고 있는 남자들에겐 과연 남남북녀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비행도 안정되고 사람들의 동요도 가라앉고 나니 밥이 나왔습니다. 농담삼아 기내식을 천상의 음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지상의 음식을 흉내 낸 모조품 같은 맛이잖아요. 짤랑짤랑~ 소리가 나면서 카트를 밀고 오는데, 왜 이리 소리가 나나 했더니 식기나 음료수 병이 유리가 많습니다. 석유화학공업 등이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일회용품을 쓰지 못하고 말 그대로 그릇을 쓰더군요.

 

여행사진 공유사이트(www.worldisround.com)에 소개된

베이징발 평양행 고려항공 여객기 기내식 식단


고기 순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는 나무 도시락을 열어 맛을 보니 꽤 괜찮습니다. 이후로도 북한의 음식들을 먹으면서 맛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이유를 곰곰이 곱씹어 보면 인공조미료 등에 의존하느라 잊고 있었던 재료의 맛을 떠올려줘서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출입국 신고서를 써야 하는데요. 참, 묘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출발국가와 도착국가를 어떻게 써야 하나. 갑자기 머리가 하얘집니다. 남한/북한, 대한민국/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뭐든 적합하지 않습니다. 교육받을 때 북한사람들 북한이란 말 싫어한다고 했는데, 아. 이거 민감한 사안이군...
고민 끝에 출발지는 ROK(Republic Of Korea), 도착지는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썼습니다.


왜그런지 모르지만, 최인훈의 광장이 떠오르더군요.

 

비행기는 어느 새 평양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국제공항들과 달리 평양공항에 도착한 비행기는 지가 버스로 변신 했는지 활주로를 마냥 달려갑니다. 이쯤이면 공항이겠거니 해도 또 달려갑니다. 달려가는 내내 보이는 얕은 민둥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주황색, 정말 잡티 하나 없는 주황색입니다. 북한 최고/최대의 공항일 텐데 이 곳에 나무를 심을 여력도 없는 이 사회, 저를 맞아준 북한의 첫 풍경은 바로 충격의 주황색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평양에 도착


생전 처음 일반인 입국수속이 아닌 특별 입국 수속으로 몰이(?)를 당했습니다. 항상 공항에서 VIP들이 일반인들과 다른 수속을 밟을 때 나름 부럽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는데,  이런 귀한 경험을 평양에서 하다니, 역시 특별입국 수속은 특혜라기보다는 일반인과의 분리 수준이었습니다. X-ray도 당연히 통과해야 했고요.

 

이때 일어난 에피소드 몇 개가 있는데요.

 

많은 엔지니어들이 함께 갈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결국 여러 가지 분야의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도록 준비해 갔더랬습니다. 공구(대형 카타칼, 롱 드라이버, 뺀지 등등)를 챙겨갔는데 이왕이면 폼생폼사로 정리한다고 007가방처럼 생긴 공구가방을 사서 차곡차곡 넣어 갔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인이 아니고 엔지니어들이라면 이런 가방이 있는 것쯤은 알고 있는데, 평양에선 그런 게 없었나 봅니다.


멀쩡한 서류가방에서 흉기들이 나오자 북한공무원이 눈알에 심줄이 돋기 시작하더니 이거이 뭐냐고 물어봅니다. 아차... 작년에도 노트북가방에 30cm짜리 십자드라이버 있는 줄 모르고 비행기 탔다가 쫓겨날 뻔 했는데, 엔지니어들은 공구를 흉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일 같이 지니고 다니는 도구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그러다 보니 가방에 큼지막한 드라이버 하나 쯤 들어 있어도 출입국심사 할 때 '위험한 물건은 소지 하지 않으셨지요?' 라고 물어보면 항상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후에 곤욕을 치르곤 합니다. 제 자랑 같지만 김정일이 상하이에 극비리에 방문했을 때, 저도 마침 상하이에 갔었는데요. 아무 생각 없이 흉측한 드라이버를 노트북 가방에 넣어갔고 간 걸 깜빡해서 일시적으로 강화된 입국심사에서 곤욕을 치룬적도 있습니다.그나마도 미국의 9.11 사태 이전에 일이니까 가능했던 얘기죠.


여튼 각설하고 위기 상황… 그 때 문득 떠오른 단어 '빛섬유까벨'!


"저는 빛섬유까벨 기술자입니다! "


분단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북과 우리의 언어 사용에는 괴리가 커졌습니다. 북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래어 사용이 잦고, 전문용어는 번역없이 원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다 보니 기술적인 대화를 할 때는 두고두고 힘겨웠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빛섬유까벨은 우리가 말하는 광케이블(Optical fiber cable)이죠. 한자식 표기인 '光'을 '빛'으로 'fiber'를 '섬유'로 거기다 러시아식 발음을 사용하다 보니 'Cable'이 '까벨'. 이런 식이었습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북한의 소학교 교과서
 

그 다음 질문은 '유인물이나 책 같은 건 없지요?' 이었습니다. 신기하네. 이런 걸 다 물어보네. 역시 여기가 북한이라서 그렇구나. '네, 없습니다.' 똑 같은 걸 다시 물어봅니다. '네. 없어요.'  이런... 또또 물어봅니다.

제가 인격수양이 덜 되어서였는지 갑자기 얼굴에 짜증이 올라 왔습니다. 사실은 여기가 평양이란 걸 벌써 까먹었었는지도 모릅니다. 통과시키면서 북한 공무원이 갑자기 물어보더군요. "우리 위원장 동지는 언제 서울을 답방하십니까?" 이 사람들 참 듣던 거하고는 다르네. 생각과 달라도 많이 다르구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공화국 분들이 잘 아시겠죠. 허허." (북한 사람들은 자기네를 공화국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동무는 자기보다 낮은 사람, 동지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으로 구분되더군요.)

나중에 고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다가 가방을 열어보니 가방 맨 밑에 책이 3권 있었습니다. 입국심사에서 나를 쏘아보던 입국심사관은 분명히 X-ray로 그걸 봤을 텐데, 전 아무 생각 없이 '없다.' 라는 답변을 눈에 힘을 줘가면서 했으니... 갑자기 등에 땀이 흐릅니다.


사장님이 북한에는 전문 기술서적이 없더라, 기초적인 서적들 좀 전달해 주면 좋아할 거다. 하시 길래 허겁지겁 몇 권 사왔던 건데 전 그걸 까맣게 까먹었고... 책이 있는 걸 아는데 계속 없다고 하니, 입국 심사관은 이 자식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는데, 참 뭐라고 할 수가 없네. 뭐 이런
상황이었나 봅니다.

 

일단 공항을 나오고 나서는 북한 조평통 소속 직원들의 안내(감시가 더 맞지만 그들은 분명히 안내라고 거듭 강조, 어떨 땐 여행 가이드 같기도)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평양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김일성 동상에 들려 참배(?)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평양의 김일성 동상

 

국내에서 교육을 받을 때, 현대 직원이 알려준 거라 갑자기 놀라지는 않았지만, 정말 껄끄럽습니다. 교육 당시에 그 참배를 안하면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비즈니스야 때려치우고 국내로 돌아 와버리면 되지 않겠냐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더군요. 이걸 해야 하긴 하는데, 정말 하기 싫다. 이래보여도 내가 국민학교 졸업식 때 반공어린이상을 수상한 반공소년이었는데...

 

의외로 고민은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인원이 너무 많아서 대표로 몇 명만 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첫 방문이지만 방북 경험이 있던 분들이 있어서 인지 그분들이 나서 주시는 덕에, 결국 참배 코스는 들렸지만, 나는 안했다(?!)라는 변명거리가 생겼습니다. 여기서 짧은 묵념을 하는데 동상 앞에 꽃을 가져다 놔야 합니다. 향 같은 것 없고요.

 

그런데 이 꽃이 공짜가 아닙니다. 돈을 내고 사야 합니다! 북한 방북 기간 내내 저는 북한돈을 쓸 일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북한 돈으로 환전할 필요 없다라고 안내를 받은 상태였고, 실제 체류 기간 동안에 돈을 쓸 만한 장소로 내보내 주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북한에서 달러($)가 계속 오가는 걸 심심치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증오한다는 미제의 돈이 북한에서 사용될 수 있다니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경험이었죠.


 

 

 

평양에서의 일정


고려호텔을 숙소로 정하고 평양정보센터(PIC)로 향한 일행에게 북측은 기증품이 중국 세관에 압류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런 난감한 사안을 북한 측은 어떻게 대응할까? 우리를 그냥 쫓아 버릴까? 중국이랑 마찰이 있을 수도 있겠지? 이런 사건은 기증의 수혜기관인 PIC가 주체적으로 풀어나갈까? 조평통이 나서나? 기증품들은 언제쯤에나 가져올 수 있을까? 마냥 평양에서 물건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는데...'다른 분들도 대부분 저와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남북교류가 몇 번이나 있었다고, 이제 막 시작단계에서 훼방을 놓는 중국은 뭐냐고, 투덜 거리는 분들도 있었고요.

 

허망할 정도로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더군요.PIC에서 북경 대사관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차저차해서 우리 물건이 거기 있으니 즉시 보내주시오. 요 정도 수준의 공문 한 장은 바로 다음 날 화물기를 통해 모든 기증품들이 평양으로 반입되는 기적(?)을 보여주더군요.

 

압류제품이 도착해서 제품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또 한 번 느낀 것은 북한 측의 남북 협력 사업에 대한 기대가 정말 크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품을 포장할 때 어디에서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남조선의 불온한 출판물이라고 볼 수 있는 '스포츠 조선'을 포함한 신문지 수백 장들이 포장용 안전재로 사용되어 있는데도 신경쓰지 않더라는 거죠.  입국수속장에서 책을 들고 들어온 제 실수나 신문지가 다량 함유된(?) 기증품들이 문제 삼지 않을 만큼 북한측의 교류에 대한 열망은 컸고, 반대로 북의 SW기술이 대단하다더라 라는 말을 듣고 공동개발이나 협력을 꿈꾸고 왔던 사람들의 실망은 대단했습니다.

국정원에서도 정말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실히 파악해달라라고 했는데, 그 당시 북한의 IT기술은 전반적으로 남한의 10년 전 수준으로 봐도 될만큼 초라한 수준이었습니다. 기술혁신이 빠른 IT기술에서 10년차이는 다른 영역의 10년과 단순 비교가 어려운 차이 입니다. 현재 우리를 생각해봐도 10년 전에는 모뎀으로 PC통신 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시절이잖아요.


체류 기간 동안 정중하게 사진촬영이 가능한가를 묻고 허락되는 부분들만 찍었지만 귀국후 정부에 보고한 내용은 한 마디로 '눈물이 나올 지경' 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을지 많이 궁금하긴 한데 뭐 초대도 없고,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가끔씩 궁금하네요.

 

우려했던 기증품 압수는 북측에서 알아서 풀어낸다고 하니 명함을 교환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실장, 과장 같은 직책이 북한에서도 쓰이는구나 별 차이 없네 했지만 이번 민간교류를 담당한 대외사업실장 이란 직함이 따로 있는 것을 보면서 이들도 정보화시대의 중요성은 확실히 깨닫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명함에서 특이한 건 기사장/부기사장 과 같은 명칭인데요.

 

한국에서 엔지니어를 친숙하게 공돌이로 불러주는데 비해 이들은 우리가 못 살던 시절 기술자에게 존칭처럼 썼던 '기사'란 단어를 유지해왔더군요. 기사장은 PIC에서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모든 명함에 e-mail 주소는 당연히 없었고, 텔렉스 번호가 찍혀 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인사를 나눈 사람들 중에는 이란 등으로 유학을 다녀온 해외파도 있더군요.

 

간단히 센터를 소개해 주는데,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에 한국전산원이 있다면 북한은 거기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평양정보센터(PIC)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북측의 엘리트들이 생활하고 신기술을 연구하는 곳이니 그 시설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는 부족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당구대와 하이네켄 파라솔이었는데, 당구야 사회주의 국가에서 치지 말라는 법 없지만, 하이네켄 파라솔은 정말 충격이더군요.

 

일련의 이런 생각지 못했던 모습들에서 저는 '북한은 분명 변화를 위한 개방을 준비하고 있다. 뭔가 앞으로 남북이 더 잘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같은 냉전체제에서 멸공방첩이라는 틀 속에서 자란 세대들과 달리 다음 세대들은 더 자유로운 사상으로 북의 사람들과 호흡하고 새로운 일들을 해낼 수 있겠구나. ' 라고 생각했지요. 10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생각을 떠올려 보면, 너무 순진한 기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평양 시내에 배치된 여군들
 

이어지는 환영만찬에선 '평양'이라는 이름의 북한제 소주가 나왔고, 대동강에서 잡아왔다는 잉어회가 제공되었습니다. 우리와 다르게 중국처럼 수저 받침을 쓰는 게 조금 신기했고, 식사를 도와주는 여성 안내원들의 미모는 여전히 고전적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일행 중에는 여자가 없었기에, 체류 내내 북측 사람들과 화제가 궁해지면 언제나 '남남북녀'를 끄집어 내서 얘기하곤 했습니다. 남측에서 올라온 분들 중에서 어떤 분이 발렌타인 17년산을 꺼냈고 환호 속에 남북의 사람들이 건배를 수차례 했습니다. 탄띠로 살인을 할 수 있다는 북한여군들의 동영상으로 정신교육을 받던 군대를 나온 제게 북한은 쉽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곳이었지만, 방북 경험이 있는 분들이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라고 긴장하지 말라며 술을 연신 권해 옵니다.

여기가 사지인지, 그냥 북한인지, 그간의 북측 사람들 행동은 그렇게 위험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술잔이 오고 갈수록... '그래.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라며 조금씩 긴장을 내려 놓게 됩니다. 술자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긴 환영만찬은 이어지고, 평양의 첫날 밤은 그렇게 술 속속에 파묻혔습니다.

 

 

다음시간에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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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知天命 | 작성시간 11.04.01 mmm
  • 작성자도원 | 작성시간 11.04.01 걷는 동작이 팔동작도 생략하고. 필요한 동작만 취하네요.
  • 작성자cuverin | 작성시간 11.04.01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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