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849842515
미군정 시기, 문교부 교화국 담당이었던
유진 크네즈 미군 대위가 있었다.
이 남자가 한국을 위해 해 준 것은...
1. 원각사지 십층석탑 복원
지금은 이렇게 예쁘게 있는 석탑이지만,
해방 당시만 하더라도 이렇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단 3개 층이 분리되어
땅에 그대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위쪽이 시원하게 벗겨진 탑이었다.
'올려'
그러자 크네즈 대위는 미군 공병대를 동원하여
땅에 떨어져있던 상단 3층을 다시 올려놓는다.
복원한 이 탑을
한국인들에게 우호의 의미로 선물하고 싶다.
(*본인이 실제로 회고하며 한 말)
저기요! 그러니까 저 탑이 어떻게 되어있었냐면요!
몰라 걍 올려 내 감대로 할게
대위님?!!!!!!! 야!!!!
...어? 왜 잘하지?
다만 아무런 전문가들의 조언도 없이
오직 자신의 경험과 의지대로 복원했다고 하니,
직감도 이 정도면 신기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는 이 복원 이후 한국 언론들로부터
'파고다 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호우총 발굴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적·근대적 발굴인 호우총 발굴도
크네즈 대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미군정의 허락 없이는 발굴이 불가능했는데,
크네즈 대위가 '문화재 보호에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며
미군정을 설득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분 개발 반대!!!
외국인이 우리 민족의 능에 손을 대다니?!
다만, 당시 경주 시민들은 외국인인 크네즈 대위가
한국의 왕릉을 파헤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발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가
'발굴은 우리들이 하고 크네즈 대위는 참관밖에 안 함ㅇㅇ;;'
하고 설득한 후에야 진행될 수 있었다.
뭐 사실이기도 하고.
3. 국립민속박물관 설립
국립민족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의 설립에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주었고...
4. 2만 점의 문화재 부산으로 피신
1.4 후퇴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밀리며
다시 전선이 내려올 것이 확실시되자...
빨리 부산으로 유물들 옮겨오셈;;
당시 퇴역 후 미국의 부산 공보원장이었던 크네즈는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에게 중공군이 개입해
전세가 뒤바뀔 것임을 슬쩍 귀띔하고,
부산으로 유물들을 소개시킬 것을 충고한다.
뭐?! 다시 서울이 위험할 거라고?! 어... 어떡하지?
한국 정부랑 미 대사관이 '서울은 안전하다'고만 하면서
유물을 옮길 허락을 안 해주는데ㅠㅠㅠㅠㅠㅠ
하지만 북한군이 내려와서 유물을 옮긴다는 소문이 퍼지면
시민들이 또다시 혼란에 빠질 것은 당연한 일.
김재원 관장은 어떻게든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유물을 피신시킬 허락을 받아내지만
말 그대로 '비공식적'이라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이 시발럼들이...
조금만 기다려! 내가 미군 애들한테 말해놓을게
친구인 김재원 박물관장에게서 사정을 들은 크네즈는
미국 주한대사의 허락 없이 군대의 운송수단을 이용해
2만 점의 유물들을 실어나를 계획을 세운다.
그는 미군 수송부에 연락해
서울역까지 유물을 실어나를 트럭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전시상황인 만큼
트럭은 수시로 검문을 받아야 했는데...
'열어'
크네즈는 직접 트럭 조수석에 앉아
검문 하이패스로 유물들이 빨리 운송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서울에 군수품을 전해주고 돌아가는 빈 열차에
2만여 점의 유물들을 모두 실어보낸다.
하지만 이 열차는 다른 군용 열차에 순서를 양보하고,
공산군의 공격이 염려될 때도 멈추느라
생각한 것보다 천천히 와야 했는데...
가고 있지? 가고 있지?가고 있지?
크네즈는 일일이 모든 검문소에 전화를 걸어
유물을 담은 열차의 이동을 확인,
무사히 도착한 유물들을 재빨리 미 공보원에 보관한다.
서울이 재함락당한 후 동베를린 영화관에서
상영해 주었던 소련 뉴스에서는
'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의 문화재를 약탈했다'며
텅 빈 국립박물관을 보여줬다고 한다.
당신이 약탈했다고 염병 떤 한국의 문화재,
경남도청 관재국 건물로 무사 이동되었다.
불만 있습니까 코뮤니스트들아?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므로,
그만큼 유물 수송이 감쪽같았음을 보여주는 일화.
또한, 미처 가져오지 못한 200여점의 중앙아시아 벽화들이
서울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김재원 관장에게서 전해듣자,
또다시 전화찬스를 통해 동료인 찰스 먼스키 대령에게서
군용 화물차 3대를 지원받는다.
이로써 중앙아시아 유물들 역시
무사히 부산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만약 유물들이 파괴되었더라면
크네즈 역시 큰 징계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네즈의 과감한 결정과 기지 덕분에
수많은 유물들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하지 않고
대한민국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을 '첫사랑과 같은 나라'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는 1952년 한국의 여배우였던
최지애 씨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고...
1959년 '김해 상정동의 사회학적 연구'를 주제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 내용은 한국의 촌락을 다룬다)
그는 한국의 문화재를 보호한 공로로,
78세의 나이가 된 1995년이 되어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0년 별세한 그는,
첫사랑의 수많은 문화를 지킨 위인으로
우리에게 널리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