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종려(棕櫚)나무와 건저(乾猪)

작성자천상희|작성시간14.08.08|조회수313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과 학자들의 문집을 보면 참으로 황당한 기록들이 많습니다. 이 황당한 기록들은 한반도 조선의 그 허구를 말하는 기록들 입니다.

본인이 찾아본 기록들 중에 그 하나를 보면,

 

동사강목 제9상  정축년 의종 11년(송 고종 소흥 27, 금주 양 정륭 2, 1157)

 

○ 대궐 동쪽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영의(榮儀)는 대궐 동쪽에 익궁(翼宮 날개같이 양쪽에 붙여서 지은 궁전)을 이룬다면 기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믿고 익양후(翼陽侯)의 저택을 빼앗아 이궁을 만들었다. 궁(宮)은 수덕(壽德)이라 하였고 전(殿)은 천녕(天寧)이라 하였다. 또 시중 왕충(王冲)의 저택을 안창궁(安昌宮)으로, 전 참정(參政) 김정순(金正純)의 저택을 정화궁(靜和宮)으로, 평장사 유필의 저택을 연창궁(連昌宮)으로, 추밀원부사 김거공(金巨公)의 저택을 서풍궁(瑞豊宮)으로 삼았다. 또 민가 50여 채를 허물어 태평정(太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하여 액(額)을 쓰게 하고 곁에 유명한 꽃과 기이한 과수를 심고 기려하고 진기한 물건들을 그 좌우에 늘어놓았다. 정자 남쪽에 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지었고, 그 북쪽에 양이정(養怡亭)을 꾸미고 청자 기와를 얹었고, 남쪽에 양화정(養和亭)을 꾸며 종려(棕櫚)를 덮었다.  

 

임하필기  춘명일사(春明逸史)  영남(嶺南)의 종려(棕櫚)나무

 

영남 군영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높이가 몇 길이 되고 잎이 우산처럼 넓어 시원한 그늘이 즐길 만하였으니, 마땅한 토양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장수(將帥)로 있던 자가 서울에 가지고 와서 옮겨 심었는데, 몇 년 동안 재배하였으나 끝내 고사(枯死)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아깝게 여겼다.
심 문숙공(沈文肅公) 또한 큰 종려나무와 파초(芭蕉) 두 그루를 가성각(嘉聲閣) 창 앞에 심었는데, 높이가 처마를 넘어갈 정도여서 세상에 일컬어졌다. 공이 죽은 뒤에 파초가 먼저 죽었고, 종려는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끝내 소재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숙종실록보궐정오 18년 임신(1692,강희 31)  10월30일 (을사) 

 

임금이 후원(後園)에 앞서 심었던 종려(棕櫚) 나무를 뽑아서 도로 민가의 본주인에게 보내도록 명했다. 임금이 일찍이 종려 나무를 구하다가, 전(前) 안악 군수(安岳郡守) 홍만회(洪萬恢)의 집에 있다는 것을 듣고서, 궁중(宮中)의 하례(下隷)로 하여금 구해 오도록 했었다. 대개 홍만회는 곧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막내 아들로서 국척(國戚)이었기 때문이다. 홍만회가 뜰로 내려와 엎드려서 말하기를,
“이마에서 발끝까지 국가의 은덕을 입었기에 머리털과 피부라 할지라도 감히 아끼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꽃나무이겠습니까? 다만 국척(國戚)이라고는 해도 소원한 외방(外方)의 신하에 속해 있으므로, 꽃나무를 올림은 죄가 되는 것이어서 감히 할 수가 없고, 또한 신(臣)이 감히 그대로 둘 수도 없습니다.”
하고서 즉시 뽑아서 버렸던 것이다. 궁중의 하례가 그런 사실을 아뢰므로, 임금이 훌륭한 일이라고 칭찬하면서 드디어 이러한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위의 기록들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들 입니다. 백과사전에서 종려(棕櫚)나무는 야자나무과에 속해있는 식물로서 대추야자로 불리며 서식지는 열대,아열대 지역 입니다.

현재 제주도에서 종려나무를 식재하고 있지만, 이는 과실 수확의 용도가 아닌 관상용 나무가 대다수 입니다. 백과사전에서는

(야자나무류가)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심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종려죽(Rhapis humilis)이 1912~25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려죽과 함께 몇몇 종류의 야자나무가 도입되었고 이후 1956~64년쯤에 많은 종류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심고 있는 종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약 30~40종류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려죽(棕櫚竹)과 종려(棕櫚)나무는 엄현히 다른 품종 입니다. 종려죽(棕櫚竹)은 주로 화분에서 심는 관상용 으로 키나 작습니다. 그러나 종려(棕櫚)나무는 그 키가 10~30m의 엄청난 키의 작물 입니다.

이 엄청난 키의 작물이 조선에 있었습니다. 백과사전에서 야자나무류의 식재 역사가 길어야 일제시대로 소급 됩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서는 고려에,조선에 야자나무류가 존재 했습니다.

동사강목의 기록을 보면, 고려때에 임금이 사는 궁궐 정자에 종려를 덮게 했다고 했습니다. 또 임하필기의 기록에서 경상도 영남 군영에 수장(數丈)의 높이의 종려나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은 10척(尺) 길이를 말하는데, 3.58m에 해당 됩니다. 수장(數丈)이라 했으므로 적게 잡아도 10m 이상의 나무라 판단 됩니다. 동사강목의 기록이나 임하필기의 기록을 통해보면 이는 완연한 야자 나무 입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 임금의 후원에 종려나무를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기본적으로 열대,아열대의 작물 이며 혹한의 겨울에 살수 없는 작물입니다.

그런데 동사강목이나 조선왕조실록,임하필기의 기록을 한반도 관점에서 보면, 눈이내리는 겨울이 있는 혹한의 날씨가 존재하는 지역에 야자나무과의 종려(棕櫚)나무가 있었습니다.

현재 제주도의 종려나무의 식재 기원은 일제시대 입니다. 이는 한반도 조선론의 극명한 허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황당한 사실이 이뿐이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과 학자들의 문집의 기록을 보면, 돼지고기에 관련된 기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호근 선생님이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하셨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 돼지고기는 제사등에 두루 쓰였으며 또 산림경제,동의보감에서는 돼지고기가 약용(藥用)으로 두루 쓰였습니다.

세종 25년 계해(1443,정통 8)  3월4일 (기미) 의 기록에서 "도승지 조서강(趙瑞康)이 호가(扈駕)한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사오니, 보통 사람도 그러하온데 어찌 궐내에서 쓸 수가 있겠습니까. 먼 도는 진상하는 것을 우선 정지시키되, 가까운 도는 정지시킬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라는 기록을 통해서 조선인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아마도 실록에서 조선인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한 도승지 조서강(趙瑞康)은 조선의 서역(西域) 출신 관료로 볼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합니다. 왜냐하면 실록에서 돼지고기에 관련된 기록들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임금이 신하에게 말린 돼지고기(乾猪)를 하사 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여기서 말린 돼지고기 건저(乾猪)는 한반도에서 익숙한 산물이 아닙니다.

교육방송에서 진행하는 세계테마기행을 보면, 특히 서북 유럽지역과 중국의 서북지역에서 주로 말린 돼지고기를 만들어 먹는데,서북 유럽의 경우 돼지고기가 쉽게 부패하므로 이를 장기간 먹기 위해

기본적으로 돼지고기에 소금으로 염장(鹽藏)하여 다시 훈제하여 말리면 수년동안 부패를 막을수 있다고 합니다. 중공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돼지고기를 상하지 않게 건조하려면 염장과 훈제는 필수 입니다. 이러한 말린 돼지고기  건저(乾猪)가 만들어 지는 지역이 실록에서 경기도,경상도,평안도,함경도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계테마기행 유럽지역에서 수제로 만들어지는 말린돼지고기 햄은 무척이나 비싸다고 합니다. 이토록 비싼 산물이니 조선의 임금이 신하에게 말린 돼지고기  건저(乾猪)를 하사하였던 것입니다.

한반도에서는 말린 돼지고기  건저(乾猪)가 만들어 지는 지역과 관련이 없는 지역 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