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休公 遺事 中 留念할 內容
後孫으로서 先祖님의 遺事를 알아 얼을 이어받고 昇華시킴이 道理이기에 遺事를
墓碣銘이나 關係되는 文集 等을 參考하여
6代祖 부터 13代祖까지의 遺事를 整理하여 ‘삼체계 카페’에 올렸다.
그런데 三休公과 아드님 삼 兄弟分의 遺事를 보니 지금까지 口傳으로는
三休公께서는 龜尾에 살림나 사르셨고, 虎溪는 紫湖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事實과 달라 各種資料를 通해 다음과 같은 內容으로 整理해 본다.
이 글을 보고 各自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先祖의 文集이나 家乘, 家狀을 찾아보고
關係되는 資料를 提示해 주면 遺事 定立에 도움 되겠습니다.
1. 三休公께서 寅丘마을에서 一生 동안 居住하셨다.
1)三休公의 墓碣銘 - 冶城 宋履錫 撰
‘公의 先故庄은 紫陽洞에 있으니 湖叟公께서 棲息하고 隱居하신 땅이라 公이 그 山水를 사랑하여 그 洞里 虎溪의 가에 집을 짓고 詩를 지어 읊으면서 마음이 가는대로 유유히 生活하며 그 집을 三休亭이라 하였다.’
2)從兄 暘溪公이 三休亭을 標題하여 지은 詩. o국역양계선생문집 : P34
o題從弟德基三休亭 (종제 덕기의 삼휴정에 표제하여)
寅丘의 산수 우리 집 세전의 보물이라
정자 짓기를 기꺼이 종제가 돌보다
산봉우리가 나비 눈썹을 그리니 운대가 모이고
연못이 거울을 여니 해오라기의 털이 번진다.
마음이 태극에 노니 사람이 옥 같고
집이 가난하지 않으니 국화에 돈이 있다.
조물주가 나를 유독 잘 그리니 처음으로 알겠으니
조석으로 안개와 남기가 기지와 권모를 드러낸다.
3)無齋公의 遺事 - 曾孫 一鋼 謹職 o무재부군 유사 : p139
丙戌(1646)년 正月 12日 紫陽縣虎溪村에 있는 옛집에서 公을 낳으셨다.
o解釋 : 祖父이신 湖叟公께서 紫湖精舍에서 詩友들과 交遊하신곳이 寅丘마을이다, 그래서 三休公께서 寅丘마을의 虎溪가에 三休亭을 지었고, 從兄 暘溪公이 寅丘마을에 新築한 三休亭을 標題하여 詩를 지었고, 3남이신 無齋公이 虎溪村에서 태어났기에 三休公이 寅丘마을에 사르심이 確認된다.
2.司果公께서 寅邱에서 龜尾로 移住를 하셨다. o司果公墓碣銘(鄭華植撰)
1)司果公 墓碣銘에 5世孫 龜湖公(휘 履休)의 家狀을 參考하여 지은 碑文에 ‘丙辰(1676)年에 武科에 오르니,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에 除授되였다. 그러나 權門勢家들의 자리다툼과 橫暴함을 보자 문득 下鄕의 뜻을 定하고.....
돌아와서 寅丘로 부터 龜尾로 居處를 옮겨 아우 時喜와 時贊과 더불어 學文을 討論하고 談樂하게 지냈으며, 모든 子姪들을 가르치고 기르며 모두 다 義方 즉 義를 지켜 外貌를 端正히 함을 지키도록 하였다.‘
o解釋 : 寅丘마을에서 龜尾마을로 居處를 옮긴 분은 司果公이다. 司果公의 墓碣銘에 官界에서 隱退하여 돌아와 寅丘로 부터 龜尾로 居處 를 옮겨 아우 時喜와 時贊과 더불어 學文을 討論하고 談樂하게 지냈음 을 봐서 그렇게 解釋된다.
3.虎溪 地名
1)三休公의 墓碣銘 - 야성 송이석 근찬(冶城 宋履錫 撰)
公의 先故庄은 紫陽洞에 있으니 湖叟公께서 棲息하고 隱居하신 땅이라 公이 그 山水를 사랑
하여 그 洞里 虎溪의 가에 집을 짓고 詩를 지어 읊으면서 마음이 가는대로 유유히 生活하며 그 집을 三休亭이라 하고 平素에 居處함에....
2)無齋公의 墓碣銘 – 鄭華植 撰 o무재유고 P162
晩年에는 兄弟間에 떨어져 있음을 恨歎하여 서둘러서 歸鄕하여 章田으로 가서 여울 위에
집 한 채를 짓고 대나무와 꽃나무를 심어 그곳에서 晩年을 보내었다.
3)失鄕感別詞 - 鄭泓植 著 P20
‘虎溪邊 들어서니 仁邱月淵 넓은 村樣
明朗하고 雄壯하다 웃둑한 江湖精舍‘
o解釋 : 虎溪는 寅丘마을과 月淵 마을 사이에 흐르는 실 溪川 즉 앞거랑을 指稱하는 것 같다.
<資料整理> : 12世孫 炳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