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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이야기

[스크랩] 환구서원 약지

작성자마당지945|작성시간16.11.21|조회수106 목록 댓글 0






                                                  I. 沿  革

❍ 1705年(乙酉 肅宗 31)
    湖叟 鄭世雅 先生과 柏巖 鄭宜藩 義士 外 七賢을 祭享코자 監營과 郡邑의 支援을 받아 紫陽面 日見峯下에 忠賢祠를 세움.
  이어 監司가 狀啓를 올려 朝廷의 許可를 받으려고 했으나 該當 部署의 回答이 없어 遲滯하다가 1714년(甲午)에 中止令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함.
    당시 戰死諸賢錄에 登載된 분은 다음과 같다. 성균생원 贈 통덕랑 호조정랑 鄭宜藩, 성균생원 贈 통덕랑 호조정랑 崔仁濟, 贈 선무랑 한성부판관 金演, 贈 봉훈랑 한성부판관 李榮根, 贈 봉훈랑 한성부판관 李之馣, 贈 봉훈랑 의빈부도사 李得龍, 贈통덕랑 공조좌랑 鄭碩男, 贈 통훈대부 형조정랑 金大海이며 1708년(戊子)에 崔壁南의 壬辰日記에 의해 李廷芬. 李順福, 李日將, 孫應晛 等이 追加로 登載됨.
❍ 1718年(戊戌 肅宗 44)
   環丘里(大環)에 書齋를 建立하여 門中子弟들의 敎育場所로 사용.
❍  1777年(丁酉 正祖1)
   서재 뒤편에 環丘世德祠 建立
❍ 1778年(戊戌 正祖2)
   3월 子孫 等이 湖叟先生의 位牌를 奉安하고 柏巖公을 配享.   奉安 告由文은 大山 李象靖先生이 撰함.
❍ 1784年(甲辰 正祖8)
   2월 柏巖公에게 忠臣孝子 旌閭가 내려짐.  旌閭閣의 記文은 艮翁 李獻慶과 樊巖 蔡濟恭先生이 撰함.
❍ 1788年(戊申 정조12)
   湖叟先生에게 剛義公 諡號가 내려짐.
❍ 1868年(戊辰 高宗5)
   院⦁祠 毁撤令에 의해 廟宇와 講堂, 東⦁西齋가 헐리고 忠孝閣과 追遠堂만 남음.
❍ 1990年(庚午)8月7日
   環丘世德祠가 慶尙北道 民俗資料 第87號로 指定됨.
❍ 2007年(丁亥) 
   環丘世德祠 復元推進委員會 發足. 慶尙北道로부터 復元承認.
❍ 2008年(戊子)12月
   世德祠 復元
❍ 2010年(庚寅)
   11월에 講堂(興仁堂)建立.
❍ 2011年(辛卯 10月)
   環丘世德祠를 書院으로 陞院할 일로 9월에 臨皐書院에서 運營    委員會 會議를 개최하고 10월 1일

  에 臨皐書院 堂員 總會를 開催. 當日 堂員 41名과 鄭氏門中 代表 24名이 臨皐書院 興文堂에 모여서

  世德祠를 書院으로 陞院해야 한다는데 意見을 모으고 任司를 選任함.

  玉山書院과 陶山書院을 비롯한 道東書院, 臨川書院, 屛山書院, 道岑書院, 檜淵書院, 東洛書院, 靑湖

  書院, 鳳山書院 등 大邱․慶北 10個處 書院에 通文하여 答通文을 수합하니 同聲相應으로 贊同함.
❍ 2016年(丙申 10月) 
  書院주변 공사 完了와 묘우 단청을 마침.

ㆍ규모는 廟宇1棟 正面3間 側面1間 21.9㎡, 講堂 1棟 正面5間
  側面2間 77.8㎡, 東西齋 各 1棟, 內外三門 各1棟, 化粧室 1棟,
  垣墻 1式
❍ 2016年(丙申) 11月 18日
   環丘書院 陞院奉安告由 및 竣工式 거행.

 
                                        II. 奉安位 行績 要略

1. 湖叟 鄭世雅先生
  字는 和叔, 號는 湖叟, 諡號는 剛義公이다.
先生은 1535年(中宗 30) 永川郡 紫陽 魯巷里(현재는 댐건설로 수몰)에서 參奉 鄭允良(退溪門人)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貫鄕은 迎日이니 고려조 樞密院知奏事 鄭襲明의 15世孫이고 成均館 司成 從韶의

玄孫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學文을 배웠으며 1558年(明宗 13) 24세에 進士試에 入格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行動이 端整하고 진중 하였으며  謹嚴하고 篤實하였다. 또한 義氣가 豁達해서 依然한 丈夫의 風道가

있었다. 평소 어버이에게 孝道하고 집안이 和睦하였으며 鄕黨에서는 공손하고 財利를 보는 데는 自身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며 남의 궁핍한 것을 보고서는 베풀어 주기를 미치지 못할까 念慮하였다. 남의 長短點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서도 그 是非의 判斷에는 明白하여 한 칼로 兩端을 가르듯 하였다.
  1592年(宣祖 25) 壬辰倭亂이 일어나 三京을 빼앗기고 임금이 播遷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奮然히 책을 덥고 鄕村의 子弟들을 동원하여 編隊를 정하고 檄文을 작성하여 900여명의 義兵을 糾合한 후 義兵大將에 추대되었다. 5月에 朴淵(영천 화산)에서 倭賊과 싸워 큰 戰果를 거두고 7月 27日에는 權應銖, 鄭大任, 朴毅長 등 인근 守令 및 義兵將들과 협력하여 永川城을 수복하였다. 다시 8月에는 慶州의 倭敵을 격퇴하여 경주를 수복하였다. 永川과 慶州를 회복함으로써 慶尙道 東北部지역이 온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慶州城 전투에서는 長子 宜藩과 많은 義士들이 戰死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듬해 平壤과 서울이 차례로 收復되자 군사를 曺希益에게 맡기고 紫陽으로 돌아와 후진양성과 蒼石 李埈, 芝山 曺好益, 旅軒 張顯光, 慕堂 孫處訥 등과 交遊하며 자연을 벗하고 悠悠自適하였다.
  體察使 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不就하였고 나중에 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돌아와 後進養成에 힘쓰다가 1612年(光海 4)에 세상을 떠났다.
  旅軒 張顯光이 글을 가지고 弔喪하여 말하기를 “公이 鄕黨에 계실 때에는 輕薄한 者가 부끄러워할 줄 알고 게으른 자가 振作할 줄 알고 착한 者는 믿는 바가 있어서 스스로 沮害 당하지 아니하고 약한 者는 꺼리는 바가 있어서 감히 芳姿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미루어 그 무거운 바를 알 수 있겠다.”라고 칭송하였다.
  1732年(英祖 8) 兵曹判書에 추증되고 1788年(正祖12年)6月에는 剛義公의 諡號가 내려졌으며 環丘世德祠에서 奉享되었다가 2016年 環丘書院으로 陞院되어 맏아들 宜藩과 함께 祭享하다.


                                                     年 譜
1. 1535年(中宗 30年 乙未) : 永川郡 紫陽縣 魯巷村(영천시 자양면 노항동) 옛 댁에서 誕生.
2. 1557年(明宗 12年 丁巳, 23歲) : 比安縣監 一直 孫致雲의 따님과 婚姻.
3. 1558年(明宗 戊午, 24歲) : 進士試 及第(試官 趙士秀, 李浚慶)
4. 1565年(明宗 乙丑, 31歲) : 妖僧 普雨 처단을 상소
5. 1568年 3月 26日(宣祖 元年 戊辰, 34歲) : 母夫人 別世. 喪事와 祭禮 一切를 朱子家禮에 따르다.
6. 1580年 3月 13日(宣祖 庚辰, 46歲) : 父公 別世.
  執喪을 制度에 넘게 엄히 하고 辛苦를 감내하니 鄕里 사람들이 孝子라고 일컬었다.
  거처하던 곳에 龍山書舍(현 紫陽書堂)가 있었는데 건물을 수리하여 鄕里의 子弟들을 모아 詩書를

  講論하다.
7. 1585年 가을(宣祖 乙酉 51歲) : 長子 宜藩이 成均生員에 入格.
8. 1590年 7月 15日(宣祖 庚寅, 56歲) : 楓溪 曺德驥, 惺惺齋 琴蘭秀 等과 함께 松壕亭 柳汀의 松壕

   精舍에서 變亂이 있게 된다면 軍士를 訓練시킬 計策과 百姓을 살릴 方途를 力說하고, 文士들과 山과

   바다를 遊覽하며, 憂國詩를 주고받음.
9. 1592年 4月 13日(宣祖 25年 壬辰, 58歲) : 壬辰倭亂이 일어남.
   ․식구들을 거느리고 騎龍山中(聖穴庵)으로 잠시 避難.
   ․5月初 처음 義擧. 맏아들 宜藩에게 이르기를 “이제 임금이 파천하셨으니 우리들이 어찌 草間에서

    편안히 살 것을 구하겠는가”라고 하여 宜藩이 이에 응해서 먼저 여러 형제들로 하여금 行伍를 짜고

    檄文을 만들어서 鄕兵을 모집. 이때 族弟(10촌) 大任이 그의 再從 大仁과 함께 와서 先生을 뵈오니

   先生이 손을 잡고 痛哭하면서 서로 나라를 위하여 殉節하기로 결심하고 군사를 모아 盜賊을 칠 일을

     의논함.
   ․鶴峰 金誠一선생 狀啓에 말하기를 「永川 進士 鄭世雅 등이 五月中에 처음으로 結約을 하고 鄕兵을

    일으켰다」고 하였음.
   ․鄕人들이 先生을 추대하여 義兵將을 삼았다. 鄭大任과 長子 宜藩이 鄕人 曺希益, 曺德驥, 曺珹,

    李蕃,鄭千里, 柳夢瑞 등과 더불어 군사를 모집하니 文武人 합하여 900여명이 되었다. 崔壁南을

    中衛將을 삼다.
   ․15日 倭賊을 郡 서쪽 朴淵(영천 화산 석촌)에서 만나 크게 무찌르다. 이보다 앞서 鄭大任, 曺德驥,

    曺珹, 李枻, 金浩 등으로 하여금 곳곳에 伏兵을 설치케 하였는데 홀연히 왜적이 封庫 御使로 자칭

    하고 나타남에 諸將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先生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반드시 거짓이다”

    하여 모든 次將과 西面 伏兵將 朴應麒, 新寧 義兵將 權應銖 등과 합세하여 공격, 거의 掃蕩하고

    兵器, 錢穀, 文書 등을 노획하다.
   ․6月9日 : 慶州 蚊川 會盟 참가.
   ․6月에 招諭使 鶴峰 先生에게 나라를 지켜야 할 兵士들이 도망하였다가 이제 나타나 義兵을 沮害하

    고 抑制하며 兵使 朴晋이 義兵을 官軍에 편입시키기 때문에 흩어져 수습할 수 없으니 命令을 받을

   곳과 지휘를 請할 곳이 없음을 상세히 말하고, 節制하여줄 것을 請願하다. 正字 柳宗介, 翰林 金垓,

    幼學 申伈, 生員 金翌 등과 더불어 安東府 一直縣 里亭에서 도둑 치는 일을 의논하다. 이때 一直縣

    사람들이 소를 잡아서 대접하였다.
   ․7月初 兵使 朴晋이 先生을 義兵大將으로 삼다. 또한 招諭營에서 先生을 本郡의 義兵將에 命하다.

    鄭大任 등 모든 義士들과 永川城을 탈환할 계획을 수립하고 신녕의병장 權應銖, 신녕군수 韓倜,

    하양군수 曺胤申, 경주판관 朴毅長, 의흥복병장 洪天賚 등에게 원군를 요청하여 26日 永川城을

    포위하고 27日에는 적을 殲滅시킴.
   ․8月 7日, 慶州 慈仁縣(현 경산시 자인면)에서 적을 공격하다.
   ․8月 19日, 朴晋, 權應銖, 鄭大任 등과 慶州城 복성을 꾀하여 安康縣에 이르다.(의병, 승려, 평민

    등 5천여명)
   ․8月 21日, 새벽 慶州城 전투에서 官軍들은 패하여 도망치고 永川義兵만이 孤軍奮鬪하였으나, 長子

    生員 宜藩, 生員 崔仁濟 등 수십명 전사.
   ․아들 宜藩의 屍身을 찾지 못하자 화살로 招魂하여 靈筵을 집에다 설치하고 詩를 구해서 묘를

    만들다. (선생께서 아드님의 屍身을 거두지 못함을 슬퍼하고 冤魂이 의지할 곳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셔서 遠近의 친구에게 輓詞와 祭文을 얻어 옛날 입던 衣冠과 함께 棺안에 넣고 葬事 지내니

    모든 사람들이 詩塚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億壽의 묘도 公의 묘 階下에 쓰다.
   ․亂離事蹟에 말하기를 「宜藩은 믿는 선비인지라 同僚들이 그를 重히 여기더니 갑자기 죽어 그 시체

    마저 찾지 못한지라 宜藩과 평소에 잘 알고 사랑하던 이들에게서 詩를 구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라

    고 하였다.
   ․鶴峰先生(右道監司)이 啓를 올려 戰死者에게 褒賞하고  贈職할 것을 請하여 11月 21日에 宜藩에게

    通德郞(정5품) 戶曹正郞을 증직해서 제사를 儀禮대로 行하다.
10. 1593年 1月(宣祖 26年 癸巳, 59歲) : 長子 宜藩의 焚黃祭를 行하다.
   ․11月 군사를 生員 曺希益에게 예속시키고 紫陽 옛터에 돌아오다.
11. 1594年 6月(宣祖27年 甲午,60歲):族弟 大任을 弔喪하다.
   倡義時부터 同心協力하여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약속한 터이라 더욱 슬퍼하시고 初喪을 마칠 때까지

    머물면서 喪禮諸節을 다스림
12. 1596年 9月 28日(宣祖 29年 丙申, 62歲) : 원근의 同志들과 八公山에 모여 왜적의 再侵을 대비하

    여 뜻을 같이 하기를 神明에게 盟誓하다.
    會盟錄과 唱酬詩가 있으며 선생을 비롯한 회맹에 참여한  愚伏 鄭經世, 淸愼齋 朴毅長, 芝山 曺好益,

    樂齋 徐思遠, 守拙堂 李宜潛등 32명이 각자의 字를 불러 희롱으로 연작한 詩가 있음
13. 1597年 7月 21日(宣祖 30年 丁酉, 63歲) : 火旺山 會盟하다. (회명록 있음)
14. 1599年(宣祖 32年) : 紫湖精舍를 세워 벼슬에는 뜻이 없고 悠悠自適 하면서 後進 養成에 힘쓰다.
15. 1600年 9月(宣祖 33年 庚子, 66歲) : 體察使 梧里 李元翼이 紫湖精舍로 先生을 尋訪하다.
16. 1602年 4月 18日(宣祖 35年 壬寅, 68歲) : 承仕郞(종8품) 軍資監奉事에 除授하였으나 不就.
   ․圃隱先生을 祭享하는 臨皐書院을 道一洞(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重建하여 賜額받다.
17. 1603年 10月(宣祖 36年 癸卯, 69歲) : 四子 守藩이 武科及第.
18. 1605年 4月 16日(宣祖 38年 乙巳, 71歲) : 宣武原從功臣 3等으로 採錄되다.
    7월 三子 安藩 武科及第.
   겨울에 孫子 好仁(安藩의 子)을 慕堂 孫處訥에게 보내 受學토록 하다.
19. 1607年 6月(宣祖 40年 丁未, 73歲) : 務功郞(정7품) 黃山道察訪 除授(현 경남 양산시 원동면 원

    리)同月 宣敎郞(종6품)으로 승진. 7月 承訓郞(정6품) 승진. 8月 承議郞(정6품) 승진. 얼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역이 난리에 없어진데다 또한 동남의 요충지에 있어 지탱할 수가 없었는데 선

    생께서 폐한 것을 일으키고 쇠잔한 것을 소생시켜 너그러운 정치로 어루만지시니 아전과 卒兵들이

    감복하고 돌아온 뒤에 송덕비를 세워 칭송함)
20. 1609年(光海 元年 己酉, 75歲) : 守藩의 次子 好禮를 長子 宜藩의 養子로 삼다. 가을 芝山

    曺好益 弔問하다.(輓詩가 있음)
21. 1612年 閏11月 3日(光海 4年 壬子, 78歲) : 正寢에서 別世.
    12月 9日 究理內 騎龍山 夏泉洞(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하천) 壬坐의 언덕에 葬事지내다.
22. 1614年 3月 21日(光海 6年 甲寅) : 旅軒 張顯光이 글을 지어 致奠을 올리다.
23. 1615年 1月 20日(光海 7年 乙卯) : 通政大夫 兵曹參議를 贈職. 6月 5日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

    旨 兼 經筵參贊官으로 追贈.
24. 1619年 6月 29日(光海 11年 己未) :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官 贈職.
25. 1705年(肅宗 31年 乙酉) : 鄕人이 先生과 전사한 諸賢들의 忠義와 功烈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紫陽縣 日見峰 아래 祠堂을 세웠으나 나라의 승낙이 없어 얼마 후 停廢하다.
26. 1732年 9月 19日(英祖 8年 壬子) : 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贈職.
    이때 長子 柏巖公(宜藩)에게도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겸 經筵參贊官으로 贈職.
27. 1760年 6月(英祖 36年 庚辰) : 墓門에 神道碑를 세우다.
    (領議政 趙顯命이 비문을 撰함)
28. 1777年(正祖 元年 丁酉) : 후손 一鑽의 주선으로 環丘世德祠 創建.
29. 1778年 3月(正祖 2年 戊戌) : 자손들이 環丘世德祠에 位牌를 奉安하다. 奉安文은 參議 大山

     李象靖이 撰함. 柏巖公을 配享하다.
30. 1782年(正祖 6年 壬寅) : 湖叟先生 實紀를 刊行하다.
31. 1788年 6月(正祖 12年 戊申) : 剛義公이라는 諡號가 내리다.
    致果殺賊曰剛이요, 즉 과단성을 이루어서 적을 죽인 것을 剛이라 하고 先君後己曰義라, 人君 즉

    나라를 먼저 하고 자기를 뒤에 하는 것을 義라 한다. 判書 洪良浩가 敎旨를 쓰고 吏曹佐郞 韓用龜

    가 가지고 오다.
32. 1790年 初(正祖 14年 庚戌) : 紫湖精舍를 옛 자리에 重建하다.
33. 1793年 5月(正祖 17年 癸丑) : 諡號 내린 事蹟을 神道碑에 追刻하다.
34. 1868年(高宗 5年 戊辰) : 院‧祠 毁撤令에 의거 環丘世德祠 廟宇, 講堂, 東西齋 철거(忠孝閣, 追

     遠堂, 直舍만 남음)
35. 1874年 11月(高宗 11年 甲戌) : 湖叟先生 實紀를 重刊하다.
36. 1977年 3月(양력) : 江湖亭을 紫陽面 龍山洞 仁邱 마당지에서 永川댐 水沒로 인하여 聖谷洞

     夏節 西麓으로 移建(경상북도 지방무형문화재 71호)
37. 1990年 8月 7日 : 環丘世德祠가 경상북도 民俗資料 제87호로 지정됨.
38. 1998年 4月 21日 : 壬亂護國 嶺南忠義壇에 長子 宜藩, 第三子 安藩, 第四子 守藩과 함께 位牌가

    奉安되다.(대구광역시 동구 효목1동 망우공원 내)
39. 2005年 7月 11日 : 1868年에 毁撤된 環丘世德祠의 復元 工事를 시작하여 2016年 10月 30日

     에 竣工
40. 2016年 11月 18日 : 環丘書院陞院奉安告由 및 竣工式



                                              2. 柏巖 鄭宜藩公
  字는 衛甫, 號는 柏巖이며 湖叟先生의 長子이다.
  1560年(明宗 15) 紫陽 魯巷의 宅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재주가 뛰어나서 보통 아이와

  다르더니 점점 자람에 讀書를 좋아하여 혼자서 작은 방에 거처하면서 날이 밝도록 글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집안에서 그 얼굴을 보는 이가 드물 정도였다.
  아버지의 命으로 科擧공부에 힘써서 鄕試에서 壯元으로 뽑혔고 1585年(宣祖 18) 成均生員에 入格

  하였다.
  柏巖의 水石이 좋음을 사랑해서 노래하면서 거닐고 항상 中庸과 大學을 끼고서 가만히 思索에 잠겨서

   자못 體得하는 바가 있었다.
  1592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버지 湖叟先生을 모시고 義兵모집에 적극 참여하였다. 鄕人들이 湖叟

   先生을 盟主로 삼으니 더욱 힘을 다해 計劃하고 군사에 도구와 군량을 차례대로 經營하지 않음이

   없었다.
  父公과 함께 永川城을 복성하고 慶州城 전투에서 賊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

   하여 血戰을 벌이다가 아버지는 구출하고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끝내 屈伏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

   전투 중 한때 包圍된 상태에서 宜藩이 父公을 구하고자 敵陣에 들어갈 때 그의 종 億壽에게 “軍士가

   패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전사한 줄 알았음) 내 장차 盜賊들의 손에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너는

   가거라”하였다. 이에 億壽가 울면서 말하기를 “主人과 종의 구분이 君臣과 父子와도 같은데 종이

   主人을 놓고서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 敵軍과 싸우다가 주인과 더불어 戰死하였으니 忠僕이었다.
  右巡使 鶴峰 金誠一의 장계로 戶曹正郞에 추증되고 1732年(英祖 8) 左承旨로 加贈되었다. 1784年

   (正祖 8) 旌閭가 내려졌으며 環丘世德祠에서 祭享타가 2016년 環丘書院으로 陞院되어 配享되다.


                                                      年 譜
1. 1560年(明宗15年 庚申) : 永川郡 紫陽面 魯巷村(영천시 자양면 노항동)에서 湖叟先生의 長子로

   出生.
2. 1585年(선조18年 乙酉 26세) : 가을 司馬試에 入格.
3. 1592年 4月13日(선조25年 壬辰) : 壬辰倭亂이 일어남. 湖叟先生 58세, 柏巖公 32세
   ․5月初 아버지따라 永川에서 제일먼저 倡義.
   ․7 27日 永川城 復城戰에 참전.
   ․8 19日 慶州城 回復戰에 先鋒長이신 父公을 따라 進軍.
   ․821日 慶州城 復城戰에서 賊에게 포위된 父公을 구출하고 殉節.
   ․11月 21日 戶曹正郞 贈職
4. 1593年 1月(宣祖26年 癸巳) : 招魂葬한 詩塚에 焚黃祭.
5. 1609年(光海元年 己酉) : 아우 守藩의 次子 好禮를 後嗣로 삼다.
6. 1705年(肅宗31年 乙酉) : 鄕人들이 紫陽縣 日見峰 아래 忠賢祠를 세웠으나 얼마 후 중지함.
7. 1732年 9月 19日(英祖8年 壬子) :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으로 증직
8. 1755年 2月(英宗31年 乙亥) : 詩塚에 碑를 세움. (弘文館 提學 吳光運 撰)
9. 1778年 3月(正祖2年 戊戌) : 環丘世德祠에 湖叟先生과 함께 位牌를 奉安함. 奉安文은 參議 大山

    李象靖이 撰함.
10. 1784年 2月(正祖8年 甲辰) :『忠臣孝子贈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筵 參贊官 成均生員 鄭宜

     藩之門』이라 忠孝旌閭가 내림. 忠孝閣記는 完山 李獻慶과 樊巖 蔡濟恭이 撰함.
   ․9월 6일 世德祠 옆에 忠孝閣을 세우고 揭楔함.
11. 1870年 閏10月(高宗7年 庚午) : 嘉善大夫 吏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總管으로

     증직됨.
12. 1874年 10月22日(高宗11年 甲戌) : 詩塚에 焚黃祭. 900餘 名 參祀.
13. 1990年 8月7日(庚午) : 環丘世德祠가 慶尙北道 文化財 民俗資料 제87호로 지정됨.
14. 1998年 4月21日(陽曆) : 壬亂護國 嶺南 忠義壇(대구시 동구 효목1동 망우공원 내)에 父公과

     아우 安藩, 守藩과 함께 位牌가 奉安됨.
15. 1999年 10月(己卯) : 公과 嗣子 樂山公의 兩世 寓慕之所인 忠怡堂 창건.
16. 2016年 11月 18日 : 環丘書院에 배향.


                                      Ⅲ. 常享祝文

∘湖叟先生位
學紹家傳 義著邦難 澤厚流光 永世不誼
학문은 先代로부터 전해옴을 이으셨고
義理는 國難을 당함에 들어났도다
恩澤은 厚德했고 끼치신 恩寵 빛나니
그 業績 永世토록 잊혀 지지 않으리라


∘柏巖公位
志慕曾樂 行成卞孝 風烈凜然 百載餘敎
뜻은 曾子의 孝道를 追慕하셨고
行實은 卞壺의 강직함을 이루었습니다.
威風과 功烈이 늠름하시니
영원한 敎訓으로 삼으리이다

參議 李象靖 製



                                        Ⅳ. 奉安告由文

湖叟鄭先生復享奉安告由文
恭惟先生 山河鍾氣 烏川世閥 文忠傍裔 端重謹嚴 惇行孝悌 餘力學文 俯讀仰思 掛名司馬 講究義理

島夷之變 何忍言哉 列城瓦解 八路崩潰 主上蒙塵 慷慨投袂 推爲義將 鄕兵召募 永慶要衝 賊路咽喉

倭寇留屯 剽掠永州 乘風飛塵 踰城縱火 城中大亂 燒殺無算 軍聲大振 進攻月城 永慶復城 超卓功績

大駕還都 歸隱紫園 淡然自守 若將終老 梧里相臣 薦爲驛丞 吏卒追思 立碑頌德 環丘之上 營立書齋

繁多後孫 講討肄業 健陵丁酉 齋後建廟 湖叟柏巖 兩世奉安 俎豆不撤 百有餘禩 運値陽九 邦有禁令

天運循環 無往不復 政廳軫念 士論峻發 建祠陞院 斯文慶幸 爰奉位牌 精靈如在 敬薦泂酌 永世無替
                                                壬辰小歲上浣
                                             安東 金昌會 謹撰


                                          호수정선생 복향봉안 고유문
공손히 생각건대 先生이시여, 山河의 精氣 받고 태어나셨네.
烏川鄭氏의 훌륭한 門閥이요, 圃隱先生의 傍孫이라오.
端整하고 愼重하며 謹嚴하시고, 孝道와 恭敬으로 행실은 돈독했네.
남은 시간에 공부하시며, 구부려 글 읽고 우러러 생각했도다.
進士試에 이름이 걸렸으며, 義理를 익히고 공부하였네.
섬나라 오랑캐가 일으킨 變故, 어찌 차마 말로 다 하겠는가.
沿道의 고을은 와해되고, 八道의 지역이 무너졌다네.
임금님께서는 피난길에 오르시니, 慷慨한 심정으로 소매를 걷었지.
義兵의 大將으로 추대를 받고, 고을 안의 병사를 불러서 모았다네.
永川과 慶州의 요충지역은, 賊들의 진로에 要塞地라오.
倭寇들은 여기에 陣을 머물러, 영천고을을 위협하였네.
바람타고 날리는 먼지를 이용하고, 城을 넘어서 불을 놓았지.
城中은 크게 혼란하여, 불타서 죽은 이가 헤아릴 수 없었다오.
군사의 名聲은 크게 떨쳐서, 慶州城으로 진격하였다네.
永川 慶州의 城을 되찾으니, 功績이 뛰어나고 우뚝하였지.
임금님께서는 還都하였으며, 先生은 紫陽의 동산에 은거하였다오.
淡然하게도 자신을 지키며, 장차 老境을 마치려 했는데
梧里 李元益 정승께서는, 황산도 찰방에 천거하였지요.
아전과 역졸들이 思慕하는 마음으로, 碑를 세워 德을 칭송하였네.
고향땅 環丘언덕 위에, 경영해서 書齋를 세웠다오.
번다한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글을 익히고 心身을 講磨하였네.
正祖大王 丁酉年(1777년)에, 서재의 뒤에 祠堂을 세웠으며
湖叟先生과 柏巖公, 兩代분 함께 평안히 모셨다네.
해마다 享祀를 거두지 않고, 백여년 세월이 지났도다.
시대의 運數 厄運을 만나, 나라에서 훼철의 命이 내렸네.
하늘의 운수 돌아옴이 있어, 지난 일들 회복되지 않음이 없었지.
政府와 官廳이 은혜를 내리고, 士林의 公論이 크게 일어났다네.
祠堂을 세워 書院으로 격상하니, 우리 儒林의 큰 경사로다.
이에 위패를 봉안하오니, 존령께서 여기에 계신 듯 하오이다.
공경스럽게도 맑은 술 올리오니, 세상이 영원토록 衰退하지 말지어다.


                                              임진년 섣달 초열흘
                                             안동 김창희 삼가 짓다



柏巖鄭公復享奉安告由文
 猗歟惟公 湖翁賢胤 容姿俊偉 仁孝正端 詩禮自持 早承庭訓 文詞大進 入榜生員 自有古範 人皆重之

 明哲處事 聲望鄕里 日誦庸學 襟懷飄灑 沉潛反覆 雅志超世 柏巖泉石 以爲考槃 海寇突發 列邑混亂

 將吏竄逃 無一交戰 賊兵長驅 廟社播遷 爲臣子者 豈敢坐視 召募義兵 擊鼓士氣 嚴君爲將 竭力贊籌

 永之火攻 計策圖謀 移討月城 挺身先鋒 賊陣三突 救圍嚴公 矢盡弓折 奮罵不屈 以殉忠孝 一門雙節

 捨生取義 嘖嘖嘆驚 遺物衣巾 招魂詩塚 加贈崇秩 樹以綽楔 尸祝議定 千古義烈 玆涓吉辰 同堂餟享

 洋洋陟降 庶幾歆饗

                                                  壬辰小歲上浣
                                                安東 金昌會 謹撰


                                           백암정공 복향 봉안고유문
아름답도다 柏巖公이시여, 湖叟先生의 훌륭한 아드님이라.
容貌와 姿態는 俊傑차고, 仁孝하고 바르고 단아하였네.
詩와 禮로써 자신을 지키고, 일찍이 가정의 訓戒를 받았지.
文章은 크게 나아가, 生員에 入榜하였네.
스스로 옛날의 規範을 지킴이 있어, 남들이 모두 소중히 여겼다네.
밝고도 착하게 일을 처리하여, 鄕里에 聲望이 높았지요.
날마다 中庸과 大學을 외우며, 품은 情懷 씻은 듯 깨끗하였네.
깊이 잠기고 반복해 읽으며, 아담한 뜻은 세상사에 超然하였고
柏巖의 아름다운 산수를, 은둔의 자리로 삼았다네.
바다의 도적떼들 갑자기 발동하여, 沿道의 고을이 혼란하였으며
守令과 衙前들은 도망하여 숨고, 한 번의 싸움조차 없었다오.
賊의 무리는 여세를 몰아, 宗廟와 社稷이 피란길에 올랐음이라.
임금님의 臣下된 者 道理로서, 어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손가.
義兵을 불러 모으고, 북을 울려 士氣를 돋우셨네.
아버님께서 大將에 推戴되니, 힘을 다해 計策을 도왔도다.
永川城을 불로써 공격할 때, 計略을 圖謀한 바 있었지요.
陣을 옮겨서 慶州城을 칠 때는, 몸을 날려 先鋒에 나섰다네.
적의 陣中에 세 번이나 뛰어들어, 포위된 아버님을 구출했다오.
화살은 다하고 활은 꺾어졌으나, 분기로 꾸짖고 굽히지 않았으며
忠과 孝로서 몸을 마치니, 한 가문에 충효의 雙絶이로다.
삶을 버리고 義理를 취하니, 사람들은 嘖嘖하며 驚歎하였네.
옷과 두건 遺物을 모아, 혼을 불러 詩塚을 모셨으며
높은 벼슬 증직을 내리시고, 表彰의 旌閭를 세웠다네.
書院에 모시도록 議論을 정하니, 千古의 義烈이 빛이 나도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서, 한 祠堂에 享祀를 드리오니
尊靈이여 너울너울 내리시어, 歆饗하시기 바라나이다.


                                               임진년 섣달 초 열흘
                                              안동 김창회 삼가 짓다



                                          Ⅴ. 上樑文

先祖遺偉德昭載竹帛而長傳 後孫有仁明復望廟宇之重建 豈但地靈之攸佑 盖是天功之有時 恭惟剛義公鄭先生 學紹家傳 義著邦難 天資穎悟耽讀經典而潛心達通 島倭跳梁先導義旅而盡力防禦 率鄕民編隊伍推爲義兵將而奪還永城 開米廪用軍糧引率諸軍士而進擊羅伐 朝家行賞讓功而退居益陽州 梧老聞風薦逸而始除黃山道 仁者必壽享八旬岡陵 德人有昌贈二品爵謚 恭惟栢巖鄭公 高麗知奏事滎陽公爲鼻祖 龍乱大功臣湖叟公是賢爺 詩禮傳家 簪纓繼世 修文擧業而國監登榜 遯跡晦名而詩朋交遊 遭倭乱隨父復城有功 赴敵陣救親殉身盡節 未遑歛葬以挽詩塚藏 累贈加官命閭㫌忠孝 偉哉 父忠子孝 立紀扶綱 先賢建祠奉安因邦令毀撤 後學述事陞院以公帑施工 世德舊墟回想揖讓之敬虔 環丘新宇更感俎豆之精禋 多士濟濟共慕淸芬 諸孫詵詵克追先德 香火繼舊制而不替 忠孝期後日而益揚 乃奐乃輪祠宇莊嚴而一鄕咸頌 苟完苟美神座妥安而百世久傳 玆綴六偉之詞 庸助脩梁之擧 兒郞偉抛梁東 雲住山峯曙日紅 誰識討倭功跡大 丹心憂國萬民崇 抛梁西 臨院名高路不迷 萬古忠臣靑史耀 人人崇慕共相携 抛梁南 紫湖水色碧於藍 奔流百里環丘處 後裔繁衍世世覃 抛梁北 騎龍崇岳撑天極 先塋靈域掃瞻望 追慕雲仍誠益篤 抛梁上 雨晴雲散日星朗 靈魂陟降在斯間 忠孝之家餘蔭漲 抛梁下 環山繞水中間野 春耕秋穡歲功多 崇祖敦宗皆賴此 伏願上梁之後 棟宇鞏固 俎豆永全 忠孝家聲承父承祖而不墜 詩禮世業傳子傳孫而無窮 庶幾念德而勉修哉 誰不聞風而興起也
                                        檀紀四三四一年 戊子 六月 下浣

                                                星山 李震基 謹撰


                                                    상 량 문

先祖가 위대한 德을 끼쳤음에 竹帛에 밝게 실려 길이 전하고, 후손이 어질고 밝음이 있어 다시 廟宇의

중건을 보겠네! 어찌 다만 地靈의 도운 바 뿐이겠는가? 대개 이 天功의 때가 있음이네.
恭順히 생각하니 剛義公 鄭先生은 학문은 집에 전한 것을 이었고, 義理는 나라의 난리에 드러났네.
 타고난 자질이 穎悟하여 經典을 탐독하고 潛心하여 달통하였고, 島倭가 跳梁함에  義旅를 선도하여

 힘을 다해서 방어하였네.
鄕民을 거느리고 隊伍를 편성하니 義兵將으로 추대되어 永川城을탈환하였고, 穀倉을 열어 軍糧으로

사용하고, 모든 군사를 인솔하여 서라벌(경주)로 진격하였네.
朝家에서 行賞함에 功을 양보하고 물러나 益陽州(익양주:영천)에 살았고, 梧里大監이 소문을 듣고 遺逸로 추천하여 비로소 黃山道察訪에 제수되었네.
仁者는 반드시 壽하니 팔순을 享壽하여 岡陵하였고, 德人은 번창함이 있으니 二品의 관작과 시호가

증직되었네.
공순히 생각하니 柏巖鄭公은 고려 知奏事 滎陽公이 鼻祖가 되고 壬亂의 대공신 湖叟公이 이 어진

아버지가 되네.
詩禮는 집집에 전하고 簪纓은 世世로 이어졌네.
글을 닦아 과거에 응하여 國監에 登榜하였고, 자취를 숨기고 이름을 감추어 詩朋과 交遊하였네.
왜란을 만나 아버지를 따라 復城의 功이 있었고, 적진에 나아가 어버이를 구하고 몸을 바쳐 忠節을

다하였네.
歛葬할 겨를이 없어 挽詩를 모아 무덤을 만들었고, 여러 번 벼슬이 증직되고 충효로 閭旌하였네.
위대하도다. 아버지는 忠誠하고, 아들은 孝道하니 紀綱을 세워 붙들었네.
先賢이 사당을 세워 奉安하였더니 邦令으로 毁撤되고, 後學이 사업을 이어 陞院하니 公帑으로 施工

하였네.
世德의 옛터에 揖讓의 敬虔함을 회상하고 環丘書院의 새 집에 다시 俎豆의 精潔함을 느끼네.
많은 선비 성하게 모여 함께 맑은 향기를 생각하고, 모든 자손 많이 모여 능히 先代의 덕을 추모하네.
香火는 옛 제도를 계승하여 바꾸어지지 아니하고 충효는 후일을 기약하여 더욱 선양하네.
이에 빛나고 크니 祠宇는 장엄하여 一鄕이 칭송하고, 진실로 완전하고 아름다우니 神座는 편안하여

百世로 오래 전하리.
이에 六偉의 말을 엮어서 긴 들보를 드는데 도움을 주리라.
어영차 들보를 東으로 미니 雲住山봉오리에 새벽해가 밝구나.
그 누가 왜국을 토벌한 공적이 큰 것을 알겠는가? 붉은 마음 나라 근심 萬民이 높이네.
들보를 西로 미니 臨皐書院 이름 높아 가는 길이 迷惑하지 않네.
만고 충신이 靑史에 빛나니 사람마다 숭모하여 함께 서로 이끄네.
들보를 南으로 미니 紫湖川 물빛이 남색보다 푸르구나.
백리를 달려 흘러와 언덕을 도는 곳에 後裔들 繁衍하여 세세로 뻗어가네.
들보를 北으로 미니 騎龍山높은 뫼가 하늘 끝을 받쳤네.
先塋의 靈域을 瞻掃하고 바라보니 추모하는 雲仍의 정성이 더욱 돈독하구나.
들보를 위로 올리니 비는 개이고 구름은 흩어져 해와 별이 밝구나.
영혼의 오르내림이 이 사이에 있으니, 충효의 집에 남은 蔭德이 넘치리.
들보를 아래로 미니 산이 둘렀고, 물이 돌린 중간에 들이 있는데 봄에 갈고 가을에 거두어 한 해의

功이 많으니, 祖先을 숭모하고 宗族간에 돈목함을 다 여기에 의뢰하네.
엎드려 원하건대 上梁한 뒤에, 棟宇는 鞏固하고 俎豆는 길이 온전 하소서.
충효의 家聲은 아버지를 잇고, 할아버지를 이어 떨어뜨림이 없고, 詩禮의 世業은 아들에 傳하고

손자에 전하여 다함이 없게 하소서.
아마도 선대의 덕을 생각하여 힘써 닦을 것이다. 누가 소문을 듣고 일어나지 않겠는가?


                                        단기 4341년 무자 6월 하순(음력)

                                                성산  이진기  근찬



                                         Ⅵ. 環丘書院記

永川在吾嶺之左 山川秀麗 郊原膴膴 羅麗以降 人材文物 斐然以彰大 有東魯君子之遺風 蓋自圃隱鄭先生其來遠矣 至朝鮮中葉 鄭氏又有名賢哲士 曰湖叟先生及其長子柏巖公 父子兩代 文雅風儀 隱耀州縣 及壬辰倭賊之大擧入寇 列郡崩壞 八路震蕩 遂致大駕西狩 平日食祿守土之臣 兎走鼠竄 或擁兵自衛觀勢以躊躇者有之 乃身居草野讀書講學之士 忠誠奮發 忘軀命以捍邦亂者不少其人 永川在嶺左處要衝 而作先矛 而先生父子實爲其首倡 蓋亂初先生暫避于山中 不日號召鄕勇 編成部隊 被推爲義兵將 一面使人晝伏宵行 通告于招諭營 一面前赴賊陣剿殺醜類 快復城也 永川之捷 聳動全國 又與官兵及鄰邑義兵進攻慶州賊 賊不能支 一夜遁走慶州亦平 但作戰之末 爲賊奇兵所掩襲 柏巖公救出父公而身竟死於干戈之下 嘻其慘矣 然在公爲忠孝兩全 不愧爲是父之子也 永川慶州之復 實由於先生首事之功而先生不以功自居 悉推與諸將 亂稍間 以所領兵 付之他人 翛然歸紫陽舊隱 親經籍而寫情性 還處士本色 體察使梧里李公 來訪致敬 薦于朝 除黃山道察訪 先生一出以奉君命而旋卽棄官歸 杜門不復出 一時師友 如曺芝山 張旅軒 李蒼石諸先生 與之往來 交好以天年終 物論有在 朝廷累加褒贈 肅廟贈叅判 英廟贈判書 宣諡剛義 柏巖公又㫌忠孝 贈叅判 子孫奉安先生位牌于環丘世德祠 以柏巖公配享焉 鄕人士欲建書院以尊奉先生而久未之遂 王朝末並與世德祠而毁撤焉 輿情鬱而莫伸者累百年矣 今王朝社屋山河變易 西潮汎濫而天衷未泯 尊賢慕德之心 未甞廢弛 歲辛卯十月永川儒紳大會于臨皐書院 以建院事倡議 發文通于全省 若玄風之道東 慶州之玉山 安東之陶山 屛山 暨臨川 星州之檜淵 仁同之東洛 諸院莫不同聲相應以協贊焉 翌年春乃就環丘故址 大張設施 不終年而役垂訖焉 祠曰忠孝 內三門曰守綱 講堂曰興仁堂有兩夾室 東克復而西敬恕也 東齋曰思賢 西齋曰日新 外三門曰道立 因大揭環丘書院之扁額宿願成矣 能事畢矣 鄭氏淵通以推進委員長同鄭泰龍鄭東允諸氏 再訪佑成于京師 要佑成記其事 佑成自顧老衰不堪爲筆硯之役而一段秉彜 亦知慕先賢有不敢固辭 其請者 玆從先生實紀略述梗槩 又以建院始末附書于下端謹爲之記以還之云
                                       歲在壬辰 西紀 二千十二年  月

                               大韓民國學術院會員成均館大學校名譽敎授
                               退溪學硏究院長 文學博士 驪州後人 李佑成 謹記


                                        환 구 서 원 기
永川은 우리 嶺南의 왼편에 위치하여 있는데 山川이 秀麗하고 들이 기름지다.
新羅와 高麗를 거쳐 내려오면서 人才와 文物이 풍부하여 魯나라의 遺風을 가장 많이 소유하였으니 대

개 圃隱 鄭先生으로부터 멀리 전래해 온 것이다.
朝鮮 중엽에 이르러 鄭씨에 이름난 賢人과 어진 선비가 있었으니 湖叟先生과 그의 장자 柏巖公을 이르

는 말이다.
父子 양대의 아름다운 文章과 훌륭한 儀容이 은연히 고을에 빛났다.
壬辰에 倭敵이 대거 쳐들어옴에 여러 고을이 차례로 붕괴되고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드디어 임금이 서쪽으로 옮겨가게 되고 평일에 國祿을 먹고 疆土를 守護하던 臣下들이 토끼처럼 도망

가고 쥐처럼 숨어들었으며 혹은 군사를 옹위하고 스스로를 지키며 大勢를 관망하고 주저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에 草野에 묻혀 讀書하며 講學하던 선비의 몸으로서 忠誠心이 분발하여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아니

하고 나라의 난리를 막으려는 자 적지 않았는데 永川은 嶺南 왼쪽 要衝地로 앞장서 對應하니 先生

父子께서 실상 가장 먼저 倡義한 것이다.
대개 난리 초에 先生이 잠시 山中에 피신했다가 며칠 되지 않아 鄕兵을 불러 모아 부대를 편성하니

義兵將으로 추대되었다.
일면은 사람을 시켜 낮에는 숨고 밤으로는 가서 招諭使 진영에 보고하도록 하고 일면으로는 앞장서

敵陣에 나아가 惡의 무리를 섬멸하여 빼앗겼던 永川城을 회복하니 永川의 大捷이 全國을 감동시켰다.
또한, 官兵과 이웃 고을 義兵들과 더불어 慶州 敵陣을 공격하니 적들이 능히 지탱치 못하고 하룻밤

사이에 도망해 달아나니 慶州 역시 평온해졌다.
다만 作戰을 마칠 즈음 賊의 기습을 당함에 柏巖公이 父公을 구출하시고 自身은 마침내 창칼 아래

죽으니 그 참혹함이 슬프도다.
그러나 公은 忠과 孝 두 가지를 온전히 하였으니 훌륭한 아버지의 자식 됨이 부끄러움이 없도다.
永川 慶州의 戰功은 실로 先生께서 먼저 倡義한 功勞이나 先生은 그 공로를 사양하고 모든 장수들

에게 미루어 주었다.
난리가 조금 소강상태에 들자 거느리던 의병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아무런 미련없이 紫陽 옛

은둔하던 곳으로 돌아와 經書와 친구하며 감정을 詩로 읊으니 隱士의 본색 그대로다.
體察使 梧里 李公이 찾아와 공경을 표시하고 朝廷에 천거하니 黃山道 察訪에 제수되었다.
일단 어명을 받들어 나아갔으나 바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문을 걸고 다시는 나아가지 않았다.
당대의 師友인 曺芝山, 張旅軒, 李蒼石 같은 先生들과 더불어 交遊하면서 天壽를 다함에 功勳이 내려

져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조정에서 여러 번 褒贈을 하였다.
肅宗때는 叅判에 증직되고 英祖때는 다시 判書에 증직이 되었으며 剛義公이란 諡號가 내려졌다.
柏巖公 또한 忠孝로 旌閭되고 參判으로 증직되었다.
자손들이 環丘世德祠에 先生의 位牌를 奉安하고 柏巖公을 配享하였더니 고을의 선비들이 書院을 세워

 先生을 높이 받들고자 하였으나 오래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朝鮮 말엽에 다른 書院과 더불어 世德祠 또한 훼철되니 답답하고 억울함을 펴지 못한지 數百年이 지나고 이제 王朝는 社屋만 남았고

山河는 變易하여 西歐 風潮가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 뜻은 泯滅하지 않아 어진 이를 존중하고 恩德을 사모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 辛卯(2011)

年 十月에 永川의 선비들이 臨皐書院에 모여 環丘書院 重建을 合議하고 그 사실을 도내 현풍의 道東書院, 경주의 玉山書院, 안동의 陶山·屛山·臨川書院, 성주의 檜淵書院, 仁同의 東洛書院 등에 통보하였던

바 모두가 한 목소리로 호응하고 협찬하였다.
그 다음해 봄에 環丘 옛터에 건축 사업을 크게 시작하여 연내에 그 일을 끝마쳤다.
사당은 忠孝祠라 하고, 내삼문은 守綱門, 강당은 興仁堂이며 양 협실이 있으니 동쪽은 克復室이며,

서쪽은 敬恕室이다.
동재는 思賢, 서재는 日新이며, 외삼문은 道立문이다.
이에 環丘書院이란 院號를 높이 다니 宿願을 이루었도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도다.
鄭淵通씨가 추진위원장으로서 鄭泰龍, 鄭東允과 같이 서울 佑成에게 두 번이나 찾아와 그 사실을 기록

해 줄 것을 요구하거늘 佑成 스스로 돌아봄에 늙고 쇠한지라 글 쓰는 일을 감당하기 어려우나 한층 더

常道를 지키고 또한 先賢을 追慕하고자 함을 알고 감히 끝까지 사양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先生의 實紀에 따라 간략히 대강 기술하고 또 書院을 세우는 일의 전말을 하단에 부쳐 기록하여

돌려보내노라.

                                        세재 임진 서기 二Ο一二년    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퇴계학연구원장 문학박사 여주후인 이우성 근


                                     Ⅶ. 環丘世德祠 奉安祭文

山川間氣 圭璋令質 風儀峻整 器宇軒豁 世傳忠義 庭聞詩禮 厲志問學 寢食殆廢 絶意進取 樂在簡編

島夷稱亂 廟社西遷 永受其衝 首被盤結 灑涕投袂 義旅雲合 設奇鏖戰 蕩覆巢窟 義旗東指 醜類宵遁

蔽遮東南 助成基本 功高不有 歸卧田畒 白鷗淸流 徜徉吟嘯 孤忠遠識 懦立薄敦 崇德報功 禮合蘋蘩
公議愈欝 奈拘邦制 惟陳徐氏 故事有例 雲仍聚議 營始別廟
有子承宣 蚤被庭敎 東都之難 以身殉孝

一門雙節 並徽齊媺 剋日虔誠 爰奉牌子 精爽不昧 陟降如在 於千萬禩 報祀毋怠


                                                   上告 湖叟先生                  
                                                  叅議 李象靖 製


                                    환구세덕사 봉안제문
山川의 氣運이요, 구슬 같은 資質이라, 풍채 높고 단정하며, 역량은 헌칠하고 쾌활하다. 대대로 忠과 義를 전해 오고 뜰 앞에서 詩와 禮를 들어 왔다. 뜻을 가다듬어 학문을 공부하니 잠자고 먹는 것을 거의 폐하도다. 進就에는 뜻이 없고 즐거움이 書冊에만 있으시다. 섬 오랑캐가 亂을 일으키니 宗廟와 社稷은 서쪽으로 파천하고, 永川이 그 충격을 받아 가장 먼저 賊이 집단으로 모여 들자,눈물을 뿌리고 소매를 걷으니 義兵이 구름 같이 모여든다. 奇妙한 계책을 베풀어 싸워서 적의 소굴 소탕한다. 義兵의 깃발이 동으로 향하니 오랑캐의 무리들은 밤을 타서 도망친다. 동남방을 차단하니 나라 터전 조성됐다. 功은 높으시되 스스로 차지하지 않으시고, 돌아와 田園에서 누우신다. 白鷗와 淸流에서 산책하고 읊조린다. 외로운 충성심을 먼 뒷날 알게 되면 나약한 자 일어서고 경박한 자 돈독한다. 높으신 덕으로 공덕을 갚자 하니 예절이 享祀物에 맞았도다. 公議 더욱 울분한데 어찌하여 나라 제도 구애되랴? 오직 宋나라 陳氏 徐氏 집의 故事를 예로 삼아 자손들이 의논을 모아 別廟를 경영한다. 그의 아들 承宣公도 일찍이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잡다가 東都(경주)의 난리에 몸을 바쳐 忠孝에 순절하여 한 집에 두 忠節이 아울러 아름답다. 날을 받아 정성들여 位牌를 모시오니 神靈은 어둡잖아 계시는 듯 강림한다. 천만년 뒤까지도 祭祀 모시기를 게을리 말지어다.
  위는 호수선생에 고함                  
                                               참의 이상정 지음

資挺頴秀 學傳詩禮 工存玩索 志專思銳 酷愛泉石 風詠自適 袖中何有 一部庸學 外慕不嬰 中有自得

先公倡義 臨難敵愾 居中贊畫 殪彼蠻醜 東都月暈 義徒馳赴 腹背橫分 砲矢如雨 殺氣澒洞 父子相失

揮戈賈勇 突圍三入 賊首應弦 我馬旋蹶 卞氏殉孝 顔卿奮罵 四尺詩塚 千古義烈 好德攸同 久議尸祝
邦制難越 私享有例 玆涓吉辰 潔誠妥揭 同堂合食 理一幽明 牲醴香潔 綏我思成  

 
                                              上告 柏巖先生

資品이 뛰어나서 영리하고 빼어나며 학문은 詩와 禮를 전하도다. 공부는 玩索에 두고 뜻은 사색을 오로지한다. 泉石을 매우 사랑하니 시가를 읊조림이 自適하다. 손에 든 것은 무엇이냐 한 권의 庸學이라. 外慕를 저버리니 안에는 마음 속 自得한다. 아버님이 倡義하자 난리에 임하여 적개심이 일어난다. 軍幕에서 贊畫하고 나가서는 적도들을 무찌른다. 東都의 달밤에 義兵들이 운집한데 배후와 복부에 기습을 받으면서 대포와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殺氣가 충천함에 父子가 相失한다. 창을 휘두르고 용맹을 복돋아서 포위에 돌진하길 세 번이나 하였구나. 적장에게 활 쏘고 내 말도 엎어졌다. 옛적에 卞氏는 孝를 위해 죽어가고 안경(顔卿:顔眞卿)은 분격해서 힐난했다. 四척의 詩塚이여 千古의 義烈이라. 君子들이 같이 모아 시축(尸祝:신주와 제문)함을 의논하나 나라 규제에 넘기 어려워 私享하는 예를 따라 이에 吉日을 택하여 정성 모아 높인다. 같은 집에 같이 모시니 理致는 일반이라 幽明이라 다르리까. 祭羞는 향기롭고 깨끗하니 우리의 생각을 이루는데 넉넉하도다.
   위는 백암선생께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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