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덕랑(通德郞) 휘 정석승(鄭碩升) 유사(遺事)
통덕랑 휘 석승(碩升 20世)께서는 삼휴공의 손자이시며 사과공의 넷째 아드님으로
태어나 오형제가 당대의 선비로서 명성이 자자하셨다.
오형재분의 우애가 남다르셨고, 오회당 까지 지어 5형제의 정의를 더욱 돈독히 하셨다.
통덕랑공께서는 풍체(風采)와 거동(擧動)이 맑고 깨끗하며 품위(品位)가 고상(高尙)하며
담론(談論)이 활달(豁達)하셨다고 한다.
묘갈명(墓碣銘)을 중심으로 하신 일을 적어본다.
저 멀리 산 아래에 수몰 전의 귀미마을이 보인다. 이곳이 삼휴공께서 영천의 명산(석동)
에서 태어나 조부이신 호수공께서 강학하시던 강호정이 건너다보이는 귀미마을에 살림
나시어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수백 년간 살았던 마을이다. 통덕랑공께서는 이 마을의 삼휴고택에서 태어나
살림 또한 그 마을에 나시었다.
1970년대에 댐건설로 삼휴공 후손들은 산지사방으로 이주하고 난 자리가 물이 줄어
귀미마을의 옛터전이 들어나 보인다.
1620년에 귀미마을에 삼휴공께서 살림나시어 주택을 지어 대를 이어 후손들이
살았던 삼휴고택이다. 통덕랑공께서는
1665年 3月 9日 귀미리 삼휴고택에서 태어나셨다.
지금은 하천에 이건 되어 유형문화재 72호로 보전되고 있다.
조부이신 삼휴공의 학문연구와 당대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635년에 삼휴
고택 이웃에 건립되었는데 통덕랑도 어릴 때 이곳에서 공부하셨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1970년대에 유형문화재 75호로 지정되어 하천으로 이건되었다.
하천묘역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으며 노촌공의 효행의덕으로
설학이 부공이신 선무랑공의 묘 터를 점지 하였고 그후
대를 이어 80여분의 묘소가 쓰여졌다.
통덕랑공의 묘소는 하천묘역의 서편의 큰 바위 위에 있다. 4월 셋째 일요일에 선무랑공의
묘소를 시작으로 묘사행사를 한다.
통덕랑의 묘사는 항렬이 낮아 끝 무렵이다.
통덕랑(通德郞 20世)공의 하신 일
통덕랑(通德郞) 정공(鄭公)의 휘는 석승(碩升)이요 자(字)는 여진(汝進)이시니,
사과공의 아들 5兄弟의 넷째 분이시다.
1.가계(家系) : 公은 迎日人으로 고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휘 습명(襲明)이며
비조(鼻祖)가 되시고, 판서(判書) 휘 인언(仁彦 8世)은 처음 永川에 사시고, 판서(判書) 휘
광후(光厚 9世)와 사성(司成) 휘 종소(從韶 12세), 노촌(魯村 15世) 휘 윤양(允良)은 모두
드러난 祖上이시다.
高祖父는 휘 세아(世雅 16世)요 호(號)는 호수(湖叟)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셨고, 강의공(剛義公) 시호(諡號)를 받으셨으며 증조부(曾祖父)는 휘가 수번(守藩 17世)
이며, 벼슬이 호군(護軍)이셨고, 조부(祖父)는 휘가 호신(好信 18世)으로 호(號)는 삼휴정(三
休亭)이시며, 학문(學文)과 행의(行義)로 드러나셨고, 부친(父親)은 휘가 시우(時羽 19世)이
며 벼슬은 병절교위부사과(秉節校尉副司果)이시다.
모친은 능주(陵州) 구씨(具氏) 인계(仁繼)의 따님이시다.
2.생몰(生沒) : 현종 을사(1665年) 3月 9日 귀미리(龜尾里) 본가에서 나셨고, 무오(1738
年) 7月20日 향년 74歲로 별세하셨으며, 夫人은 월성 최씨(崔氏) 현령(縣令) 국성(國成)
의 따님이시며, 동로(東老)의 손녀로 公과 더불어 同年生으로 公보다 二年 먼저 돌아가셨다.
3.천성(天性) : 타고남이 풍체(風采)와 거동(擧動)이 맑고 깨끗하며, 품위(品位) 가 고
상(高尙)하며 담론(談論)이 활달(豁達)하셨다.
4.교우(交友) : 公이 學文을 좋아하셔서 친구를 사귐에 道義를 위주로, 家門에 계실 때
는 재종형 함계공(涵溪公)과 횡계(橫溪)의 훈수(塤叟)․지수(篪叟)公 형제분이었으며, 鄕內와
道內에서는 병와 이형상(李衡祥)과 병애 조선장(曺善長)과 적암 김중태(金重台)와 해은 박
기봉(朴岐鳳)등 여러 분과 교분을 맺으셨다.
5.효성(孝誠)과 우애 : 어버이가 계심에 정성(精誠)을 다하시고, 상중(喪中)에 계실 때
는 禮節을 다 하시고, 行實을 살피심에 이륜(彛倫)에 돈독(敦篤)하셨다.
맏형을 父母와 같이 섬기시고, 兄弟간 밤낮으로 모여서 즐겁고 기뻐하여 友愛와 경순(
敬順)함이 마음 속으로부터 行動과 거지(擧止)에 익혀졌으니 東山에 달 오르고 새벽 닭
우는 것도 잊어 버렸다.
또 公은 일찍이 山水에 성벽(性癖)을 품어 詩를 잘 하셨고, 일찍이 秋 七月 기망(旣望
16日)에 아우와 함께 맏형과 仲兄과 叔兄을 모시고 병와(甁窩)(이형상)를 請하여 二水의
아래에서 배를 띄워 놀기도 하시고, 또 伯兄과 叔兄을 모시고 아우는 앞에서 이끌어 함께
운주산(雲住山)에 오르시니 참으로 장관(壯觀)이었다.
소문(所聞)에 의하면 오회당(五懷堂) 아래 관상수(觀賞樹)가 줄지어 서 있다가 통덕랑
(通德郞)이 작고 하자 시들었고, 생원공(生員公) 이 작고하자 모두 말라 죽었다고 한다.
6.면학(勉學) : 公이 季父에게 受業을 받으시고. 무재공(無齋公)의 특별한 근면(勸勉)
함을 힘입어 고을 선비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學問에 젖어들어 마침내 孝行과 友愛로 일
컬음을 받게 되었고, 또한 문사(文詞)로 드러나게 되었다.
7.자손(子孫) : 아들 다섯과 딸 네 분이시니 맏아들은 重周로 伯父에게 養子로 나가고
다음은 重泰요 重喬요 重岡이요 重呂이다. 사위는 朴泰厚요 孫孝舜이요 金慶錫이 요 權
萬銓이다.
o 重周는 양자가서 두 아들이 있으니 長男은 一鈺이요 다음은 一銓이며 生員이었고.
o 重泰의 長男은 一欽이요 次男 一錩과 三男 一鏆은 養子 나가고,
o 重喬의 男은 一鉍이요.
o 重岡의 男은 一錞, 一銑, 一錫이다.
o 重呂의 男은 一錕, 一銶요.
o 曾孫 과 玄孫 이후는 더욱 번성(繁盛)하고 불어나니 지금 7,8世에 무릇 280여명이니,
아! 아름답도다.
8.묘소(墓所) : 기룡산(騎龍山)하 하천묘역 大石上(큰 바위 윗쪽) 亥坐原에 장사(葬事)
지냈다.
9.유시(遺詩) : 시(詩) 세 편과 글 두 편, 그리고 상중(喪中)의 만장(輓章) 등 약간의 글이
있다.
1727년에 귀미마을에 건립한 오회당은 삼휴공의 장손인 오회공 휘 석현과 석함, 석겸,
석승, 석임 5형제분의 동탁동연(同卓同硏)하던 공회지소(孔懷之所)로 지었다.
지금은 하천에 옮겨져 유형문화재 7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o오회당 이야기
오회당을 건축했을 때 伯兄은 七十여 歲였고, 仲兄과 叔兄은 六十歲를 넘으셨으며, 公과
아우는 역시 六十에 가까웠다. 수염과 머리는 희었으나 아무 탈들이 없으셨음에 각 詩賦
로서 堂(五懷堂)의 故事로 삼았으니, 遠近 士友들이 듣고 모두 和答 하여왔다.
오회당은 “五老를 命名하여 堂의 이름으로 했다” 하니 곧 公의 의덕(懿德)을 역시 여기에
서 알 수 있다.
伯兄은 따로 별채 네 칸을 지어 五懷로 편액(扁額)하였으니 대개 주아공회(周雅孔懷)의
뜻 에서 따온 말이다.
o오회당(五懷堂)창수록(唱酬錄) 서(序)
당호를 오회당이라 命名함은 宜兄宜弟之義를 숭상함이며 五兄弟분의 우애지도를 돈독히 함이라. 오
직 兄弟間 父母님이 안 계시는 고독하고 돌봐 주는이 없는데 七十에 이르고 或五十이 넘어
서 다행히 함께 무고함을 세상사람들이 모두 복이되고 경사가 있는 집안이라 말을 하며 古今人世之間에 或不免 종선고경 지탄終鮮孤煢 之歎)하고 역불무순씨(亦不無荀氏) 가씨지행수언이(買氏 之幸數焉而) 능히 수(壽)를 보존하였으며, 또 능히 그 수(壽)를 얻었
으 니 君家의 福善만한 이가 누가 있겠는가. 칭함으로 나 역시 固辭치 못 하고 마음에 항상 두렵던차 舍伯께서 朝霧暮煙을 달래기 위하여 건사 영성일당(建四楹成一堂)하니 그 規模
가 아담하여 형제분이 매일 한자 리에 모여 혹상영지(或觴咏之) 혹기박지(或碁博之) 오직
相和 相唱一日 無於樂好事而時或相違則 문득 회지경경언(懷之耿耿焉) 잉차득당호야 (仍此得堂號也) 내차망졸구 (乃此忘拙搆) 四聲하야 求和諸君子하니 즉 청사국추지한야(靑蛇菊秋之瀚也)
계제(季弟) 석림(碩臨)
原韻 五懷堂 伯兄 碩玄
堂號如今取孔懷 孔懷兄弟 좋은 뜻에 堂號를 取했으니
異形兄弟本同骸 모양 다를지나 뼈는 兄弟 한가지라.
微誠初負三春大 약한 정성 三春같은 父母膝下 떠났으나
和氣荊連五萼佳 和氣깊은 한 가지에 다섯 떨기 아름다와
居室已欣憂樂幷 居室에 기쁜 마음 歡樂을 함께하니
祝天惟願死生偕 하느님께 비옵기를 生死도 같이 할일
他昆外禦非吾事 남들 兄弟 氣勢부림 우리할일 아닐지라
莫把良心造次乖 良心을 가져서 잠시 어김없게 하자.
次韻 第二弟 碩咸
新起三楹揭五懷 새로 지은 三間亭子 五懷라 이름하니
爲吾昆季保衰骸 여기서 우리 兄弟 늙은 몸을 기르노라
亭名聚瑞休傳道 정자 이름 상서롭다 말하지 말라
樓號聯芳不足佳 兄弟 聯芳 나타냄이 아름답지 못하구나
詩酒一床淸趣並 한상에 詩와 술이 맑은 趣味 함께하고
塤篪百歲至情偕 塤篪로 和答하니 百年이 至情이라
箇中亦有憂心耿 그 中에도 언제나 걱정되는 일
惟恐昏庸世德乖 昏庸한 우리들이 世德을 어길세라.
又 第三弟 碩謙
支軆初分父母懷 父母의 품속에서 이 몸을 나눠받아
暮年蒼白保形骸 蒼白한 늙은 나이 形骸를 보전허네
姜衾不怕霜威重 큰 이불 같이 덮어 추위도 몰랐었고
謝夢何煩草色佳 出世할 꿈 바이없어 한데 모여 살아 왔지
雨榻風欞詩酒倂 비오고 바람 불면 詩와 술을 함께하고
花朝月夕笑談偕 꽃 피고 달 밝으면 談笑도 무르익어
須知百歲塤篪樂 알겠노라 一平生 兄弟의 이 즐거움을
繼世傳家永不乖 우리집 대를 이어 길이길이 전하리라.
又 第四弟 碩升
團聚荊庭共討懷 같은 마음 같은 뜻에 荊庭에 모여 사니,
餘生何幸保衰骸 우리의 늙은 餘生 多幸한 일 아닐 소냐.
連襟一榻情相篤 한자리에 둘러앉아 情도 서로 두터웁고,
對月三更興自佳 三更에 달떠오니 興도 또한 아름답다.
宜弟宜兄湛樂穩 兄과 아우 흐뭇한 뜻 安穩하기 다름없고,
開樽開榼醉醒偕 술과 안주 열어두고 醉醒도 같이하네.
人間至樂長如許 人間의 기쁜 일이 언제나 이럴세라.
我願兒孫愼勿乖 願컨데 子孫代代 어기지 말지어다.
又 第五弟 碩臨
分軆當年共一懷 몸은 비록 다를지나 한 품에 자라나서
至今猶保五殘骸 五兄弟 늙은 몸이 이날까지 지녀오네
春長棣萼襟期靜 棣萼에 봄이 깊어 마음 서로 흐뭇하고
花暖荊枝氣像佳 荊枝에 꽃이 피니 기상도 아름답다.
山月滿窓吟興足 窓에 비친 달빛 아래 詩 읊어 흥겨웁고
竹風穿箔醉眠偕 대바람 불어올제 醉한 잠도 함께 자네
天倫樂事無終極 天倫에 즐거운 일 終極이 없을지라
常向兒孫戒勿乖 子孫에게 경계하여 어기지 말지어다.
운주산 산행
통덕랑께서는 伯兄과 叔兄을 모시고, 아우는 앞에서 이끌어 함께 운주산(雲住山)에 올라
높은 산에서의 풍경을 감상하셨다.
여러 형제가 의좋게 산행의 모습이 장관이였다고 전한다.
二水에서 이병와를 초청 여러 형제분의 뱃놀이
어느 해 가을인 음력 7월 16일에 아우와 함께 맏형과 중형과 숙형을 모시고 병와(甁窩)(이형상)를 청하여 백암산 아래 이수(二水-자호천)에서 배를 띄워 놀기도 하셨다.